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작은 정원에 파란 장미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발만 집밖으로 나가면 거기에 장미보다 더 아름다운 야생의 정원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파란색을 너무나 좋아한다. 우리나라 가을하늘처럼 청명한 파란색! 파란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색깔이라고 시인들이 노래하는 그 색깔…
▲터키석보다 더 아름다운 닭의 장풀
▲길섭 아무데서나 흔하게 자라나는 1년생 닭의장풀
오, 터키석보다 더 아름다운 닭의장풀이여!
요즈음 야생의 정원에는 그 가을 하늘처럼 고운 색깔을 내며 피어난 꽃이 나를 매우 유혹하고 있다. '닭의장풀'이라고 불리는 바로 이 꽃이다. 아침 이슬을 함초롬히 머금고 풀 섶에서 햇빛을 받아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닭의장풀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 온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파란색을 지니고 있다.
닭의장풀꽃은 하늘색보다 더 짙고, 쪽빛보다 더 밝다. 약간 보라색이 돌며 군청색에 좀 더 가까운 색깔이라고나 할까? 파란 색깔을 내는 터키석이나, 에메랄드, 사파이어 보석보다 더 곱고 아름다운 꽃, 닭의장풀...
닭의장풀꽃은 끝이 점점 가늘어지면서 살짝 포개지는 잎사귀에서 약 2.5센티미터의 작은 두 장의 꽃잎이 우아하게 솟아난다. 그러나 이 귀여운 두 장의 꽃잎은 새벽녘에 개화를 했다가 정오쯤에 이내 시들고 만다. 이슬처럼 맺혔다가 지는 꽃이여!
오, 미망인의 눈물처럼 청초하고 아름다운 꽃이여!
닭의장풀은 닭장근처에서 잘 자라고, 꽃잎이 닭의 벼슬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꽃을 "미망인의 눈물"이라고도 부른다. 아마도 그것은 두 장의 꽃잎이 미망인의 눈물방울 같은 청초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닭의장풀은 길섶 아무데서나 너무도 흔하게 피어나는 꽃이어서 전에는 자세히 살펴보지를 않고 그냥 지나치곤 했다. 그러나 이곳 지리산자락에 정착하면서부터 나는 야생의 정원에 핀 꽃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눈을 뜨게 되었다.
요즈음 야생에 핀 수없이 많은 보석들과 조우하며 살아가는 기쁨을 한껏 맛보고 있다. 그것은 늦었지만 용기를 내어 도심을 벗어나 야생에 묻혀 산 나에게 신이 내려주신 축복이다. 들과 산에 피어난 야생화들은 과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보석들이다.
▲호박꽃 위에 핀 닭의장풀꽃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그 많은 야생화들 중에서 여름이 오면 에메랄드, 아니 그 어떤 보다 더 아름다운 닭의장풀꽃을 가장 사랑하게 되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풀 섶에서 별안간 나타나 터키석처럼 반짝이는 닭의장풀에 나는 그만 흠뻑 매료되고 말았다.
닭의장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선명한 남빛 두 장의 꽃잎 사이에 샛노란 수술이 여섯 개나 뻗혀 있다. 화피(꽃받침)는 3장인데, 그 가운데 두 장은 색깔이 선명하고, 나머지 한 장은 작고 반투명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 이 화피와 수술을 보트 모양의 포가 감싸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꽃의 세계인가! 두 장의 파란 꽃잎에 숨어있는 신비! 그것은 저절로 사랑하고 싶은 이의 모습이다. 나는 이 작은 꽃 안에서 신의 모습을 본다. 조물주 하느님의 모습을 본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순수한 꽃의 세계를 본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여, 닭의장풀의 수술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닭의장풀은 꽃받침 사이로 여섯 개의 수술 중에서 아래쪽에 길게 뻗어난 두 개의 수술에만 꽃가루를 지니고 있다. 위쪽 네 개의 노란 수술은 꽃가루가 없는 헛수술이다. 푸른 나비의 더듬이처럼 아래쪽에 길게 뻗어난 두 개의 수술만이 꽃가루를 자지고 있는 진짜 수술이다.
벌이나 나비가 닭의장풀을 찾아와 착륙을 하게 되면, 두 개의 수술에 있는 꽃가루가 자연스럽게 곤충의 다리에 묻어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꽃가루를 묻힌 곤충들이 다른 꽃으로 날아가 앉으면 저절로 꽃가루받이가 이루어지게 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닭의장풀꽃의 겨이로운 세계를 알고도 놀라지 않은 사람은 영혼이 혼탁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토록 아름다운 닭의장풀의 수명은 매우 짧다. 대개의 꽃들은 꽃가루받이를 끝내면 시들어지고 만다.
씨앗을 맺기 위해 목적을 이룬 꽃들은 더 이상 오래 살아야 할 까닭이 없어진다. 이것은 마치 연어가 알을 낳기 위해 그 긴 여행에서 돌아와 알을 낳고 죽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닭의장풀꽃은 피어나는 순간 이미 꽃가루받이를 마친 경우가 90퍼센트가 넘는다고 한다. 피어나면서부터 거의 생존의 목적을 이룬 닭의장풀 꽃은 오래 피어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일찍 시들어 버리기에 더 아름다운 꽃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오늘 아침 산책길서도 밭두렁과 논두렁에 흔하게 피어 있는 보석보다 더 아름다운 닭의장풀에 취해있다. 코끼리 귀처럼 생긴 꽃잎 아시에 쑥 내밀고 있는 수술을 들여다보며 마치 호주의 야생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캥거루 같기도 하여 피씩 웃음이 나온다. 두 장의 꽃잎은 캥거루의 귀처럼 생겼고, 그 아래 꽃술은 캥거루의 배안에서 세상을 내다보고 있는 새끼 캥거루처럼 귀엽게만 보인다.
한나절도 채 피어있지 못하는 닭의장풀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름 꽃이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이성의 모습이다. 그래서 내 정원에는 파란 장미를 필요로 하지 않다. 파란 장미는 사람의 손을 빌러 태어난 인공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도시의 정원이나 아파트 베란다에 어울리는 꽃이다.
길섭 아무데나 너무 흔하게 피어 대접을 받지못한는 닭의장풀! 만약에 이 꽃이 흔하지 않고 희귀식물이라면 엄청나게 값진 예우를 받을 것임에 틀없다. 오늘 아침에도 아침이슬 속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며 웃어주는 닭의장풀꽃을 볼 수 있게 해준 자연의 신에게 나는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