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방랑/80일간의티벳일주

세상에서 사장 큰 드레풍 사원②-아, 티벳 소녀의 저 해맑은 미소!

찰라777 2011. 12. 11. 08:41

 

아, 저 해맑은 티벳 소녀의 미소!

-드레풍 사원에서 만난 사람들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라싸의 드레풍 사원에서 이렇게 티 없이 맑은 소녀를 만난 것은 우리에게 큰 행운이었다.

티벳 하늘처럼 맑은 티 없는 소녀의 미소는 우리의 혼탁한 마음을 씻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소녀의 미소는 문명사회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른 '무엇'이 있다.

그것은 순진무구, 어색함이 없는 눈빛, 꾸미지않는 순수함, 때묻지 않음이다.

 

 

 

 

티벳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나 할머니, 할아버지의 목말을 타고, 혹은 손을 잡고 사원에 온다. 어릴 때부터 사원을 드나들며 부모님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게 되니 성장을 해서도 자연히 기도가 생활화가 된다.

 

 

  

  

▲아내가 걸어준 볼펜 한 자루를

목에 걸고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행복해 하는 티벳 소녀

 

 

 

▲드레풍 사원에서 만난 소녀와 벙어리 청소부

 

 

 

드레풍 사원에서 만난 어린 소녀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사원을 순례하고 있었다. 아내는 그 소녀에게 볼펜 하나를 걸어 주었다. 한국에서 갈 때에 끈이 달린 볼펜을 많이 가지고 갔었는데, 끈 달린 볼펜은 아이들에게 큰 인기였다. 볼펜을 목에 걸고 행복해 하는 아이를 보니 덩달아 마음이 행복해진다. 걸인에게는 작은 돈을, 아이들에게는 볼펜을 주는 적선하는 것은 우리에게 작은 나눔의 복을 받는 기회를 주고 있었다.

 

 

 

 

 

▲드레풍 사원을 순례하는 티벳인들. 머리스타일과 복장이 특이하다.

 

 

 

▲드레풍 사원

 

 

 

우리는 순례자들 틈에 끼어 끝없이 이어지는 대문과 골목을 지나 부처님을 모셔 놓은 법당으로 갔다. 순례자들은 가는 곳마다 버터기름을 뿌리며 합장을 한다. 그리고 반드시 몇 푼의 돈을 놓는다. 우리도 가급적 그들처럼 행동하며 순례의 물결을 따라 갔다.

 

 

법당에는 거대한 불상을 모셔 놓고 있다. 문수보살을 비롯하여 역대 달라이 라마 불상도 있다. 특히 드레풍 사원은 이 사원을 건축한 제3대 달라이 라마 '소남 갸초'를 비롯하여 5대 달라이 라마까지 이 사원에 주석을 했던 달라이 라마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법상에 모셔진 달라이라마의 사진

 

 

 ▲지혜의 상징 문수보살

 

 

▲티벳 불상은 눈빛이 살아 있다.

 

 

그러나 말없는 불상보다도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훨씬 인상에 남는다. 어떤 계단을 따라 올라서니 자비롭게 생긴 라마승이 우리를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다. 우리가 그에게 합장을 했더니 스님은 손짓을 하며 따라 오라고 한다. 준수한 모습에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다.

 

 

 ▲드레풍 사원에서만난 스님

 

 

 ▲우리는 스님을 따라 갔다.

 

 

 

▲스님이 주신 뜨거운 버터차를 마시고 스님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우리는 스님을 따라 어느 정원으로 들어갔다. 스님과 우리는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표정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아본다. 이심전심이다. 스님은 우리에게 뜨거운 버터차 한잔을 권했다. 스님은 버터차를 내밀며 그냥 웃었다. 우리는 따뜻한 버터차 한잔으로 목을 축였다. 마음까지 녹여주는 차였다. 순례 중에 스님의 마음이 담긴 버터차 한잔을 받아먹는 것은 큰 축복이다. 버터차 한잔에 스님의 사랑과 자비심이 듬뿍 담겨있다.

 

 

 

▲사원을 묵묵히 쓸고 있는 벙어리 여인

 

 

 

버터차를 마시고 스님께 합장을 하며 계단을 내려오는데 한 여인이 계단을 열심히 쓸고 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벙어리였다. 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묵묵히 계단의 먼지를 쓸고 있는 벙어리 여인에게 순례자들은 돈을 쥐어 주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녀가 벙어리인줄 아는 것 같았다.

 

  

그 정황으로 보아 아마 그 벙어리 여인은 오랫동안 매일 이 사원을 청소를 하는 것 같았다. 아내도 그녀에게 몇 푼의 돈을 주었다. 돈을 받은 그녀는 다시 계단을 쓸고 있다. 계단을 열심히 쓸고 있는 벙어리 여인을 바라보고 있자니 부처님 당시에 마당을 쓸던  반특이 이야기를 상기된다.

 

 

▲사원의 계단을 묵묵히 쓸고 있는 벙어리 여인에게서 부처님 당시 청소부였던  반특이를 연상케한다.

 

 

부처님이 사위국에 계실 때 머리가 매우 우둔한 반특이라는 비구가 있었다. 부처님은 5백 명의 아라한들을 시켜 날마다 그를 가르쳤으나, 그는 3년 동안 게송 한 줄도 외우지 못했다. 부처님은 반특을 가엾이 여겨 하루는 직접 불러다가 게송 한 구절을 가르치셨다.

 

 

"입을 지키고 뜻을 다스려 몸으로 나쁜 일 범하지 말라. 이와 같이 행하는 이는 이 세상을 잘 건너가리라."

 

 

 

 

반특은 부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동되어 이 게송을 듣자 그대로 따라 외웠다. 부처님은 다시 반특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늙어서야 겨우 게송 한 구절을 외웠을 뿐이다. 나는 너에게 그 이치를 설명할 것이니 일심으로 자세히 들어라."

 

 

반특은 분부대로 열심히 듣고 있었다. 부처님은 그를 위해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의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업(業),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와 같은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업, 탐욕(貪), 성냄(嗔), 어리석음(癡)과 같은 뜻으로 짓는 세 가지 업에 대해 설명하시고, 그 열 가지 업이 일어나는 원인과 소멸시키는 방법을 말씀하셨다.

 

 

 

 

또한 그 업으로 말미암아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상을 쉬지 않고 윤회하는 것과, 또 그 업 때문에 하늘에 태어나기도 하고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며, 도를 얻어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잘 분별하여 말씀하시고, 한량없는 묘법을 설명해주셨다. 그 순간 반특이는 마음이 탁 트이어 갑자기 아라한의 도를 얻게 되었다.

 

 

이 무렵 부처님께서는 날마다 비구 한 사람씩을 보내어, 5백 명이 살고 있는 비구니 절에서 설법을 하도록 했었는데 마침 반특이가 갈 차례가 되었다. 비구니들은 반특이 온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비웃으면서 다음과 같은 모의를 했다.

 

 

"내일 반특 비구가 오거든 오히려 우리가 게송을 읊어서 망신을 주자."

 

 

 

 

다음날 반특은 비구니 절로 갔다. 여러 비구니들이 나와 예배하며 맞이하는 척했으나 저희들끼리 서로 눈짓을 해가며 웃고 있었다. 모두 자리에 앉아 공양을 마치자 비구니들은 반특에게 설법을 청했다. 반특은 곧 설법하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 수줍어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덕이 엷고 재주가 모자라 맨 끝자리의 사문이 되었으며 본래부터 완고하고 우둔하여 배운 것이 많지 않다. 그러나 게송 한 구절은 외우고 그 이치를 약간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설하려고 한다. 모두들 조용히 들어라."

 

 

그때 여러 비구니들이 앞질러 게송을 읊으려 했으나 갑자기 입이 열리지 않았다. 비구니들은 서로 쳐다보며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 아무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비구니들은 비로소 자기들의 생각이 잘못임을 알고는 머리를 조아리고 허물을 뉘우쳤다.

 

 

 

 

 

반특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몸과 마음이 짓는 죄와 복, 하늘에 오르는 길과 도를 이루는 법과 생각을 끊고 선정에 드는 법 등을 낱낱이 설명하였다. 비구니들은 그 설법을 듣고 마음속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기쁜 마음이 일어나 모두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뒷날 바사닉 왕이 부처님과 대중을 청하여 정전(正殿)에서 설법을 듣기로 하였다. 부처님은 반특으로 하여금 위신력을 나타내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발우를 들고 오도록 하셨다. 부처님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시고 대중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때 문을 지키는 군사들이 반특이 오는 것을 보자 막아서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사문으로서 게송 한 구절도 외우지 못한다. 나는 속인으로서도 게송을 알고 있다. 아무런 지혜도 없는 그대에게 보시한다 해도 복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 같은 사람은 청한 일이 없으니 들어 갈 수 없다."

 

 

 

 

하는 수없이 반특은 대궐 밖에 서 있게 되었다. 어느덧 공양시간이 되었다. 부처님은 공양을 하기 위해 정전 위에 자리를 잡고 계셨다. 이때 부처님은 움직이지 않고 계시는데 발우를 든 긴 팔이 밖으로부터 쑤욱 들어오더니 부처님 앞에다 그 발우를 놓았다. 왕과 신하들과 태자들이 이것을 보고 모두 놀라서 물었다.

 

 

"이 팔은 누구의 팔입니까?"

 

 

"이 팔은 반특 비구의 팔이오. 그는 요즘 아라한의 도를 얻었소. 이곳에 올 때 내가 발우를 가지고 오라고 주었는데, 문을 지키는 군사가 그를 들여보내지 않아서 지금 팔을 펴서 이 발우를 내게 주는 것이오."

 

 

 

 

왕은 즉시 반특을 들여보내도록 했다. 뒤늦게 들어오는 반특의 위신은 매우 훌륭해 보였다. 왕이 부처님께 물었다.

 

 

"반특은 성품이 원래 우둔하여 게송 하나도 제대로 외우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어떤 인연으로 도를 얻었습니까?"

 

 

"많이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요. 행하는 것이 제일이오. 반특은 겨우 한 구절의 게송을 외우고 그 이치를 알 뿐이지만 그가 알고 있는 이치는 이미 신의 경지에 들어가 있소. 몸과 입과 마음으로 일으키는 업은 이미 순금과 같이 고요하며 빛을 내고 있소.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그 뜻을 해득하지 못하고 또 실행하지 못하면 한갓 정신만 어지러울 뿐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소."

 

 

 

 

저 벙어리 여인도 반특처럼 아라한의 도를 얻지 않을까?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러운 것을 쓸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다 알지만 빗자루를 들고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많이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가지라도 행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벙어리 여인을 뒤로 하고 골목길을 계속 걸어갔다. 노승이 지팡이에 겨우 의지하여 탑을 돌고 있다. 스님은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 발길을 옮기며 사원을 순례를 하고 있다. 스님의 주름살과 지팡이에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승려들이 계단에 앉아 잠시 쉬고 있다. 어떤 승려는 턱을 괘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집을 떠나 수행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거나 다름없다. 머리를 깎고 수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거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티벳 수행승들

 

 

우리는 사원의 꼭대기까지 올라가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곳에는 태양열 주전자에서 물이 펄펄 끓고 있었다. 마침 스님은 끓는 물을 내리고 새 주전자를 올려놓고 있었다. 이방인들에게는 태양열 주전자가 신기하게만 보인다. 물 한 방울도 귀하에 여기는 스님의 모습에서 도를 본다.

 

 

▲태양열 주전자 끓는 물은 무공해 연소에 무공해 물이다.

 

 

스위치만 틀면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지는 문명사회에서는 물의 소중함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 지구를 태우고, 오염을 일으킨다는 것도 문명사회에서는 별로 느끼지 못한다. 그저 편리함만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 티벳에서는 완전 무공해 태양열로 물을 끓이고 있다. 물의 소중함과 햇볕의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는 순간이다.

 

 

우리는 옥상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스님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스님들은 기꺼이 기념촬영에 응해주었다. 그 순진무구한 스님들의 표정이 맑은 물과 하늘처럼 밝다. 멀리 눈 쌓인 봉우리들이 신비감을 더해준다.

 

 

 

▲진리를 찾아 수행을 하는 티벳의 어린 승려들과 함께

 

 

해발 4000m의 티벳은 무균지대다. 이 자연환경은 고이 보전되어져야 한다. 중국의 침공으로 티벳 사람들은 자유를 잃고 있지만 산천은 거기 그대로 있다. 수행을 하는 스님들도 순례를 하는 티벳 사람들도 거기 그대로 있다. 다만 침공을 한 침략자들만 삼엄한 경계를 하며 마음이 불안할 뿐이다. 침략자는 영원한 승자가 아니다. 그들의 영혼은 정복이라는 그물에 걸려 평화롭지가 못하다. 그런의미에서 침략을 당하는 사람이 침략자보다 영혼의 승자이다!

 

 

▲중국의 침공과 문화대혁명으로 부서진 드레풍 사원

 

 

 

드레풍 사원의 하루는 매우 의미가 깊었다. 우리는 다시 정류장으로 내려와 예의 딸딸이 릭샤를 타고, 다시 301번 버스를 타고 야크호텔로 돌아왔다. 나는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해맑은 미소를 짓는 소녀와 마당을 쓰는 벙어리 여인, 뜨거운 버터차를 내민 중년의 스님, 함께 기념촬영을 했던 순진무구한 스님들이 맑은 미소가 내내 뇌리를 감돌았다.

 

소녀의 맑은 미소 속에서는 관세음보살의 미소를, 벙어리 여인에게서는 반특이의 행을, 어린 스님들에게서는 진리를 찾아 헤매는 선재동자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것은 히말라야의 신이 우리에게 내려준 축복이었다. 육체적으로는 고단했지만 마음은 매우 행복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