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진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추를 뜯어 먹는 맛!
5월은 사계절 중 가장 풍성한 계절이다. 이곳 연천 금가락지도 예외는 아니다. 5월이 오면 금굴산을 뒤로하고 임진강 주상절리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금가락지는 연두색 숲과 들로 둘러싸인다. 금가락지 현관 앞과 옆에는 아내가 가꾸어 놓은 화원에서 갖가지 꽃이 피어나 우리를 반긴다. 영산홍, 매발톱, 금낭화, 제비꽃, 그리고 지난달 말에 전곡장에서 사다가 심었던 노란 장미도 “나를 좀 봐주세요! 하면서 어여쁜 미소를 짓는다.
어디 그뿐인가? 텃밭에는 청상추, 양상추, 로메인 상추, 쑥갓, 비트, 케일, 겨자상추 등 푸성귀가 풍성하게 자라나 밥상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필요할 때 텃밭에서 바로 상추 한 줌을 뜯어와 상추쌈을 하는 맛이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즐거움을 준다.
그것은 즐거움을 넘어 행복이다. 반찬이 따로 없다. 된장에 김치 한 가지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다. 싱싱한 상추에 된장을 발라 입이 터지도록 우물우물 씹어 먹는 맛이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기막힌 맛이다. 채식을 좋아하는 나는 염소과인가? 하하, 그러나 나는 돼지띠 인생이다.
풍성한 계절 5월의 금가락지는 방문객들로 붐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연천 허브빌리지에서는 라벤더축제가 열리고, 전곡선사유적지에서는 구석기축제도 열린다. 뭐 축제가 아니더라도 녹음에 둘러싸인 금가락지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이곳 금가락지 주변에는 외식을 할 식당도 없다. 외식을 하려면 전곡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렇다고 먹을 만한 식당도 마땅치 않다. 그래서 나는 방문객들이 오면 역시나 텃밭에서 상추를 뜯어와 함께 상추쌈을 하며 정담을 즐긴다. 대신 방문객들은 텃밭에 풀을 뽑거나 잔디밭의 풀을 뽑는 일을 도와주기도 한다. 그런 작업을 하면서 그들은 마음의 힐링이 된단다. 그리고 돌아갈 때는 아내가 싸준 상추 한 줌을 들고 나가며 "아주 잘먹고 갑니다. 아이고, 꼭 친정에 왔다 간 그분이 들어요." 하고.
5월1일 날은 큰 아이 영이가 1박2일로 다녀갔다. 영이와 함께 허브빌리지 라벤더축제도 다녀오고, 점심 저녁으로는 텃밭에서 진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추를 뜯어와 상추쌈을 했다.
“아빠,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이렇게 아빠와 엄마랑 상추쌈을 맛있게 먹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오롯한 행복을 느껴요.”
“그렇지. 그게 상추 한줌의 행복이란다. 하하.”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 덕에 따라 탁월하게 발휘되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정의하고, ‘최상의 좋음’이 곧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최상의 좋음은 성취가능하고, 완전하고, 자족적이라는 행복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굳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들추지 않더라도 영이의 말처럼 행복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순간순간 우리 곁에 산재해 있다. 내가 키운 상추로, 그것도 완전 무공해 상추로 오순도순 이야기를 하며 된장을 발라 먹는 바로 순간에 행복은 있다. 이것은 아주 작은 일이지만 성취가능하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자족적이다.
오래전 아내와 함께 인도 다람살라를 여행하며 달라이라마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칠십 고희 법문을 하는 남걀사원에는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나는 운좋게 그를 취재하여 KBS '세상은 넒다' 에 출연하여 방송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사실 나도 행복이란 무엇인지 잘 모른답니다.”
“그럼 당신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그런데 그는 주저하지 않고 웃으며 곧바로 대답했다.
“네, 나는 언제나 행복합니다.”
▲2005년 인도 다람살라 남걀사원에서 만난 달라이 라마
그는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다.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거나 크게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없기 때문에 늘 순간순간이 행복하다고 한다. 즉 달라이라마는 아주 작은 것에 웃고 만족을 느끼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어 행복하다는 것이다. 나는 욕망이 일어날 때마다, 혹은 부족한 것을 느낄 때마다 달라이라마의 “나는 언제나 행복합니다”란 말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가끔 아내에 묻는다.
"여보, 당신 행복하오?"
"그럼요. 당신이 곁에 있는 한 나는 언제나 행복해요."
아내는 아픈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산간 오지에 나와 함께 있다면 행복하다고 한다. 이곳 오지는 많은 것이 불편하고 부족하다. 그러나 행복이란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것 같다. 아주 작은 것이지만 점심시간에 하얀 진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추 한줌’을 뜯어 된장에 싸먹는 행복감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오늘 영이가 상추 한줌의 행복을 느꼈다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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