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방랑/North America

캐나다 로키로... 오, 노오! 맥스!

찰라777 2012. 7. 29. 16:48

오, 노오! 맥스

 

 

 

▪ 캐나다 로키로 진입

 

늦은 오후에 우리는 롤스로이스 드라이브 흥분에서 체 깨어나기도 전에 맥도날드 호수를 출발하여 2번 도로를 타고 글레이셔 심장부를 거쳐 성 매리 호수에 도착하였다.

‘고잉 투더 선 로드 Going-To-The-Sun-Road'를 따라 아슬아슬한 다리와 깎아 세운 듯한 비탈을 지나니 아름다운 여인의 허리처럼 긴 호수가 나타났다.

사진을 찍으면 가장 멋지게 나온다는 신비한 호수. 선 포인트로부터 바라보이는 매리호수와 컨티넨털 디비드의 경치는 두고두고 지워지지 않을 절경중의 하나였다.

우리는 미국 쪽의 마지막 휴게소 ‘세인트 매리 호수’에서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빙산에서 흘러내려 조성된 처녀의 몸처럼 부드러운 호수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드디어 캐나다였다. 2번 도로에서 17번 도로로 좌회전하여 정확히 오후 6시에 캐나다 국경을 통과하여 워터톤 레이크 공원으로 진입하였다.

“여보, 드디어 여기부턴 캐나다 땅이네요!”

“우리나라 남북한의 3배에 해당하는 캐나다의 앨버타 주 한 귀퉁이에 서게 되었군.”

워터톤 국립공원은 세계최초로 두 나라 즉, 미국과 캐나다가 동시에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공원이다. 빙하호수 워터톤 레이크를 끼고 있는 이 공원은 흑곰, 와파티 사슴, 야생조류, 글래셔 백합 등을 비롯한 야생화와 수천 년이 넘는 처녀림으로 관광객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곳이다.

“우와~ 무슨 집이 저렇게 아름다워요!”

워터톤 타운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호수와 만년설봉을 뒤로하고 얼음성 같은 호텔이 그림처럼 나타났다.

“언덕위에 그림 같은 맨션이란 저 집을 두고 하는 말 같군.”

‘호텔 프린스 업 웨일스’는 정말 한 장의 엽서 같은 집이었다. 우리는 호수 가에 자리 잡은 인형같이 생긴 ‘The Out Inn'에 여장을 풀고 산책을 나갔다.

아마 이처럼 인적이 드물고 호젓하고 아름다운 낭만적인 장소를 이 지구상에서 찾기도 어려울 것 같다. 호수 가에는 와파티 사슴이라고 일컫는 사슴들이 사람들이 가가이 가도 아무런 저항도 없이 풀을 뜯고 있었다.

 

 

▪ 오 노오! 맥스!

 

“헬로! 박, 아유 올라잇?(박, 괜찮아요?)”

우리 부부만 보면 시도 때도 없이 괜찮으냐고 안부를 물어오는 맥스 부부. 그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뜨고 웃으며 다가왔다. 그 옆에는 샌드라가 생글거리며 맥스의 손을 잡고 있었다.

“예, 아 엠 파인!(네 좋아요!)”

우리는 맥스 부부와 함께 수정처럼 맑은 호수 가를 산책하였다. 해가 빙산의 너머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100만년의 빙하와 지층이 만들어 낸 불가사의 산과 호수는 짙은 청색의 호수가 점점 황금색으로 변해가며 비밀스런 로키의 수수깨끼처럼 사라져 가고 있었다.

“초이, 저녁을 먹었나요?”

“아니요, 아직....”

“함께 저녁이나 해요.”

“좋지요!”

맥스 부부와 우리부부는 호수 가에 있는 ‘줌 레스토랑’이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한 테이블에 앉아 각자 음식을 주문했다.

“맥스, 와인 한잔 어때요?”

“아, 난 혈압이 높아서 술을 전혀 못해요.”

“오, 그래요. 그럼 샌드라 부인은요?”

“샌드라는 술을 제법 한 다오.”

“오케이 그럼 포도주 세잔을 주문하겠소. 그리고 이 술값은 제나 내는 겁니다.”

“아, 그래요. 미스터 초이 기꺼이 받아 드리겠습니다.”

샌드라가 생글거리며 좋아라고 했다. 외국인들에게 무언가를 사줄 의사가 있으면 분명히 그 의사표시를 사전에 해야 한다. 음식을 먹고 계산대에서 허둥대는 일은 그들에게 절대로 없다.

그러고 보니 맥스는 추운 로키의 고지대를 여행하면서도 내내 반바지를 입고 다녔다. 몸에 열이 많은 모양.

“초이, 호주에 오면 우리 집에서 숙박을 할 수 있어요. 언제든지 오시오. 당신 부부를 우리 집에서 지내는 것을 환영하리라.”

“아하, 그거 고마운 소리요. 조만간 몇 년 내에 당신의 집을 방문하리라.”

우리는 그날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샌드라는 아내가 영어가 짧아 직접 대화를 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운 듯했으나 그래도 만족해했다. 아내의 웃는 얼굴이 좋고 하면서....

 

우리는 귀국을 해서도 맥스 부부와 서로 편지를 주고받고 전화 통화도 했다. 2000년 크리스마스이브 날에 맥스는 호주에서 우리 집으로 전화를 했다. 성탄을 축하한다고 하면서 언제 호주에 오느냐고 물었다.

“박은 괜찮아요? 우린 초이 부부가 잘 방을 수리를 하고, 페인트를 발라 놓았다고! 언제쯤 올꺼요?”

“아하! 맥스 감사하오. 사정이 좋으면 금년 시드니 올림픽 때 갈 수도 있어요!”

“그거 좋네, 꼭 와요. 기다릴 테니.”

“지금 아내가 영어공부를 시작했다고 샌드라한테 전해줘요!”

“아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샌드라가 이 전화를 함께 도청을 하고 있어요.”

“샌드라! 기다려오. 다음에 가면 박이 영어로 당신과 이야기를 할 수 있을런지도 몰라요.”

“초이! 정말 반가운 소리 내요. 당신들이 오기를 기다릴 깨요.”

우리는 그렇게 통화를 하고 서로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우편으로 주고받았다. 그는 우리이게 시드니의 풍광이 그려진 기념 타올과 칼랜다를 보내왔고, 우리는 남대문 시장에서 하회탈을 하나 사고 한국의 풍경이 그려진 달력을 그들에게 보냈다.

그런데.... 다음해 2001년 3월, 샌드라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를 본 순간 우린 너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우리와 전화 통화를 한 날 저녁 맥스 부부는 외출을 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자동차를 꺼내려고 갔는데, 반시간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아 가보니 자동차 안에 잠이 들어 있더라는 것.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영원히 잠이 들어 버렸다는 것. 사인은 대동맥 경화에 다른 심장마비.

“오, 정말 말도 안돼는 데요!”

“그렇게 건강 했는데…….”

그러나 나의 친구 맥스는 그렇게 허망하게 갔다. 샌드라는 여러 가지 사인 조사관계로 장례식이 늦어져서 3월 1일, 맥스의 장례식을 치르고 3월 3일 날 우리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지상에서 사랑하는 맥스를 갑자기 보내버린 샌드라의 슬픔!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슬픔이다. 샌드라는 얼마 전에도 맥스를 그리면 우리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맥스가 일구어 놓은 정원에 꽃을 심고 맥스가 마치 옆에 있는 양 꽃들과 대화를 하며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한번 왔으면 좋겠다는 것. 2000년도 시드니 올림픽 때 그들에게 간다고 했던 우리는 아직도 샌드라가 살고 있는 호주의 매린랜드를 가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아내는 다음 여행지를 무조건 호주를 1순위로 올려놓고 있다.

지금도 큰 눈을 똥그랗게 뜨고 웃으면서 “박, 아유 올라잇?” 하며 다가 올 것만 같은 맥스!

맥스를 진심으로 추모하며, 그리고 아직도 맥스를 그리워하면서 정원의 꽃들과 대화를 하고 있을 샌드라를 위하여 그녀가 보내왔던 슬픈 편지를 원문 그대로 이곳에 싣는다. 다음에 언젠가 이 글이 책으로 나온다면 그녀에게 위해 선물을 하기위해서도…….

 

 

Dear OK Choi and Jung Hee,

 

I have some very upsetting news to tell you.

There is no easy way to say this.

I lost Max on Christmas Eve 2000.

He went to move the car down into the driveway from under the car port and after half an hour, when he did not come back, I went to see who he was talking to(that is what usually happened, he would get caught up talking to the neighbours).

 

Unfortunately, he was not talking to anyone. He had moved the car down the driveway and that was where I found him, still in the drivers seat. He had had a heart attack.

 

I have been waiting for the coroners report for the post mortem results and it still has not come. I was originally told it would take about four to six weeks. All they would tell me was that he had hardening of the arteries.

 

Max was a very fit and healthy 64. Did not drink or smoke, never got sick or even got colds, so this was very much a complete shock to all.

 

On the 3-1-2001, we had a grave side service first at Rookwood Cemetery and then a 'Thanks Giving' service at our church in Merrylands and a get together afterwards(for tea, sandwiches and a time to talk) in the auditorium above our church.

 

I am told that there were between 350 to 400 people there and they could not all fit into the church. We all knew it would be a big gathering because of all the people Max had contact with over the years and the fact that he 'befriended' almost every one he met.

 

As funeral services go, one of Max's brothers(Alan) did a very good job of getting Max's life down on paper and condensed enough to share, without taking up to much time.

 

Max was grateful for every day of his life and treated it as though each day was a bonus. He had the faith and the belief that he was going after death and he was prepared for that.

 

Max and I had 10 wonderful years together and I am told that I should be happy with that time and to think of all the fond memories that we made together. I am happy for what we shared together, we made each other very happy, but because he was so healthy, I guess I just felt that he would be around to create a lot more.

I miss him so much.

 

3th, Mar. 2001

Love Sandra

 

* I'd like put in this letter to The Memory of Mr. Max Sla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