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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신의 거대한 남근상이 안치된 브리하디스와라 사원

찰라777 2014. 5. 21. 06:24

시바 신의 축제가 열리는 브리하디스와라 사원

 

촐라왕조의 문화가 꽃을 핀 탄자부르

 

 

 ▲시바 신의 축제가 열리고 있는 탄자부르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에 입추의 여지없이 모여든 참배객들

 

▲인파로 붐비는 사원 입구

 

남인도 타밀나두 주 탄자부르는 촐라왕조(9-13세기)가 300년 동안 찬란한 힌두문화를 꽃 피웠던 힌두고도입니다. 기원 후 1세기에 조그만 부족으로 출발한 촐라왕조는 그들 부족 중 하나가 탄저부르를 정복하여 독립국가로 면모를 갖춘 후, 907년 촐라의 유명한 군주인 파란타가(Paretaka) 1세가 판디아 왕국을 공격하여 마두라이를 함락시킴으로서 인도의 남쪽 타밀지방을 장악, 드라비다 스타일의 힌두문화가 크게 융성하게 되었습니다.

 

 

▲고푸람에 새겨진 시바 신 조각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에 대한 설명을 새긴 타밀어

 

우리가 탄자부르를 방문했을 때는 마침 그 유명한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에서 시바 신 축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탄자부르 시내의 모든 사람들이 이곳 브리하디스와라 사원(Brihadishwara Temple)으로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사원 안팎은 발을 딛을 틈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 군중들은 무엇 때문에 모두 이 사원으로 모여 들까요?

  

 

석양노을이 질 무렵 나는 군중 속을 겨우 뚫고 들어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역사적인 유물 앞에 섰습니다. 이 아름다운 사원의 모습을 아내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게 느껴집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아내는 사원 밖에 앉아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습니다. 여행 출발 당시부터 어쩐지 아내가 힘을 받지 못하고 있어서 걱정이 됩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석조사원

 

브리하디스와라 사원(Bridishwara Temple)은 1010년 촐라왕국의 라자라자 1세가 건축한 힌두사원으로 시바 신을 모신 드라비다양식의 대표적인 건물이라고 합니다. 높이 66m에 이르는 화강암으로 건축된 비나마(Vinama:본당)는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거대한 탑을 이루고 있습니다.

 

▲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연상케 하는 브리하디스와라 사원 본당. 20층 건물 높이에 무게 81톤의 시카라(첩탐)을 얹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사원은 가로 120m, 세로 240m에 달하고, 이중의 성벽으로 성과 속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동쪽으로 나 있는 탑문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해자가 둘러져 있고, 동서 중심축을 따라 2개의 고푸람, 난디(Nandi:시바가 타고 다녔다는 황소) 사당, 2개의 만다파(예배당), 안타라라(전실), 비나마(본당)가 일직선상으로 늘어서 있습니다.

 

고푸람과 난디상, 만다파, 비나마가 일직선으로 늘어서 있는 브리하디스와라 사원

 

남인도에 남아 있는 힌두 미술과 건축은 고대 순수 힌두 사상과 다양성 측면에서 간다라 불교미술이나 여타 종교미술을 능가하며 미적 관점에서도 매우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특히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은 9세기 말 촐라 왕조가 들어서면서 그 전성기에 세운 힌두사원으로 화강암에 새긴 조각미가 뛰어나 보입니다. 20층 빌딩 높이에 다양하게 새긴 조각과 무게가 무려 81톤에 달하는 단일 바위 시카라(Sikhra: 성소 꼭대기의 첨탑)는 시대를 뛰어넘어 과히 위력적인 모습입니다.

 

▲81톤의 단일바위로 깎은 시키라(첨탐)

 

성인 1500명에 달하는 무게를 천 년 전 기중기 등의 운송장비도 없는 시기에 단순한 사람의 힘으로 올렸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현지가이드의 설명으로는 4km의 경사로를 토목공사로 만든 뒤, 완만한 경사로를 통해 이 거대한 바위를 건물 꼭대기까지 끌어올렸다고 합니다. 이는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 시 사용한 방법과 비슷합니다.

 

높이 4m 둘레 7m의 거대한 남근상이 안치된 힌두사원

 

본당 안에는 높이 4m, 둘레 7m의 시바 신 링감(남근 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바의 남근상은 외벽을 따라 250개나 안치되어 있습니다. 남근상 뒤 벽에는  그 시대의 아름다운 벽화들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 남근 상을 향하여 오체투지로 끊임없이 절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며 남근숭배사상은 시바 신의 남근을 숭배하는 힌두문화에 기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높이 4m, 둘레 7m의 거대한 시바신 링감(남근)이 안치된 성소 본당에는 링감에 예배 드리기 위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봉당 우측 전실에는 250개의 링감(남근)이 요니(여근)상 결합하여 안치되어 있다. 

 

▲시바 신의 남근 상 링감과 벽화.

 

시바신의 링감은 인도전역 시바 신전과 가정집 사당에도 안치되어 가장 대중적으로 숭배를 받고 있습니다. 분기탱천하여 고추선 링가 밑에는 의례 요니(yoni-여근)가 받들고 있습니다. 현지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이 요니는 시바의 본 부인 샥티 여신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링가와 요니가 결합해야만 완벽한 사랑의 힘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신의 결합은 존재의 완전성과 만물의 근원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힌두교인들은 가장 중요한 성소에 시바의 링가을 안치하고 공물을 바치며 경배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모든 존재 원리가 음과 양의 조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거대한 석조사원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떠오르게 합니다. 물론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높이가 140m나 되고, 건축시기도 훨씬 이전이어서 비교가 불가능 할 수도 있겠지만, 층층이 아름다운 조각을 새겨 쌓아올린 조형미는 피라미드의 단순성을 뛰어넘어 보입니다.

 

▲뛰어난 조형미가 돋보이는 본당의 다양한 조각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은 데칸고원 북쪽에 같은 시기에 건축 된 카주라호(AD 950~1050) 힌두 사원과 그 모티브가 확연히 구분이 되어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 중부에 광활하게 뻗어있는 데칸고원은 인도의 문명사나 정치사에 남과 북을 단절 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문득 역사의 수례바퀴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신의 개입으로 일정한 코스를 순환하는 것이라는 역사학자 토인비의 말이 떠오릅니다. 토인비는 어떤 문명이든 그 문명이 당면하는 도전에 성공하여 응전을 하면 계속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전에서 실패를 하면 그 문명은 해체의 주기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문명은 발생, 성장, 쇠퇴, 그리고 해체의 주기를 갖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석양노을에 현란하게 빛나는 비르하디스와라 석조사원

 

촐라왕조(846~1270)는 985년에 왕위를 계승한 라자라자(Raja Raja:왕중의 왕이란 뜻) 1세 시대부터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그는 카웨리 강 부근의 작은 왕국에서 군대를 육성하여 북쪽의 찰루키아와 체라, 그리고 남쪽의 판디아 왕조를 물리친 후, 스리랑카까지 정복하여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브리하디스와라 사원도 이 시기에 축조되었습니다.

 

라자라자 1세의 아들인 라젠드라 1세(1012~1044)는 아버지의 위업을 이어 받아 인도 북부 갠지스 강까지 출정을 하였으며, 말레이 반도, 수마트라, 자바까지 진출하였습니다. 보통 30년 넘게 통치를 한 촐라 왕들은 안정된 통치기반과 정복지에서 획득한 부와 노동력을 이용하여 이처럼 거대한 석조사원을 건축할 수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됩니다.

 

▲조명을 받은 사원은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300년 동안 영화를 누렸던 촐라왕국은 13세기 중엽 타밀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했던 판디아 왕국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결국 판디아 왕국의 도전을 막지 못하고 왕조를 마감했지만 그 문명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두 왕조가 같은 힌두문화 영역에 있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