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변에서
"젊은 청년"으로 살아가게 되다
▲구례읍 앞에 펼쳐진 섬진강. 멀리 지리산 자락에 운무에 싸여 있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도시로 몰리다 보니 시골에 폐가가 즐비하게 늘어나고 있다. 평소 알고 지내는 화엄사 스님에게 월세 10만원 짜리 농가 주택으로 이사를 하게되었다고 했더니, "아이구, 그거 너무 비싼데. 공짜집도 많고, 5만원 짜리도 많아요."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런 집은 대부분 수리가 되지않은 빈집이다. 빈집이 많은 시골에는 노인들만 모여 산다.
평소 시골생활을 꿈구어 왔던 아내와 나는 갑자기 섬진강으로 이사를 하게되었다. 내가 섬진강으로 이사를 오게된 사연은 이렇다. 지난 3월 30일날 섬진강 매화와 구례 산동마을 산수유 꽃을 보기 위해 구례로 향하기 전날 정용문 군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와는 우리가 2003년도 세계일주 여행을 할 때에 칠레의 파타고니아에서 만난 인연이 있었다. 당시 그는 신혼여행 기념으로 그의 아내와 1년동안 세계일주 여행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파타고니아를 일주일 동안 여행을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7년이 지났는데 갑자기 그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서울에 살고 있었던 그는 섬진강변에 살고 있다고 했다.
"허, 그래. 내일 섬진강에 가는데."
"그럼 선생님 내일 구례에서 만나요."
그렇게 해서 7년만에 우리는 구례에서 해후를 했다. 그와 점심을 들며 사연을 들어보니 서울생활이 답답하여 다니던 직장을 때려 치우고 아내와 함께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일주했다고 했다. 그리고 섬진강변에 이르러 "이곳이야말로 우리들이 살 곳이다!" 라고 생각이 되어 눈이 내리는 작년 12월에 이사를 했다고 한다.
▲ 돌담에 담쟁이덜굴이 둘러쳐진 집
"그런데 천은사 앞에서 찻집을 하던 분이 우리더러 찻집을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하지않겠어요. 그래서 찻집으로 가보니 아주 딱 마음에 들었어요. 경치와 주변 환경이... 그리고 무언가 일거리가 생기기도 하고 해서 선듯 맡아서 하겠다고 했지요."
정군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던 아내가 말했다.
"그럼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어떨거요."
"누군가에게 넘겨주야지요."
"그 집 우리한테 넘겨줘요."
"그러면 참 좋지요. 두 분에게 닥 어울리는 집이 될거니까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정군이 살던 농가주택을 인수하게 되었다. 정군이 살고 있는 집은 농가 주택을 현대식으로 개량을 해 놓은 집이다. 그를 따라 동네와 집을 둘러 보니 딱 마음에 들었다.
정군은 천은사 앞 찻집을 수리를 해서 6월 10일날 이사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다음날 1차로 이사짐을 옮기게 되었다. 서울에 집이 팔리지도 않고, 두 아이들이 사록 있는지라 우리는 필요한 물건들만 챙겨서 친구의 봉고 포터를 타고 간전면 수평리에 도착했다. 이사짐을 자동차에서 내려 옮기는데 동네 노인들이 오다가다 들여다 보며 한마디씩 했다.
"젊은 친구 어서 와요."
"이렇게 젊은 친구가 우리 마을로 이사를 오니 겁나게 좋네."
그렇게 해서 화갑을 넘은 나이에 나는 젊은 친구가 되어 버렸다. 어쨌든 젊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동네 노인들은 빙긋빙긋 웃으며 짐을 차에서 내려 옮겨 주기도 했다. 장롱을 운반해서 작은 문으로 잘 들어가지 않자, "가만가만… 요렇게, 저렇게, 살살" 하면서 마치 운전 교습을 하듯 타이르시며 거실까지 들어와 거들어 주었다.
어디 도시에서는 꿈이나 꿀 일인가? 아파트 벽 하나 사이를 두고 사람이 죽어서 나가든 도둑이 들든 무관심 속에 살아가는 것이 도시의 삶이다. 나는 수평리 마을의 포근한 시골인심에 그만 황홀해 지고 말았다. 게다가 전에 이 집에서 살았던 정군이 나를 50대 초반으로 소개를 했단다. 그도 7년전의 내 나이만 생각하고 젊게 본 것이다. 어쨌든 이제 아내와 나는 섬진강변에서 10년 정도 '젊은 친구'로 살아가게 되었다.
시골이 고향이지만 서울에서 40년을 넘게 산 나는 서울사람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가슴 한켠에는 언제나 시골생활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똬리 속에는 언젠가는 가야지가야지 하는 외침이 들려왔는데 이번에 엉뚱하게 기회가 오자 덜컥 결정을 하고 만 것이다.
도시에서 닷새, 시골에서 이틀을 지내는 5도2촌 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뒤에는 시골에서 닷새, 도시에서 이틀, 5촌2도의 산다면 도시인과 시골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윈윈의 삶이 되리라는 것이 유홍준 교수의 지론이다.
서울사람 유홍준은 요즈음 부여에서 살고 있다. 그가 부여로 가게 된 동기나 내가 섬진강으로 이사를 온 동기는 비슷하다. 서울사람들은 고향이라는 정서가 없다. 유교수는 문화 답사 여행을 다니면서 항상 제2의 고향을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 그것이 화두였다. 그러면서 유교수는 시골로 이사를 갈 6가지 조건을 생각했다고 한다.
(1) 문화유산이 있어 은퇴한 후에는 문화해설사라도 할 만한 곳
(2) 차로 30분 거리에 박물관이 있는 곳
(3)서울에서 차로 3시간 안에 갈 수 있는 곳
(4)차로 5분 거리에 아름다운 절집이 있어 내 집 정원인양 거닐 수 있는 곳
(5)가능하면 차로 30분 안에 바닷가로 갈 수 있는 곳
(6) 가능하면 돌담길이 예쁜 묵은 동네 개울가 집
▲ 마을입구 팽나무 밑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는 마을사람들
과연 그 다운 발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도를 펴 놓고 보니 부여 무량사 앞마을이 떠오르더란다. 지티고개에 올라서면 폐교가 보이고 반교리 마을이 보이는데 바로 그 마을을 제2의 고향동네로 생각하고, 그는 평소 잘 알고 지내는 부여군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군수님, 내가 부여 사람이 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정말입니까? … 백제가 흥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전망 좋은 곳을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외산면 반교리를 생각하고 있는데요."
"반교리요? 거기는 전망이 안 좋은데요."
"왜요? 마을 안에 들어가 보진 않았지만 지나가다 보면 아늑해 보이던데."
"아늑하기야 하지요."
군수와 유교수 사이에는 어딘가 대화가 어긋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군수의 '전망'은 '투자 전망'이고, 유 교수의 전망은 살기 좋은 '풍광'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군수는 유 교수의 요청으로 반교리에 폐가 하나를 물색해 주었고, 유 교수는 그 집을 사서 방 하나, 부엌 하나의 8평 짜리 기와집과 헛간 하나, 뒷간 하나의 함석집을 새로 지어 살게 되었다.
유 교수는 주민등록까지 이전을 마치고 마을 이장님을 찾아가 입주신고를 하며, 마을회비를 봉투에 넣어 건네자 이장은 유 교수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묻더란다.
"아직 환갑은 안 됐지요?"
"안 되고말고요."
"그럼 청년회로 들어가슈."
그래서 그는 반교리 마을 청년회원이 되었다. 반교리 마을 청년회에서는 그의 입주를 축하하며 '증 반교리청년회'라는 흰 글씨가 새겨진 큼직한 전자시계를 기념품으로 주더란다. 그렇게 반교리에서 지낸지 5년이 되어 환갑을 넘게 되자 유 교수는 이장님에게 마을 회비를 다시 내며 물었다.
"올해는 청년회에서 나오게 되겠지요?"
"아뉴, 올부턴 청년회 나이를 65세로 늘렸시유. 너무 염려 마유."
그리하여 그는 아직도 반교리 청년회원이 되어 청년들과 함께 어울리고 있단다. 그러던 어느 날 부여군수가 그를 찾아왔다. 군수는 간곡하게 유 교수에게 한 달에 한 번 부여 문화유산답사 해설을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처음에 유 교수는 거절을 했지만 물러나지 않는 군수의 요청으로 작년부터 '유홍준과 함께 하는 부여답사'란 타이틀로 봄가을 두 차례씩 문화해설을 하고 있다고. 유 교수는 그의 꿈대로 문화해설사을 하며 '5촌2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수평리 집앞을 흐르는 개울
나는 섬진강으로 이사를 결정해 놓고 난 후 이 내용을 '월간중앙'에서 읽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유홍준 교수의 삶을 좇아가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먼저 생각을 해 두었던 시골 생활이다. 그러나 이 내용을 아내와 함께 읽으며 우리가 이사 갈 집에 대해 유 교수의 조건을 대입해 보았다.
(1)천년고찰 화엄사, 실상사 등 지리산을 중심으로 많은 불교문화 유적지가 있다.
(2)차로 5분 거리에 '섬진강생태박물관"이 있다.
(3)서울에서 차로 3시간대 거리다(도로사정이 좋아져서)
(4)차로 10분 거리에 화엄사, 천은사가 있다.
(5)바로 옆에 섬진강이 흐르고 계족산을 넘어 30분 거리에 남해가 있다.
(6)돌담 집 앞에 실개천이 흐른다.
(7)차로 10분거리에 구례장터와 화개 장터가 있고, 30분거리에 순천시가 있다.
서울에서의 거리를 제외하고는 아내와 나는 유 교수가 살고 있는 부여 보다는 훨씬 좋다는 생각을 하며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3개도에 걸친 거대한 지리산, 섬섬 옥수 흘러가는 섬진강, 남해 바다, 푸짐한 마을 인심… 게다가 집 주인은 200평이나 되는 밭이 놀고 있으니 우리보다 농사를 지어보라고 했다. 이제 농토까지 생긴 나는 섬진강을 주 무대로 살아가려고 하고 있다. 그것도 젊은 친구(?)로 변신을 해서 말이다. 언제 다시 마음이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심정은 그렇다. 그러나 시골생활은 결코 낭만이 아니다. 낭만은 톡톡히 그 댓가를 치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