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임진강일기

새들이 맺어준 놀라운 인연!

찰라777 2013. 1. 18. 10:56

나의 유일한 친구, 새들에게 감사드리며...

 

 

폭설에 떨고 있는 새들을 바라보면 눈물이 나려고 한다. 옷도 입지않고, 신발도 신지않고, 난방장치도 없는 영하 20도의 날씨에서 새들은 어떻게 견뎌낼까? 나는 집안에서 두꺼운 옷을 몇 개나 포개 입고, 보일러를 가동하고도 화로를 피우며 난리를 치고 있는데... 저 눈 내린 나뭇가지에 맨발로 앉아 있는 새들을 바라보노라면 그저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영하 20도의 추위에 눈 내린 가지에 앉아있는 새들

 

나는 새들에게 참으로 많은 신세를 지고 있다. 몇 해 전 아내가 병원에 장기간 입원을 했을 때에도 새들은 나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런데 이곳 연천 집에는 더욱 많은 새들이 날아와 나와 가장 친한 벗이 되어주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른아침 노래를 불러주고 있는 까치 부부

 

집 주변에 미처 수확을 하지 못한 콩밭 덕분에 우리 집에는 갖가지 종류의 다양한 새들이 날아들어 매일 멋진 오케스트라를 들려주고 있다. 새들이 노래를 불러주고 있어 이 혹한에도 우리 집은 춥지 않고 훈훈하다. 저 친구들 덕분에 영하 20도의 추위를 거뜬하게 견뎌낼 수 있으니 새들이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새들이 있는 한 우리 집은 영상 20도다.

 

외롭고 힘든 세월을 살아오는데 새들은 나에게 큰 위안을 주고 있다. 지금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가 기억조차 아련한 일이 되고 말았지만,. 4년 전 심장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던 아내는 기적적으로 장기기증자를 만나 심장이식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때 나는 아내를 간호하느라 장기간 아내 곁에서 함께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간병비용도 만만치 않아 장기간 간병사를 둘 수도 없었지만, 그보다는 매일 매일 아내의 상태가 위중하여 남에게 간병을 맡길 수도 없었다.

 

수술을 하기 전에는 아이들과 교대로 간병을 할 수 있어 그나마 형편이 좀 나았다. 그러나 수술 후에 무균병실에 입원했을 때에는 아무나 간병을 할 수가 없었다. 간병자는 종합검진을 해서 감기 등 병을 옮기는 세균이 없고 건강한 자만이 간병이 허락되기 때문이다.

(▲사진 : 무균병실에 입원했을 때 내 생일을 맞아하여 최초로 병원 옥상으로 외출을 허락 받은 아내와 함께) 

 

무균병실에 들어갈 때는 옷 전체를 소독한 병원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고, 수술용 모자를 쓰고 위생장갑을 끼어야 한다. 의사나 간호사들이 수술을 집도할 때 복장과 똑같은 복장이다. 그런데다가 간병인은 화장실도 밖에 나가 사용해야 하고, 병실에서는 식사는 물론 물조차도 일체 마실 수가 없다. 그리고 한번 밖에 나갔다오면 옷, 모자, 위생장갑, 신발 등 일체를 다시 갈아입어야 한다.

 

그러니 하루에도 몇 수십 번씩 소독 옷을 갈아입어야 하고, 밤에 잠을 잘 때에도 수술복장 상태로 잠을 자야 한다. 장기이식을 하고나면 저항력이 갓난아이 수준으로 떨어져 감염이 쉽게 되기 때문이다.

 

수술복장으로 하루 24시간 매일 아내 옆에서 간병을 해야 했는데, 그런 와중에서도 가장 즐거운 시간은 하루 세 번의 식사시간이었다. 음식은 매일 아이들이 집에서 날라왔다. 처음에는 병원식당에서 사먹었는데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매일 여기저기 메뉴를 골라가며 사 먹는 일이 정말 지겨웠다. 그래서 수고스럽지만 매일 아이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왔다.

 

무균병실 아내와 함께 할 때...

참새만이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 아내가 병원에 장기 입원을 해 있는 동안 매일

참새와 대화를 하고 지냈던 병원 옥상

먹을 것을 달라고 앉아있는 참새

(2008년 7월 30일 서울 아산병원)

 

나는 그 도시락을 들고 병원 옥상으로 가서 홀로 식사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참새 한 마리가 식사를 하고있는 내 곁으로 날아오더니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나 지금 배가 무척 고파요. 먹을 것 좀 주세요."

 

모르긴 몰라도 녀석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밥풀 하나를 참새에게 던져주었다. 그랬더니 녀석은 덥석 밥풀을 쪼아 먹었다. 그리고는 다시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내가 던져준 밥풀을 쪼아먹고 있는 참새

 

▲밥을 더 달라고 조르고 있는 참새

 

"친구야, 좀 더 줘."

 

녀석의 표정은 그랬다. 나는 녀석에게 다시 밥풀을 던져주었다. 참새는 내가 밥풀을 던져주면 받아먹기를 반복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녀석과 나는 친구가 되었다. 참새는 내가 도시락이 든 파란 쇼핑백을 들고 가면 어느새 알아보고는 어디선가 날아와 내 앞에 앉아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홀로 오더니 나중에는 하나둘 식구들을 더 데리고 왔다. 그런데 웬걸, 나중에는 10~20마리 떼를 지어 날아오질 않겠는가.

 

"야, 이렇게 많이 데리고 오면 내가 먹을 게 없잖아."

"나만 혼자 배불리 먹기가 미안해서요. 친구들에게 그만 소문을 내고 말았지요."

"하하, 그래. 그럼 다음에는 너희들을 위해서 밥을 더 많이 싸와야겠구나."

 

 ▲가족들로 보이는 참새

 

점점 더 늘어나 떼거리로 몰려든 참새들(2008년 7월 서울아산병원 옥상)

 

나는 참새들을 위해 아이들에게 밥을 좀 더 많이 싸오라고 주문을 했다. 그리고 더 늘어난 새들과 나누어 먹게 되었다. 병원생활이 심심한 나는 옥상에서 식사시간 때마다 새들과 대화를 했다.

 

"야, 너희들이 내 마음을 알기나 하니?"

"짹짹짹... 알고 말고요.우리들도 입원을 하고 있는 댁의 아내를 위해 메일 기도를 하고 있어오."

"허허, 정말?"

"그럼요. 너무 걱정 말아요. 곧 나을 테니."

"와~ 너희들 정말 고맙구나!"

 

새들은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내가 일어서면 어디론가 날아가곤 했다. 아내가 퇴원을 할 때까지 새들과 친구가 된 나는 외롭지가 않았다. 식사시간이면 참새들이 기다려져 하루하루가 지루한 줄을 모르고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저 새들 덕분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아내를 정성스럽게 간호를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새들에게 엄청난 신세를 진 셈이다. 무균병실에 입원을 한 아내는 회복 속도가 빨라 한 달 만에 퇴원을 하게 되었다. 아내가 퇴원을 하게 되어 기쁘긴 한데 옥상에서 몇 달 동안 친구로 지냈던 참새들과 헤어지려고 하니 괜히 가슴이 울컥해졌다.

 

▲정들었던 참새들과 이별을 하던 날 참새들도 슬픈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병원 옥상에서 밥을 먹던 날 나는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아 새들에게 거의 다 주고 말았다. 외롭고 힘들 때 매일 변함없이 친구가 되어주었던 새들이 아니었던가.

 

"새들아, 너희들 기도 덕분에 아내가 빠르게 회복되어 퇴원을 하게 되었어. 그동안 너무 고맙웠어!"

"네, 저희들도 너무 기뻐요!"

"그래, 고맙다. 너희들도 잘 있어...."

"짹짹... 앞으로도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할 게요."

 

참으로 고마운 친구들이었다. 새들과 이별을 하려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앗다. 아내가 빨리 회복한 것도 병원 옥상의 새들이 기도를 해주고 도와준 덕분이 아닐까? 아마 새들이 내 딱한 사정을 알고 알게 모르게 기도를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참새들을 마지막으로 이별을 하던 날, 어릴 적에 읽었던 <개미집을 구해준 이서방>이란 동화가 생각났다. 이 동화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농사를 짓고 있는 가난한 이서방이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농사를 망쳤는데 빗물에 떠내려가는 개미집을 보고 개미들을 구해주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이 서방의 곳간에는 쌀이 엄청나게 많아지고, 관가의 곳간에는 쌀이 점점 줄어들었다. 개미들 덕분에 이서방은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고을 원님이 이서방을 불러들였다. 억울한 이서방은 개미를 구해주고 부자가 된 사연을 원님에게 들려주고 원님과 함께 곳간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곳간에서 쌀이 기어 다니는 것이 아닌가! 수많은 개미들이 쌀을 물고 이서방 집 곳간으로 옮겨주고 있었다. 빗물에 떠내려가는 개미집을 건져 목숨을 살려준 개미들이 이서방에게 은혜를 갚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연을 알게 된 원님은 이서방을 풀어주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모두가 공생 공존을 해야 한다. 아내가 병원에 장기간 입원을 했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다. 의사선생님, 간호사님, 가족친지들, 친구들, 그리고 생명의 장기를 기증해주신 분….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님, 그것은 나의 변함 없는 친구가 되어 주었던 병원 옥상의 새들이다. 지금도 나의 유일한 친구 참새들을 생각하면 코끝이 시큰해진다.

 

블로그에 올린 새 이야기가 놀라운 인연으로...

 

▲ 마른 풀섶에 앉아 먹이를 쪼아 먹는 박새(2013년 1월 4일 연천)

 

아내는 정상인의 생활을 할 정도로 건강을 되찾기는 했지만, 맑은 공기와 공해가 없는 시골 숲 속 가까운 곳에 사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3년 전에는 지리산에 내려가 빈농가에 세 들어 살기도 했는데, 그 때에도 섬진강변에 있는 수평리 마을 집에는 늘 새들이 찾아와 주었다.

 

그러나 한 10년 전혀 이사를 올 계획이 없다고 했던 집 주인이 재작년 겨울 갑자기 이사를 오는 바람에 나는 할 수 없이 수평리를 떠나야 했다. 그런데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곳 금굴산 자락 임진강변에 새로운 둥지를 틀게 되다니….

 

나는 섬진강변에서 살면서 매일 '섬진강 일기'를 써서 블로그에 사진과 함께 올렸다. 2011년 11월 23일, 너무 갑작스럽게 집을 비우게 되어 미처 다른 집을 구하지 못하고 수평리 마을을 떠나게 된 마지막 일기를 올렸다. 그런데 그 마지막 일기를 읽은 블로그 독자 한 분이 놀라운 댓글을 남겼다.

 

▲ 콩밭에 날아드는 콩새(연천)

 

".......제가 경기도 연천에 집을 한 채 소유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데 한번 찰라님(필자)을 모시고 초청하고 싶습니다. 경기도 연천이어서 그곳은 임진강이 흐르는 곳입니다. 찰라님께서 임진강 일기를 쓰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2011.11.23 K님의 블로그 댓글 중에서)

 

댓글에는 사무실 전화번호와 핸드폰 번호를 남겼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다니.... 바로 그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해 11월 28일 파주에서 그분을 만나 이곳 연천 집을 방문하고 즉석에서 살겠다고 결정을 하고 당장 이사를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임진강변 금굴산 자락에서 매일 매일 생활을 '임진강 일기'를 쓰며 살고 있다.

 

▲ 눈 쌓인 가지에 앉아 있는 새들(연천)

 

원래 이 집은 집주인 K씨가 살기 위해서 7년 전에 잘 지어 놓은 집으로, K씨는 이곳에 살며 서울로 출퇴근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늦둥이가 태어난 바람에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어 집을 비워두게 되었다고 했다. 이곳은 워낙 오지인지라 유치원, 편의점은 물론 구멍가게 하나도 없어 아이를 키우기에 어려운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나는 K씨와 블로그에서 만난 인연으로 이곳에 이사를 오게 되었다. 생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와의 인연!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풀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새들이 이 집 주인과 우리를 연결해준 것 아닐까? 나는 이를 새들이 맺어준 놀라운 인연으로 생갈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새들과 집주인 K씨와의 아름다운 인연을 소중하고 고맙게 생각하며 살고 있다.

 

▲ 집앞 콩밭에서 콩을 쪼아먹은 후 한가롭게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콩새(2013년 1월 5일 연천)

 

건강을 되찾은 아내와 함께 이곳 연천에서 많은 새들을 다시 만나니 기쁘기 그지없다. 비무장지대가 가까운 연천은 천혜의 자연생태계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다양한 새들이 날아들어 나는 더 많은 새 친구들이 생기게 되었다.

 

오늘도 콩밭에서 새들이 즐겁게 콩을 쪼아 먹으며 즐거운 식사를 하고 있다. 배가 부른 새들은 콩밭 주변의 나뭇가지에 앉아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새들은 아침에 우리 집 뒤 금굴산 숲에서 날아와 하루 종일 콩밭에서 먹고 놀다가 밤이 되면 다시 금굴산 숲으로 날아간다.

 

새들에게 큰 선물을 준 콩밭 주인은 동화 속의 이서방처럼 내년에는 풍년을 맞이하지 않을까? 새들에게 이렇게 좋은 일을 했으니 신세를 진 새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