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섬진강일기

비어 있어야 아름답다!

찰라777 2011. 6. 30. 10:28

 

  ▲칠레 알티플라노 미스칸티 소금호수 가는 길. 해발 4000~5000m

 


만히 기억해 보니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배낭 하나 걸머지고 지구촌의 아름답고 위대하다는 이곳저곳을 찾아 여행을 다닌 지 13년의 세월의 흘렀다. 그런데 요즈음 나는 지리산 자락에 정착하여 이곳을 떠나 못하고 있다. 마치 집시가 오랜 방랑의 시간을 보내고 포근한 어머니 품에 안겨 있다고나 할까?


그렇게 멋지고 아름답다는 여행지를 돌아 다녔지만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지리산 자락처럼 포근한 곳은 없었다. 아내와 내가 1년째 머물고 있는 지리산과 섬진강변은 먼 태곳적부터 우리가 머물러 왔던 고향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풍경과 마을 사람들의 소박한 인심이 어머니의 자궁처럼 포근하게 우리를 감싸고 있다.


해서 우리는 1년째 이곳에 콕 박혀있다. 빈농가를 퍼즐조각 맞추듯 수리를 하고, 흙을 리어카로 실어와 텃밭을 만들고, 야채와 화초를 가꾸며 살아가는 삶이 더 즐겁고 바쁘기만 하다. 물론 전(錢)이 떨어져 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있기도 하지만, 아내고 그 전처럼 여행을 떠나지 못해 안달을 하지는 않는다. 물리적으로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대신 우리는 텃밭을 가꾸며 정신세계로의 여행을 떠나곤 한다.


그러다가 나는 가끔씩은 가만히 눈을 감고 우리가 돌아다녔던 그 여행지들을 떠 올려보곤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대부분 내 머리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소들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공간들이다. 몽골의 끝없는 초원과 고비사막,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중국의 타클라마칸 사막, 티베트의 고원과 남미의 팜파스, 그리고 볼리비아의 알티플라노 고원 등이 그것이다.


참으로 이상하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아름답고 위대하다고 떠들어 대는 “7대불가사의 유적지”와 "죽기 전에 꼭 가보아야 할 00곳”, 도시의 풍광은 어디로 간곳이 없고 빈 공간이 많은 장소들만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파타고니아 들판에 핀 이름 없는 들꽃, 이스터 섬에 외로이 서 있는 모아이 상, 바다처럼 너른 티티카카 호수에 떠 있는 갈대섬, 서호주의 황량한 사막, 태즈마니아의 끝없는 숲… 모두가 뭔가 부족하고 빈 공간들이 큰 곳들이다.


너무 완벽하고 화려하며 그림엽서 같은 환상적인 풍광은 빈 공간이 없다. 완벽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풍광을 마주하며 탄성과 환성을 지르기도 하지만, 그곳엔 내가 기어 들어갈 공간이 없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페루의 마추픽추, 이구아수 폭포, 로마의 박물관 같은 유적지들, 깔끔하게 정돈된 베르사유궁전, 서유럽의 예쁘고 화려한 도시들… 그곳에 선 나는 철저한 구경꾼에 지나지 않는다. 꽉 차고, 도도한 위엄 때문에 도대체 내가 끼어 들어갈 공간이 없는 것이다.


비어 있어야 아름답다!

그렇다! 그 이유는 하나다. 비어있어야 아름답다는 것. 비어 있는 곳에는 강도도, 도둑도, 소매치기도, 사기군도 없었다. 위대한 유적지와 화려한 도시에는 언제나 도둑과 사기꾼, 거지들이 득실거렸다. 그러나 몽골초원, 사하라 사막, 알티플라노 고원, 티베트의 고원 등에는 소박한 원주민들의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물질이 부족하지만 따뜻한 인정과 훈훈한 마음들이 있었다.


지금 내가 다시 가고 싶은 여행지는 화려한 풍광과 위대한 유적지가 아니라 점점 더 뭔가 부족하고 황량한 벌판이나 사막으로 눈길이 쏠려있다. 라마들이 뛰어 놀고 있는 볼리비아의 알티플라노, 말을 타고 다녔던 몽골의 흡수굴 호수,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남미의 팜파스, 실크로드 대상들이 목숨 걸고 건너갔던 타클라마칸 사막, 하늘 길을 따라가는 티베트 고원… 아, 나는 이런 곳으로 다시 가고 싶다. 그곳은 비어 있어 공간이 많고 편하다.

 


비어 있어야 편하다.

나는 지금 4개월째 속이 비어 있다. 어쩐 일인지 먹기만 하면 바로 속을 비운다. 하기야 그동안 위장과 소장, 대장 등 오장 육부도 늘 채워 있기만 하여 얼마나 불편했을까? 속이 텅 비어있는 나는 요즈음 아주 편안함을 느낀다. 음식을 적게 먹게 되고, 적게 배설하고... 그러다보니 욕망도 적어진다. 겸손해진다. 비어 있음의 편함을 느끼는 순간들 속에 나는 숨쉬고 있다.


금년도 반원을 그리며 지나가는 시간 속에 나는 지금 속이 비어 있는 채로 지리산 자락에 있다. 이곳 지리산엔 아파트가 없다. 지하철도 없으며, 도시의 소음도 없다. 산사는 비어 있고, 적막한 아름다움이 있다. 비어 있는 고요한 공간에서 나는 내 영혼의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다.

 

비어 있어야 아름답다!

(사진 : 칠레 알티플라노지역 투야히토 소금밭에서)

 

(2011.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