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울창한 나무들로 덮여있는 단데농(Dandenoog)마운틴. 오전 10시 30분, 드디어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증기기관차가 길게 쇳소리 나는 기적을 울리며 벨그레이브(Belgrave)역을 출발했다. 어린 시절 TV명작만화 시리즈에서나 보았던 증기기관차다. 빨간색의 증기관차는 출발하자 말자 곧 유칼리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원시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퍼핑 빌리 추억의 증기관차의 출발지점인 벨그레이브 역
때 묻은 멜빵바지에 챙이 짧고 가운데가 납작한 빵모자를 눌러쓴 나이가 지긋한 기관사가 운전을 하며 가끔씩 추억의 기적소리를 울린다. 반짝거리는 금색 단추를 단 검정 제복을 폼 나게 빼 입은 승무원들이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짓는다. 열차 한 칸에 한 명씩 탄 금색 단추의 승무원들은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드려주고 함께 사진도 찍어준다. 아이들은 숲 속을 달리는 증기관차 안에서 차장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로 동화의 나라에 온 착각에 빠진다.
△아이에게 모자를 씌워주고 사진을 찍어주는 승무원 할아버지.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는 할아버지는 자원봉사자다 .
퍼핑빌리 '공식승차 자세(?)'
기차는 "칙칙폭폭" 정겨운 소리를 내며 100m 가 넘어 보이는 울창한 유칼리나무 숲속을 천천히 달려간다. 레일 양 옆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양치식물들이 마법의 정글처럼 펼쳐진다. "빽~" 기적소리와 함께 화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수증기는 숲 속을 마치 마법의 공간처럼 변하게 한다. 오픈된 창턱에 걸터앉은 아이들은 모두 창밖으로 팔과 다리를 내민다. 창턱에 앉아 기차 밖으로 팔다리를 내 놓는 것은 퍼핑빌리 증기기관차의 '공식 승차 자세(?)'라나.
△창턱에 걸터 앉아 손발을 내미는 자세는 '퍼핑빌리 공식 승차자세(?)'라고... 시속 10~20km달려 전혀 위험하지 않다.
아이들은 영화 "해리 포터"에 나오는 주인공이라도 된 듯 으쓱거리며 손과 발을 창밖으로 내밀어 '숲 속의 요정'에게라도 신호를 보내는 듯 무언가 신호를 보낸다. 아이들의 신호에 부응이라도 하듯 기차가 커브를 돌아서자 '콰이강의 다리'를 연상케 하는 목재교각이 나타난다. 빅토리아 주정부가 문화유산으로 등록한 트래슬 브리지(Trestle Bridge)다. 기차가 하얀 증기를 내 품으며 다른 모퉁이를 지나면 다시 파란 호수가 나타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준다. 신이난 아이들은 계속해서 함성을 지르며 즐거워한다.
△목재 다리를 지나가는 증기기관차. 주민들은 기차를 보면 멈추어 서서 손을 흔들어 준다
타임머신기차를 타고 옛날 이야기를....
퍼핑 빌리 기차는 1세기를 달려온 석탄 증기관차다. 1900년부터 석탄과 목재를 수송했던 기차는 1958년부터 관관용으로 개조되었다.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증기기관차이자 세계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석탄증기열차로 꼽히는 기차다. 벨그레이브역에서 겜부룩까지 25km를 운행하는 증기관차는 온 가족이 즐기는 추억의 기차다. 아빠 엄마 혹은 할아버지와 함께온 아이들은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조상들의 개척 이야기를 듣는다. 함께 기차를 탄 가족 모두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속으로 빠져들어간 듯한 표정들이다.
△증기기관차를 운전하는 기관사가 물탱크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기차는 광활한 초지를 곡선을 그으며 지나가고, 끝 간 데 없는 포도밭도 지나간다. 기차가 달리는 동안 내내 자원봉사 할아버지 승무원들은 유모와 익살로 아이들과 승객들을 웃기며 봉사를 한다. 또한 퍼핑빌리 증기기관차는 열 차내에서 런치스페셜, 디너스페셜, 웨딩스페셜 등 다양한 이벤트를 제공한다. 주변 환경과 어우러진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고, 옛것을 소중히 간직하고자 하는 호주 인들의 노력은 관광객으로 하여금 다시 타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증기기관차에서 내린 승객들
이 기차를 타고 가면서 나는 우리나라 곡성의 섬진강을 달리는 '추억의 증기기관차'가 떠오른다. 곡성에서 10km를 달려가는 기차는 특별한 이벤트가 없다.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자원봉사자 할아버지도 없고, 여성 차장이 마이크로 앵무새처럼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설명을 해줄 뿐 열차 안은 건조하기만 하다. 한 마디로 재미가 없다. 10km를 달리는 동안 지겹다는 생각만 했었다. 지방자치제 이후, 전시효과로 너도 나도 관광 상품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좀 더 심사숙고를 해서 실 속 있고, 재미있는 상품을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
앵무새야 놀자!
△앵무새와 함께 놀며 즐거워하는 엄마와 아이
퍼핑빌리 증기관차는 벡그레이브에서 출발해 멘치스 크리크, 클레마티스, 레이크사이드를 지나 종착역인 젬부르크까지 운행을 한다. 승객들은 에메랄드 호수가 위치한 레이크사이드 역에서 내려 피크닉을 즐기거나, 단데농 마운틴에서 로젤라 크라임 버드라고 불리는 앵무새 서식지를 둘러보기도 한다.
붉은 깃털에 푸른 꼬리가 어우러진 크림슨 로젤라 (Crimson Rosella) 앵무새, 노란 뿔을 달고 다니는 설퍼 크레스티드 콕카투(Sulphur-crested Cockatoo), 핑크빛 볏이 인상 깊은 갈라(Galah) 앵무새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옆에 있는 숍에서 모이를 무료로 나우어 주는데 모이를 손에 들고 있으면 녀석들이 떼 지어 날아든다.
△단데농 언덕에 위치한 아름다운 사싸프라스 마을. 손으로 만든 인형과 책, 옛날 레코드도 판다
돌아오는 길에 단데농 언덕에 위치한 사싸프라스(Sassafras)라는 마을에 들렸는데, 이곳에서는 손을 만든 인현, 액서 사리, 책등을 판다. 우거진 숲 속에 아름다운 정원과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잠시 쉬어가는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조용한 곳이다. 퍼핑빌리는 멜버른에서 로칼 여행사의 하프데이 투어를 하는 것이 요금도 비싸고 편하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지만 다른 지역을 둘러보기에는 번거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