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임진강일기

아니 이럴 수가! -김장배추의 시련

찰라777 2013. 9. 5. 06:04

아니 이럴 수가…

김장배추의 시련

 

 

요즈음 아침저녁으로는 날씨가 제법 차갑습니다. 더욱이 이곳 휴전선 근처인 연천은 쌀쌀하기까지 하여 아침에 밖에 나갈 때에는 카디건을 걸치거나 긴 소매 옷을 입어야만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다가 요즈음 단풍잎돼지풀을 베어내느라 알레르기 비염이 생겨 재채기 콧물감기로 애를 먹고 있습니다.

 

그래도 농부는 아침이면 논밭에 나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9월 들어 땡볕이 어찌나 쨍쨍한지 김장배추를 심어 놓은 텃밭에 물을 주지 않으면 금방어린 배추가 시들시들해지고 맙니다. 오늘 아침에도 배추 밭에 물을 주기 위해 텃밭으로 갔습니다.

 

▲고라니가 쑥밭을 만들어 버린 김장배추 밭

 

 

"아니 이럴 수가…!!!"

 

배추 밭에는 배추는 한 포기도 없고 여기저기 뿌리만 뒹굴고 있질 않겠습니까? 아연실색 하며 자세히 보니 고라니 발자국이 여기저기 나 있습니다. 고라니가 하루 밤 사이에 배추 150포기를 다 뜯어 먹어 버린 것입니다.  

 

어제는 해땅물자연농장의 논에서 천진난만하게 나를 쳐다보는 아기고라니를 보고 귀엽게만 생각이 되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고라니가 원수처럼 미워지는 군요. 사슴처럼 선한 눈동자를 가진 아기고라니는 정말로 귀여웠습니다. 그런데 그 귀여운 입으로 1년 농사를 망치다니 미움으로 돌변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귀엽고 사랑스럽게만 보였던 아기고라니가 오늘은 원수처럼 보인다.

 

속담에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집 지붕 위에 앉은 까마귀도 어여쁘다”고 하였습니다. 허지만 어느 날 인연이 변하여 정이 떨어지면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어 진다고 하더니 내가 꼭 그 꼴입니다.

 

비록 동물이지만 어제의 고라니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엽기만 했는데, 1년 동안 먹을 김장배추를 모두 망쳐버린 지금은 아기고라니가 밉게만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고 해서 반드시 기뻐할 일도 아니요, 미워한다고 해서 꼭 상심을 할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미움이 바뀌어 사랑을 할 날도 있을 테니까요.

 

 

▲전곡에서 사온 CR배추 모종

 

▲다시 심은 김장배추

 

인근에 진상리와 우정리에 있는 육묘상에 전화를 해 보았더니 배추모종이 다 떨어지고 없다고 하는군요. 나는 배추모종을 구하기 위해 아침 일찍 부랴부랴 전곡으로 갔습니다. 전곡에도 딱 한군데 배추 모종 있었습니다.

 

원래 심었던 배추모종은 불암3호였는데, 전곡에 있는 배추 모종은 CR배추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배추 종류를 가릴 때가 아닙니다. 이 모종이라도 감지덕지하며 사와 다시 텃밭에 배추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배추씨를 뿌려 기르고 이식을 하여 애지중지 심었던 불암3호 배추 싹들이 눈에 어른거립니다. 그만큼 애정을 가지고 모종을 키웠기 때문입니다.

 

허지만 고라니를 꼭 미워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꿈속의 일이요, 허공 속에 핀 꽃과 같이 본래 진실한 것이 아니어서, 사랑과 미움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 사람의 마음에 따라 변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곳에 오기전부터 고라니는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고, 그런 고라니가 맛있는 먹거리를 찾아 뜯어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심은 배추모종이 잘 커주기를 바라며 울타리를 점검하고 허술한 곳에 망사를 이중으로 둘러쳤습니다. 소 잃고 외간 고치는 격이지만 어찌하겠습니까?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