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임진강일기

진눈깨비 내리는 날 빈대떡 맛!

찰라777 2013. 1. 23. 09:08

진눈깨비 내리는 날

빈대떡 부처 놓고 불러주는 이웃집이 있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

 

오늘(1월 21일)은 하루 종일 진눈깨비가 내렸다. 아침에는 눈이 펑펑 내리더니 점점 눈발이 가늘어져 진눈깨비로 변해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마른 가지와 풀섭에 물방울이 맺히고 땅은 질척거렸다.

 

"돌돌돌" 지붕에서 눈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처마 끝 홈통에서 들려왔다. 근자에 드물게 포근한 날씨다. 이대로 봄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눈폭탄처럼 날아오는 심야전기 난방요금 걱정도 덜고…

 

 

 

오늘은 새들도 진눈깨비를 흠뻑 맡은 채 전깃줄이나 나뭇가지위에 처량하게 앉아있다. 무언가 허전하고 그리워지는 시간이 다. 새들은 진눈깨비를 맞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오후 4시경,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진눈깨비가 쏟아져 내리는 창밖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아랫집 연희 할머니에요. 지금 뭐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연희 할머님, 그냥 쉬고 있어요."

"그럼, 사모님이랑 함께 얼른 내려오세요. 빈대떡 좀 부처 놓았어요."

"그래요! 곧 내려갈게요."

 

 

 

그렇잖아도 출출하던 차에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흘러내렸다. 진눈깨비도 스르륵 스르륵 내리고, 배도 출출한 늦은 오후, 빈대떡 먹기 딱 좋은 분위기다. 더욱이 연희 할머님의 빈대떡 부치는 솜씨는 천하일품이 아닌가! 이 기쁜 소식을 아내에게 전했더니 아내가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전 길이 미끄러워서 걸어내려가기가 힘들 것 같은데요."

"그럼 자동차로 가면 되지 않소?"

"대문 앞 언덕배기를 차가 내려갈 것 같아요?"

"음, 내가 가서 확인을 해보고 오리다."

 

 

눈삽을 들고 대문 밖으로 나가니 아내의 말처럼 질척거리는 진눈깨비가 쌓여 자동차로 내려가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눈 반, 물 반인 진눈깨비는 치우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진눈깨비는 눈보다 더 미끄럽다. 작년에 발목이 골절되어 수술을 받은 아내가 걸어내려 가기에는 아무래도 무리할 것 같아 할 수 없이 혼자서 다녀오기로 했다.

 

연희네 집은 우리 집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바로 임진강 변에 있다. 진눈깨비가 발목까지 질척거려 걷기에 아주 힘든 길로 변해 있었다. 밭 사이로 난 길을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이 적막한 곳에 빈대떡을 부처 놓고 불러주는 이웃이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가! 이 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가? 그런 이웃은 몇 km가 떨어져 있더라도 가야한다.

 

 

 

적막강산 같은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그나마 연희네 집과 이장님 댁이 가까이 있어서 다행이다. 우리가 외출을 하고 없을 때에는 연희네 집보다 조금 가까운 이장님 댁에서 택배를 받아 놓는다. 또 현희 할아버지와 할머님은 우리가 농사를 짓는 것을 가르쳐주는 유일한 사부님이다.

 

그런데 내가 이분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가끔 일손이 바쁠 때 서투른 솜씨로 거들어 주기도 하지만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진을 찍어주는 일이라든지, 수확을 한 고추나 깨, 콩 등을 가끔 친구들에게 소개를 하여 팔아주기도 하지만... 항상 신세를 지고 있는 이 분들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두 집 말고 우리 집에서 주변에 띄엄띄엄 다른 집들이 몇 채 있지만 주말에나 가끔 한 번씩 다녀가므로 소통을 할 기회가 별로 없다. 연희네와 이장님 댁이 없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적막할 것이다.

 

우리 세 집은 어찌 보면 작은 공동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서로 소통을 하며 돕고 살아가는 이웃이야 말로 가장 고마운 공동체가 아닌가!

 

"어서 들어와요. 별 것도 아닌데 미끄러운 눈길에 오시라고 해서 미안해요.'

"무슨 말씀을… 이런 날 출출한 판인데 불러주셔서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

 

 

거실로 들어가니 고소하고 진한 빈대떡 냄새가 온 몸에 확 스며들었다. 맛있는 냄새다! 거실 탁상 위에 따끈따끈한 빈대떡이 놓여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빈대떡이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

 

"막걸리가 있어야 하는데, 길이 워낙 미끄러워서 사오지 못했어요. 소주라도 한 잔 하셔야지요?"

"술을 못하지만… 오늘은 저 빈대떡에 한잔 해야겠군요."

 

 

 

연희 할아버지가 소주 한 병을 가져와 잔에 따랐다. 녹두에다 여러 가지 소스를 넣어 만든 빈대떡은 정말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만큼 맛이 기가 막혔다. 거기에 소주까지 한 잔 마시고 나니 기분이 짱이다.

 

"정말 맛이 있네요. 연희 할머님 빈대떡 솜씨는 천하에 일품이라니까요."

"아유, 그렇게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많이 드세요."

"내년 가을에는 코스모스 축제 때 빈대떡을 부처 팔면 어떨까요? 하하."

"글쎄요. 가을에는 워낙 바빠서 그럴 새나 있나요?"

"허긴 그렇군요."

 

연희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건강한 데다 워낙 부지런하여 작년 농사도 다른 집에 비해 수확이 좋은 편이었다. 가뭄에도 불구하고 고추, 콩, 깨, 율무 농사가 평년작을 넘어섰다고 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이제 쉬는 날도 다 지나갔어요. 농부들은 2월부터 벼, 콩, 옥수수, 율무 등 좋은 품종의 종자를 준비해야 하거든요."

"아, 벌써 그런가요? 저도 금년에는 텃밭 농사를 좀 더 잘 지어 보아야겠어요. 잘 좀 부탁합니다."

 

연희 할아버지는 1년 농사계획에 대하여 말하면서 날씨를 걱정했다. 작년에는 가뭄이 극심하여 고생을 했는데, 그나마 내륙지방이라 수확기에 태풍의 타격이 덜해 그런대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고 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하늘이 봐주지 않으면 1년 농사를 망치게 되지요. 갑자기 우박이 내려 요기 아래 박씨네 밭에 단호박 농사 망치는 것 보셨지요? 3000평 단호박 농사가 순간에 허당이 되어 버렸어요."

"네, 저도 지켜 보았는데 가슴이 아프더군요."

 

가뭄이나 홍수, 혹은 태풍으로 1년 농사를 망치게 되면 농부는 하늘만 바라보게 된다. 그런 경우에 농부는 실업자나 마찬가지다. 농사를 망쳐 수확이 전혀 없게 되니 그 해 직장을 잃은 거나 다름없다. 직장을 다니다가 실업자가 되면 실업수당이라도 나오지만 농부에겐 실업수당이라는 것도 없다. 거름값, 농기계 빌린 값 등으로 빚만 늘어난다고 한다. 이런 실정을 누가 알아줄까?

 

빈대떡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연희네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나서는데 현희 할머니가 빈대떡 한 봉지를 손에 쥐어 주었다.

 

"아이고, 먹고 간 것만으로 충분한데 뭘 또 싸 주세요?"

"함께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가는 동안에 식어버리면 맛이 덜 하거든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 게요."

 

 

아직은 따듯한 빈대떡 봉지를 옆구리에 끼고 진눈깨비가 질척거리는 길을 걸어서 올라오는데 마음이 왠지 흐뭇하고 행복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 진눈깨비를 흠뻑 맞은 강아지가 꼬리를 치며 배웅을 했다. 금년에는 연희네 집에 풍년이 들어 더 풍성한 수확을 거두웠으면 좋겠다.

 

(2013.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