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메, 단풍 다 떨어지네!
▲지리산 연기암 단풍(11월 13일)
지난 19일 이례적으로 때 아닌 폭설이 내려 지리산은 하얀 눈 세상으로 변해 있다.
그러나 폭설이 내리기 직전 지리산의 낮은 곳에는
아직 단풍이 바람에 휘날리며 늦가을 정취를 듬뿍 풍겨주고 있다.
지리산의 단풍은 더디게 들고 더디게 떨어진다.
그러나 지리산 단풍이라고 해서 계절의 변화를 거역할 수는 없다.
화엄사 뒤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연기암 숲길에는
아직 채 떨어지지 않는 단풍이 마지막 가을 그림을 그리고 있다.
바람이 불자 단풍나무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오메, 단풍 다 떨어지네!”
단풍터널을 지나가며 아름다운 단풍에 탄성을 지르던 사람들이 하염없이 떨어져 내리는 단풍을 바라보며 가을과의 이별을 아쉬워한다. 단풍은 자신이 갈 때를 알고 있다. 여름내 입었던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겨울을 준비한다. 사람들은 겨울이 돌아오면 옷을 켜켜이 껴입는데, 나무들은 반대로 한 오라기 잎새도 걸치지 않고 홀랑 벗어버린 채 벌거벗은 나목(裸木 )이 되고 만다.
늦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이유
11월 늦가을에 남아 있는 단풍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왜일까?
나목의 숲 사이에 마지막 남은 단풍들은 아름답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하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도종환, 단풍드는 날)
시인의 노래처럼 지리산 단풍이 생의 절정에 서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제 몸을 하나씩 내려놓고 있다.
제 삶의 이유이자 전부였던 것을,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하나씩 내려놓으며 아름다운 빛깔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화엄사에서 연기암을 가는 길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아무리 걸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아름다운 길이다. 사계절 중에서도 늦가을 이 길을 걸으면 누구나 깊은 사색에 잠기게 된다.
단풍이 하염없이 떨어져 내리는 숲길은 처절한 아름다움과 함께
잎 속에 숨겨졌던 나무의 비밀을 한 잎 숨김도 없이 벗어버린다.
제 몸의 일부였던, 아니 전부였던 낙엽들은 땅에 떨어져 내려 그대로 거름이 된다.
훌훌 옷을 벗어버린 나무들의 정직한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저절로 생의 뒤안길을 더듬어 보게 된다.
미타암 사립문을 빠져 나와 나무들이 마지막 옷을 벗고 있는 숲길을 걸어갔다. 낙엽이 지는 늦가을의 독특한 냄새가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다람쥐들이 길손을 반기고 딱따구리가 나무를 찍어대며 자연의 풍악소리를 들려준다. 조용하기만 한 숲길, 그러나 바람이 불면 숲은 우우우 침묵을 깨며 곧 겨울이 오고 있음을 예고한다.
나무는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숲의 향기를 맡으며 한 걸음 한 걸음 걷다보면
사바세계의 모든 잡다한 코드가 하나씩 뽑혀지기 시작한다.
방하착(放下着)! 숲은 이렇게 힘든 중생의 멍에를 잠시
나마 내려놓게 한다.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라. 하루의 노고는 오늘 하루로 족하니라
(So do not worry about tomorrow; for tomorrow will care itself. Each day enough trouble of its own.”(마태 6-34).
성경의 이 구절처럼 나무들은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루하루가 변화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생강나무 잎사귀가 햇빛을 받아 더욱 노란 색깔을 발산하고 있다.
그러나 저 아름다운 잎도 곧 땅으로 내려놓을 것이다.
골이 깊은 지리산은 물이 마르지가 않는다. 돌 틈을 휘돌며 철철 흘러내리는 맑은 물을 손으로 떠서 목을 적셔 본다. 시리도록 차가운 물맛! 약수가 따로 없다. 골골이 흘러내린 물 그 자체가 지리산 약초를 머금은 약수가 아니겠는가? 계곡의 다리를 건너가는 사람들이 마치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는 것 같다.
거대한 다래나무 고목이 엿가락처럼 늘어져 있다. 몇 백 년을 살아온 것일까?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늦가을 숲속은 늘 솔직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드디어 연기암 입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마지막 단풍이 석양빛을 받으며 불타고 있었다.
어쩌면 저리도 아름다운 색깔을 드러낼까?
금년에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단풍이라 생각하니 더욱 아름답게만 보인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저 단풍빛깔을 고이 간직하리.
그러나 오늘이 지나면 저 단풍도 지고 말겠지.
단풍잎은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 아름답게 빛을 발하다가 미련 없이 떨어져 내린다.
오늘따라 푸른 하늘, 마지막 남은 단풍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백의의 문수보살이 더욱 선명하게 돋보인다. 문수보살 뒤로 새털구름이 가사장삼자락처럼 휘휘 늘어져 내리고 있다. 오른손에 지혜의 경책을 든 문수보살은 세상을 지혜 있게 살아가라고 가르치고 있다.
지리산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단풍은?
문수전에 합장을 하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석등 뒤로 붉은 단풍이 활활 불타고 있다.
하얀 석등과 대조되는 붉은 단풍은 불타는 모습 그대로다.
문수전 돌아서니 단풍잎이 붉은 선혈처럼 뚝뚝 떨어져 내린다.
그 단풍잎을 밟고 지나가면 이윽고 관음전이 이른다.
연기암 단풍은 이 관음전에서 바라보는 것이 최고로 아름답다.
두 개의 소나무 사이로 지리산의 마지막 단풍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고색 찬연한 오래된 사찰과 함께 절묘하게 어울리는 풍경이다.
오, 저 아름다운 지리산의 풍경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다.
세상에 똑 같은 풍경은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렇게 하루하루가 새롭게 다가온다.
저 아름다운 나무들처럼 오늘 하루를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다면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우리는 연기암 단풍에 한동안 취해 있다가 다시 미타암으로 걸어 내려왔다.
왕복 4km에 이르는 이 길은 언제 걸어도 새로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미타암에 돌아오니 노 거사님 한 분이 도끼로 장작을 패고 있었다.
가끔 절에 봉사를 하시는 노 거사님은 말없이 도끼를 내려치며 장작을 팬다.
절집의 월동준비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거사님으로부터 도끼를 건네받고 장작을 패본다. 오랜만에 내려치는 도끼가 균형이 잘 잡히지 않는다. 장작을 팰 때는 어깨에 힘을 주지 말고 내리치는 순간에만 리듬을 타고 힘껏 찍어야 한다. 참나무가 쩍쩍 갈라지며 떨어져 나갔다. 이 나무는 추운 겨울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 인간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 것이다. 통나무 토막 몇 개를 패고 나니 온 몸에 땀이 난다.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 이윽고 저녁 공양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공양간에 들어가니 쌀밥에 배추김치, 깍두기, 시금치나물, 고추무침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쌀밥 한 그릇이 어디로 들어가는 줄 모르게 게눈 감추듯이 사라지고 만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숲길을 걷고 장작까지 팼으니 시장이 반찬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절밥은 언제나 꿀맛인데 오늘은 더욱 밥이 달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지금 저녁 공양을 배불리 먹고 나니 이 주기도문이 딱 어울리는 말씀이다. 오늘의 빵이야 말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빵이 아니겠는가!
인생은 참으로 놀라운 속도로 지나가 버린다.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금강경)” 금강경에서 부처는 이렇게 설법을 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이미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과거로 밀려나고, 미래는 곧 현재가 되고 만다. 모든 것이 멈추지 않고 흘러가 버린다.
오늘 지리산이 보여준 단풍에 감사하고, 쌀밥을 만나게 먹게 해준 보살님에게 감사를 드리고,
오늘을 열심히 살라고 하신 스님께 감사를 드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어제는 꿈에 지나지 않고, 내일은 환상일 뿐이다,
그러나 충실하게 지낸 오늘은 어제를 행복한 꿈으로 만들고,
내일을 희망에 찬 환상으로 만들 것이다.
이제 오늘 단잠을 자 두자. 내일 일은 내일 생각을 하고……
(2013.11.13 지리산 연기암 오르는 숲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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