국내여행/섬진강일기

장이 춤을 춘다

찰라777 2011. 6. 21. 08:57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세월 참 빠르다!

이곳 섬진강변에 이사를 온지 오늘로 벌써 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삿짐을 싣고 밤재를 넘어 온지 엊그제 같은데, 지리산 하고도 섬진강변에서 사계를 보내게 되다니…

세월은 과연 화살처럼 빠르다.

 

 

 

1년 전 6월 19일 날은 가족과 함께 이삿짐을 싣고 밤재를 넘어 왔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오늘은 홀로 버스를 타고 밤재를 넘어왔다. 서울아산병원에서 병원 검사 결과를 보고 오는 길이다. 다행히 오장육부에 큰 이상은 없다고 하며 42일간 복용할 약을 처방해 주었다.

 

 

"장이 기능상의 이상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장우울증에 걸렸다고나 할까요? 다행히 다른 곳에 이상이 없으니 안심하시고 약을 잘 복용해 보세요."

 

 

장약에는 우울증 약도 곁들여 있었다. 장이 우울증에 걸리다니… 원인은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지난 1월 27일 어떤 모임에서 잘 사시지도 못하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신 일이 있었다. 그날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모두가 회에다 쇠주를 퍼부어 마셨는데 그 다음 날부터 장에 탈이 나서 설사를 하더니 5개월 동안이나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원인은 약한 장을 너무 혹사를 시킨 것이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밤재를 넘어오며 도종환 시인의 글이 떠올랐다.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란 에세이집에서 그의 이빨을 혹시 시킨 이야기를 했다. 젊은 시절 한참 이빨이 튼튼할 때 쇠주를 마시며 병마개를 모두 이빨로 땄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강한 이빨이 지금은 일그러지고 많이 빠져서 치과에 다니느라 고생을 고 있다는 것. 의사의 진단은 이빨을 너무 혹사시킨 것이 원인이라고 했다는 것.

 

 

모든 것은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다. 나 역시 약한 장을 쇠주와 물고기 생살로 혹사를 시켰으니 장에 탈이 날 것은 뻔 한 일이다. 오죽 했으면 장이 우울증에 걸렸다고 했을까? 아직 죽을병은 아니라고 그러니 장을 살살 달래며 잘 모시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도 밤재를 넘어 구례 땅을 밟으니 마치 오래된 고향에 온 느낌이 든다. 구례버스터미널에 내리니 아내가 마중을 나와 있다. 세월은 나를 기다려 주질 않는데, 아내를 나를 기다려 준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기차역에나 버스터미널에서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사람이다. 나를 기다려 주는 아내가 있으니 나는 행복하다.

 

 

서울에서 내려오기 전에 경부고속터미널 5층에 있는 예식장에서 치르는 친구 아들의 결혼식에 잠간 들렸었다. 그런데 예식장이 어찌나 붐비던지 마치 돗떼기 시장을 방불케 했다. 원래 복잡한 경부터미널은 지하철 3, 7, 9호선이 교차하면서 사람 혼을 빼 놓을 정도로 혼잡했다. 지하철은 번호가 클수록 땅 속으로 깊게 들어간다.

 

마치 두더지처럼 깊은 굴에서 기어 나온 나는 예식장을 찾는데도 한 참을 걸려야 했다. 5층에 있는 예식장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는데 거대한 흰 개미집에서 미로를 찾아 헤매는 한 마리 흰개미 같은 느낌이 들었다.

 

5층 전체가 예식장이다. 그랜드홀, 컨벤션볼륨, 그랜드볼륨 등 이름도 모두 영어일색이다. 그냥 개나리, 진달래, 동백 이런 간단한 우리말로는 쓸 수 없을까? 시골사람들은 길을 찾는데도 헤매지만 혀가 잘 돌아가지도 않는 영어이름을 발음하기도 찾기도 너무나 힘이 든다. 서울에서 40년 넘게 살아온 나도 시골에 살다가 오니 역시 시골사람처럼 길 찾기가 힘들다. 나는 귀농 1년 만에 시골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거기에다가 식당은 또 어떤가? 거대한 식당에는 여러 집 혼례 손님을 한꺼번에 받는다. 뷔페식으로 차려 놓은 식당은 수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집어 나르느라 발에 밟히고, 부딪치고, 음식에 땅에 떨어지고… 자리를 겨우 잡아 밥을 먹는데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정신이 다 아찔해진다. 이건 결혼식장이 아니라 아비규환 아우성 터다.

 

 

그곳에 비하면 이곳 구례 땅은 얼마나 고즈넉한가? 푸른 숲이 시원스레 시야를 즐겁게 해주고 사람들은 느리고 착하다.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섬진강변을 드라이브 하는 기분이 최고다! 아마 우울증에 걸린 장이 좋아서 춤을 추는 것 같다.

 

 

"나 시골 사람 다 되었나 가봐. 이젠 서울에서 못 살 것 같아."

"그걸 말이라고 해요. 서울에서 왜 살아요. 여기서 살지."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을 바라보다가 아내와 나는 마주보며 싱겁게 웃었다. 은빛 물비늘이 반짝거리며 가로수 사이로 지나갔다. 푸른 숲 터널은 녹색샤워장을 방불케 한다

 

"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사람들은 왜 서울에서 살려고만 할까?"

"그거야 먹고 사느라고 그러지 않겠어?"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더 서울에 살려고 하니까 그렇지요?"

"그거야 편리해서 그렇겠지?"

"시골은 불편한가요?"

"백화점, 병원, 음식점, 교통, 떼 지어 놀 사람들… 이런 게 시골은 별로 없잖아."

 

사람들 속에 파묻혀 살기는 서울이 안성맞춤이다. 미로 같은 흰개미 집을 들락거리며 옆집에도 누가 사는지 모르는 곳이 서울이다. 사람이 죽든지 살든 지 간섭이 없는 곳이 서울이다. 간섭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수평리 집에 돌아오니 텃밭에 자란 야채와 꽃들이 나를 반긴다.

 

"와아, 금세 가지들이 이렇게나 컸네! 무 싹도 훌쩍 커버렸군."

"토마토는 또 어떻고요."

"저런, 너무 무거워서 가지가 부러지겠어. 오호! 저기 호박은 아이 머리통 만하게 커졌군!"

"블루베리도 많이 익었어요."

 

녀석들이 일제히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며 주인을 반겼다. 시골은 사람들 대신에 자연의 파노라마가 여기저기서 노래를 부른다. 눈이 맑아지고 호흡을 하기가 편해진다.

 

"여보, 오늘 귀농 1주년 기념식을 뭐로 할까?"

"어머, 벌써 1년이 되었군요."

 

지리산의 사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를 보내는 동안 자연과 친해 졌고, 사람들과 소통을 하며 친국해졌다. 새들과 친해졌으며 벌레들과도 친숙해졌다. 시냇물 소리에 잠들고 새들의 노래 소리에 아침을 연다.

 

모든 만물은 다 연관이 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내가 있으므로 남이 있고, 남이 있으므로 내가 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자, 아무리 장이 탈이 났기로서니 귀농 1년 축배는 들어야지."

"좋지요!"

 

 

 

아내와 나는 둘이서 작은 잔에 포도주를 부어 축배를 들었다. 아니 우리뿐이 아니라 텃밭과 거실에 있는 나무와 꽃들이 함께 축배를 들었다. 파리, 모기, 지네, 나비, 벌, 새… 들이 소리를 지르며 함께 축배를 들었다.

 

"우리의 귀농 일 년을 위하여 건배!"

 

텃밭에서 호박꽃이 함박 웃음을 웃고 있다.

우울증에 걸렸다는 장도 웃었다.

자연의 소리에 장단을 맞추며 장이 춤을 춘다.

귀농 1년의 밤은 이렇게 깊어 갔다.

 

(2011. 6.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