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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숨은 성지,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제주올레12코스)

찰라777 2015. 9. 4. 10:28

제주올레길 12코스

 

제주도의 숨은 천주교 성지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

 

저는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생명이 저에게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천주교를 신봉하십시오.”

 

 

1846916일 김대건 신부가 26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 용산구 이촌동 앞 한강 모래사장 새남터에서 참수되기 직전 마지막에 남긴 말이다.

 

이번 여름 휴가 때 제주올레길을 걷다가 도착한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은 김대건 신부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게된 동기가 되었다. 특히 천주교 박해의 칼날에 굽히지않고 장렬하게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는 많은 감명을 받게 해주었다.

 

그는 40여차례의 심한 문초와 형벌 끝에 천주교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군문효수형을 선고 받고 새남터(용산구 이촌동 한강변)의 이슬로 순교했다.

   

그의 마지막 유언처럼 김대건 신부는 한국에 천주교를 전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천주교의 성지가 되어 전국 곳곳에 남아 있다. 그는 순교한지 138년 후인 19845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천주교 성인품에 올랐다.

 

천주교 여러 성지 중에서도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은 김대건 신부가 목선을 타고 상해로 가서 사제의 서품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오는 도중 거센 풍랑으로 제주도 용수해변에 표착한 자리에 세운 성지다. 

 

사제품을 받기 전 김대건 부제는 18451월부터 4월까지 서울 돌우물골(石井洞, 서울 종로구 경운도과 견지동에 걸쳐 있었던 마을)에 거처를 하다가 이 땅에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해 11명의 교우들과 함께 목선을 구입하여 1845년 4월 30일 제물포(현제 인천항)를 떠나 상해로 가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가 탄 목선 라파엘호 항해도

 

 

▲라파엘호 표류도

 

김대건 부제 일행은 출항한지 하루 만에 큰 폭풍우를 만나 표류를 하다가, 528일 중국 오송항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 해 817일 상해로 가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은 후, 831일 조선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라파엘호는 다시 풍랑을 만나 서해바다에서 표류를 하다가 상해를 떠난지 28일만인 928일 제주도 용수리 해안에 표착하였다. 그는 용수리 해변에서 배를 정비하여 1012일 전북 익산 황사나포 나바위에 도착하였다.

 

 

 

▲김대건 신부가 표착한 용수리 해안

 

 

천주교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는 19983월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 건립과 라파엘호 복원사업 추진을 결정하고, 학계의 고증을 거쳐 2006111일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에 성 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을 개관하였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이곳 용수리 해안에서 비밀리에 사제로서는 첫 미사를 봉헌한 후, 한국에 천주교를 전도하기 위해  순교의 길로 떠났으나, 제주해안 표착 1년 뒤인 1846916년 새남터에서 26세이 젊은 나이에 순교를 하게 된다.

 

 

올레코스를 걷다가 표류하듯 도착한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관

 

 

제주올레길 12코스에 위치한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은 아름다운 차귀도가 한 눈에 바라보이는 용수리 포구에 위치해 있다. 아내가 심장이식을 받은 이듬해 2009년 7월, 우리는 제주올레길 13코스 전체(당시에는 13코스까지만 개발)을 걷기위해 제주도로 갔다.

 

 

▲김대건 신부는 아름다운 차귀도가 바라보이는 용수리포구에 표착하였다.

 

 

이식을 받은 심장이 아내의 몸에 적응하기위해서는 걷는 운동을 많이 해야 한다는 의사의 충고에 따라 우리는 1코스부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무더운 날씨인데도 아내의 의지는 대단했다. 발이 부르트고 물집이 생겼다. 그런데도 우리는 걷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7월 6일부터 걷기 시작한 올레길을 우리는 23일 만인 7월 29일 제 13코스인  저지오름까지 완주를 할 수 있었다. 실로 240km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제주올레길을 걷다가 표류하듯 도착한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은 우리들에게 여러가지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죽음을 무릅쓰고 천주교를 전도하다가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굳은 의지는 우리들에게 강한 정신을 심어주었다. 그 이후 아내와 나는 한라산 백록담, 지리산 천왕봉, 설악산 대청봉, 그리고 백두산 천지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 덕분인지 아내는 이식을 받은 심장이 몸에 잘 적응되어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용수리포구에 건립된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

 

 

후세 사람들은  김대건 신부의 항해를 <토비아의 여행>에 비유한다. 구약성서 <토비아서>에 나오는 토비아는 니니베(티그리스 강 상류에 위치한 태고의 도시) 사람으로 대천사 라파엘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여행을 하며 악령을 퇴치하고 부친의 대금을 거두어  돌아와 물고기의 담즙으로 부친의 눈을 고친다.

 

김대건 신부의 항해를 토비아의 길에 비유한 것은 온갖 박해 속에서도 풍랑으로 표류를 하며 신부 서품을 받아와 이땅에 천주교 뿌리내리게 한 목숨을 건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기념관에는 김대건 신부가 제물포를 출발하여 상해로 항해를 다녀온 목선 <라파엘>호를 복원시켜 놓고 있다. 

 

▲대천사 라파엘의 이름을 따서 지은 라파엘호. 김대건신부가 상해로 타고간 목선이다.

 

 

 

사제로서 첫 미사를 올린 역사적인 성지

 

기념관에는 김대건 신부의 흉상, 사도의 길, 라파엘호의 여정, 한국에서의 첫 미사 등이 차례로 진열되어 있다.

 

▲김대건신부 표착 기념관 연못과 라파엘호

 

 

김대건 신부 신부 제주표착기념관은 그가 목숨을 건 항해로 상해에 도착, 신부서품을 받고, 이곳에 표류하여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 고국 당에서 첫 미사를 올린 장소라는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념관에는 한국에서의 첫 미사 장면을 연출해 놓고 있다.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첫 미사를 올리는 장면

 

 

용수리 해안은 아름다운 차귀도가 바라보이고, 한라산 정상이 보이는 경치가 빼어난 아름다운 포구다.  또한 용수리 포구에는 사철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포나무 등 난대식물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 에 절부암이란 바위가 있다. 또한 인근에는 차귀도와 송악산, 죽도를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수월봉도 있다.  

 

기념관을 둘러본 우리는 기념관 옆에 있는 작은 성당으로 들어갔다. 나는 성당입구에 비치된 성수로 이마을 찍고 합장을 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초상과 상해로 항해를 한 그림이 몇 점 걸려진 성당은 고요하다. 성당 한켠에는 고백실도 있다.  

 

▲성당입구에 비치된 성수과 고백실

 

나는 나무의자에 앉아 잠시 묵상을 했다. 그리고 청년 김대건 신부를 생각해 보았다. 그는 불과 26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는 온갖 회유를 받으며 40여 차례의 심한 문초와 형벌에도 굽히지 않고 신앙의 길을 걸어갔다. 그가 새남터에서 참수되는 날 마지막으로 한 유언이 다시 또 올랐다.

 

▲성당 내부

 

 “저는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생명이 저에게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천주교를 신봉하십시오.”

 

 성당을 나오니 용수리 해변에는 풍차가 돌아가고 있었다.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 갤러리

 

 

 

 

 

 

 

 

 

 

 

 

 

 

 

 

 

 

 

 

 

 

 

 

 

 

●용수리해안에서 바라본 차귀도와 수월봉(제주올레길 12코스)

 

 

 

 

 

 

 

 

 

 

수월봉

 

 

 

 

 

 

 

 

 

 

절부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