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방랑/Australia

내 생애 가장 소중한 크리스마스 선물

찰라777 2007. 11. 22. 00:58

내 생애 가장 소중한 크리스마스 선물

 

 

호주에서 8년 동안 날아온 크리스마스카드

 

"여보, 호주에서 편지가 왔어!"

"누구지요?"

"샌드라야."

"저런, 우리가 또 한발 늦었군요."

"글쎄말이요, 금년에는 꼭 우리가 먼저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려고 했는데…."

"그것도 무려 8년 동안이나, 당신은 미안하지도 않으세요?"

"어찌 미안하지 않겠소? 그런데 매년 몇일씩 그녀의 카드가 앞당겨 오는 덴 당할 재주가 없군...."

 

 

△ 매년 호주 시드니에서 제일먼저 날어오는 샌드라의 크리스마드 카드(2007년 11월21 수신)

 

 

호주의 샌드라에게서 온 단단한 봉투를 열어보니, 겉 표지에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가 새겨진 멋진 2008년도 달력이 나온다. 그리고 캘린더 안에는 크리스마스카드, 둥그런 동전 지갑 2개, 시드니 파노라마를 볼 수 있는 뷰어카드, 그리고 정성스럽게 타이핑을 한 장문의 편지가 들어 있다. 샌드라의 선물꾸러미는 늘  이런식이다. 샌드라는 연말이 돌아오면 크리스마스가 지나기 전에 언제나 우리보다 먼저 이렇게 캘린더에 선물을 듬뿍 넣어 보내온다. 그것도 무려 8년동안이나 한결 같이 말이다.

 

그래서 금년에는 샌드라의 카드를 받기 전에 우리가 먼저 크리스마스를 카드를 보내려고 지난주에 크리스마스카드는 사 두었는데, 마땅한 선물을 고르지 못해 아직 발송을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교보문고나 인사동 선물숍을 둘러 보았지만 우리나라엔 아직 내년도 캘린더나 카드 등 선물이 출시가 되지 않고 있었다. 하여간 또 한 발 늦어 샌드라에게 미안하다.

이거야 정말, 샌드라 너무 고맙고 미안해요.

 

 

 

△ 시드니의 샌드라가 보낸 2008년도 캘린더와 동전지갑, 그리고 시드니풍경을 한눈에 볼 수있는 파노라마 뷰어(2007.11.21)

 

    샌드라는 매년 선물 꾸러미에 그녀의 주변에서 지난 1년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장문으로 타이핑을 하여 함께 동봉을 하여 보낸다. 카드를 한 장 써 보내기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이렇게 장문으로 꼼꼼히 1년 중에 일어난 중요한 메모리들을 편지로 보낸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거기에다 3~4가지나 되는 선물꾸러미를 사는 것도 보통 정성이 아니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내와 나는 샌드라의 카드와 선물을 받을 때마다 가슴 저 안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감정과 함께 진실로 감사함을 느낀다. 정말이다. 가슴 저 안, 심연에서 올라오는, 무한한 감사! 아무리 감사를 하고 또 감사를 해도 부족함이 없는 그런 고마움이 담겨있는 샌드라의 손 때 묻은 사연과 선물이다.

 

샌드라는 무엇보다도 어머니를 여인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86세인데 심장에 어느날 통증을 느껴 병원엘 가니 수술을 해야만 살 수 있다고 하여 그녀의 어머니가 원해서 수술을 했는데, 감염이 심해 결국, 2007년 3월 1일, 아침 9시에 숨지고 말았다고 썼다. 그리고 샌드라 자신 또한 허리 디스크에 문제가 생겨 고생을 하고 있다고 했다. 거기에다가 25년간 일했던 파이자제약회사로부터 명퇴 권고가 있어 2008년 2월까지 직장을 그만 두어야만 한다고 했다.

 

 

 △ 샌드라에게 한해 일어났던 일들을 정리하여 보낸 장문의 편지(2007.11.21) 

 

 

저런! 일을 더 할 의사가 있는 그녀로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녀로서는 가장 가까운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다가 직장까지 일게 되는 큰 위기가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구조조정으로 이미 그녀보다 먼저 퇴사를 한 상황이어서 더 이상 머물 수가 없단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일을 하고 싶다는 것. 해서 일주일에 2~3일 정도 일을 할 수 있는 자리를 찾고 있다고 했다. 정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우면 자원봉사라도 나서야겠단다. 바보처럼 일주일 내내 집에서 빈둥댈 수는 없는 것.

 

또 한 가지 특기할만한 점은 샌드라는 회사를 그만 두었을 때에야 컴퓨터를 구입하려고 항상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퇴사를 하기 전에 미리 HP Pavilion A6160 Desktop과 HP C5280프린터기를 구입했다고 했다. 이제 회사를 그만 두면 컴퓨터와 함께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 신세가 될 거라는 것(I'm like a fish out of water with it). 

 

컴퓨터를 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회사에 가면 컴퓨터를 하루종일 하게 되는데 집에서까지 컴에 매달리기가 싫어서 그녀는 일부러 사지 않았다고 한다. 25년동안 회사 생활을 한 그녀 집에 컴퓨터가 없다는 것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보니 이해를 할만도 했다. 우리는 늘 컴에 매달리지 않는가? 이 글를 쓰는 지금도....

 

이제 컴퓨터를 구입했으니 이메일을 통해서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은 누구라도 메일 주소를 보내서 서로 체팅도하고 교류를 하자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에 다음 내용을 추신으로 첨가했다.

 

"I know we all hang to have our turn, but it hurts so much to loose the people closest to you....

(우리 모두에게도 위험이 다가옴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당신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보냈을 때에는 너무나 많은 아픔이 따른다)

 

 △ 장문의 편지에 적은 샌드라의 추신P/S(2007.11.21)

 

 

샌드라와의 인연과 맥스에 대한 추억

 

나는 이 장문의 편지를 읽고 한 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허공 속에서 샌드라와 고인이 된 그녀의 남편인 맥스의 웃는 얼굴이 한 줄기 추억을 물고 내게로 다가왔다. 샌드라와의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8년전인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 나는 난치병을 앓고 있는 아내의 자연치유를 하기 위하여 로키마운틴으로 여행을 떠났다. 아내는 현대의학으로는 완치가 어련운 병을 앓고 있었는데, 여행을 너무나 좋아하는 아내는 죽기전에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다. 그러니 아내의 여행은 생사를 초월한 이판 사판의 길이었다.

 

아내에게는 여행은 의사나, 병원, 약보다도 병을 치료하는 묘약이었기 때문이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언제나 유서를 남기고 떠나는 여행이었지만 환자인 아내와 함께 단 둘이서 배낭을 걸머지고 여러가지 위험을 감수하고 떠나야만 하는 나는 항상 불안 했다. 그래서 언제나 혹 여행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라는 지침서 같은 유서를 아이들에게 남기고 떠나곤 했다. 그러나 언제나 별일 없이 우린 여행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그때마다 아내의 병세는 신기하리 만큼 호전되곤 했다.

 

 1999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우리는 우연히 샌드라와 그녀의 남편인 맥스를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한달 동안이나 로키마운틴 여행을 하게 되었다. 우리들의 여행은 캘리포니아 1번 도로를 따라 LA까지 남하를 한 후 그랜드 캐년, 자이언 캐년, 브라이스 캐년, 옐로우스톤, 그레이트 테톤, 워터톤 국립공원을 거슬러 올라가 캐나다 캘거리를 거쳐 밴프, 재스퍼, 밴쿠버, 밴쿠버 아일랜드, 그리고 국경을 넘어 미국 시애틀, 포틀랜드, 오리곤 코스트를 지나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는, 그야말로 때 묻지 않는 태고의 로키의 자연을 돌아보는 코스였다.

(◁ 사진:로키마운틴에서 고인이 된 맥스와 함께, 좌측에서 두 번째 반바지 차림이 맥스.  1999년 6월 미국 워터톤 국립공원)

 

그 때 아내는 여행중에 저혈당으로 몇 번 기절을 하기도 했는데. 한번은 내가 사진을 찍기 위해 아내의 곁을 떠나 있을 때 아내가 기절을 하여 쓰러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때 맥스가 아내를 일으켜 앉아 버스에 태워놓고 응급조치를 한 후 나에게 뛰어왔다는 것.

 

"미스터 초이! 아내가 위험해요!"

놀라서 허겁지겁 달려온 맥스를 따라 버스로 뛰어 가보니 아내는 맥스가 준 초콜릿을 먹고 의식이 회복되어 기운을 차려가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맥스와 샌드라는 마치 아내의 간호사처럼 아내를 극진히 돌보아 주었다.  

 

밤이 오면 "편안하게 잘 자라."고 인사를 하고, 아침이면 "잘 잤느냐."고 꼭 안부를 물었다. 그 때 저혈당으로 기절한 아내를 초콜릿을 먹여 응급조치 하여준 맥스는 아내의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다.  여행에서 만난 친절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그 누가 이처럼 자상하게 돌보아 줄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그들은 우리들과 전생에 무슨 큰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사진:동물과 함께 여행의 한때를 즐기고 있는 샌드라. 옆에 맥스의 운동화가 보인다. 1999년 6월 미국 몬트레이)

 

 

 

맥스의 갑작스런 비보

 

그렇게 한 달을 우린 맥스부부와 함께 로키마운틴 여행을 하며 친구처럼, 가족처럼 아주 다정하게 지냈다. 여행일정이 끝난 후 귀국을 하여서도 우린 계속하여 서신과 전화를 주고받았다. 맥스는 2000년도 시드니 올림픽에 우리가 꼭 호주를 방문할 것을 간곡히 초청을 했다. 만약에 시드니에 오면 자기 집 빈 방을 수리를 해서 우리가 묵을 수 있도록 준비해 놓겠다고 하면서까지 우리들 방문을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린 정말로 시드니 올림픽에 맞추어서 호주를 가려고 계획을 하고 맥스에게 전화로 그 사실을 통지를 했다. 그리고 아내도 그때를 준비해서 영어회화 기초반을 등록하여 다니고 있다고 했더니, 이제 아내와 영어로 대화를 할 수 있게되었다며 맥스와 쌘드라는 뛸뜻이 기뻐하면서  당장에 방을 수리를 하고 도배를 해야겠는데, 아내더러 무슨 색깔을 좋아 하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내가 다니던 직장에 매우 중요한 일이 생겨 우리는 그만 시드니 올림픽을 놓치고 말았다. 맥스에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부득이 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전화를 했더니, 그는 아내가 좋아하는 분홍색으로 방 도배까지 다 해 놓았는데 몹씨 섭섭하다고 말했다. 지나고 나서 생각을 해보면 여행을 다녀와도 무난히 해결이 될 일이었는데, 그 때 호주를 가지 못한 것을 나는 지금까지 두고두고 후회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시드니 올림픽이 있었던 그 해에 우리는 맥스의 비보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2000년 12월 25일 날 저녁에 맥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후회가 되지 않겠는가! 우린 그 하루 전 날인 크리스마스이브 날에 맥스와 전화 통화까지 했었다. 이 얼마나 허망한 소식이었겠는가!

 (▷사진 : 샌드라와 함께 울루루(에어즈락) 정상에 올라 포즈를 취하고 있는 맥스, 1995년 8월)

 

샌드라는 맥스가 세상을 떠난 후 맥스의 죽음에 대하여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크리스마스 날 맥스와 함께 어느 파티에 참석하여 저녁을 먹고 난 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주차장으로 자동차를 가지러 갔던 맥스가 한 참을 지나도 오지 않더라는 것.

 

그래서 하도 이상하여 주차장으로 내려가 자동차 안을 들여다보니 맥스가 편안히 잠을 자고 있더라는 것. 문을 열고 흔들어 깨었는데도 맥스가 일어나지 않더라는 것. 더 세게 흔들었지만 역시 깨어나지 않더라는 것. 당황해진 샌드라는 맥스의 손을 잡고 일으키려고 했으나 맥스의 손이 얼음처럼 차갑고, 맥스는 전혀 움직이지 않더라는 것. 그렇게… 맥스는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샌드라를 두고 먼저세상을 떠나갔다.

 

우리들에게 지금 매우 중요한 것처럼 생각되는 것들도 10년, 아니 1년이 지나고 나면 아주 사소한 것들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뒤늦게 깨닫게 된다. 인생에 있어서 어떤 기회란 생각보다 그리 자주 오지 않는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 중에 하나가 가까운 사람을 저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진실로 하고 싶은 일이나,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절대로 뒤로 미루지 말고 실행을 해야 한다. 아내가 난치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죽도록 하고 싶은 여행을 힘들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아내의 좌우명도 "내일이면 늦으리."이다. 그리고 "찰나를 소중히!" 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나는 그런 아내를 바라보며 집의 평수를 줄여서라도 비용을 마련하여 속알머리 없이 여행을 떠나곤 한다. 남이 흉을 보던, 그 밖의 중요하다고 말들을 하는 다른 잡다한 일들은 모두 뒤로 미룬 채 말이다.

 

 

맥스가 손수 꾸민  분홍색 방

 

우리가 샌드라를 다시 만난 것은 맥스가 세상을 떠난 3년 후인 2003년 6월이었다. 그때 나는 "사랑할 때 떠나라"라는 졸저를 탈고를 한 후 에너지 충전을 하기 위하여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마침 직장도 그만 두었고, 백수의 몸이 된 나는 걸린 것이 없었다. 그 때 아내는 샌드라 위문도 할 겸 호주로 가자고 번뜩 제안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호주로 날아갔다.

 

시드니에 도착을 하여 샌드라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녀는 퇴근을 한 후에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로 오겠다고 하며 반색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밤이 되어 우리 호텔로 왔다. 우리가 처음 만난 1999년 이후 실로 얼마만이었던가! 우리는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서로 포옹을 하며 해후의 기쁨을 나누었다.

 

 

 

 (◁ 사진:2003년 6월 샌드라와 시드니에서 재회. 와인을 마시면 맥스 생각이 나서 사양하는 샌드라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리고...)

 

 

우리는 맥스를 잃은 샌드라를 위해 저녁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 레스토랑으로 가서 저녁을 시켜 놓고 와인도 한 병 시켰다. 그러나 내가 샌드라에게 와인을 따르려고 하자 그녀는 정중히 사양을 했다.

 

"와인을 마시면 맥스가 생각이 나 눈이 눈물이 가득 고여서 그래요…."

그렇게 말을 하면서 그녀는 벌써 큰 눈에 눈물이 가득고이고 있었다.

"오, 샌드라! 정말 미안해요!"

 

얼마나 맥스가 그리우면 좋아하던 와인도 한잔 마시지를 않을까? 와인을 시킨 내가 괜히 미안했다. 저녁을 한 후 우리는 샌드라의 차를 타고 그녀의 집, 아니 맥스의 집으로 갔다. 그녀는 꼭 자기집에 들려야 한다고 했다. 맥스가 꾸며놓은 '분홍색 방'과 정원을 보여주고 싶다고 하면서. 샌드라의 집은 시드니 교외의 Merrylands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단층에 소박한 정원이 있는 그런 집이었다. 샌드라는 맥스가 늘 가꾸곤 했던 정원을 잘 돌보며 있다고 말했다. 6월의 호주는 초겨울인지라 정원엔 빨간 동백꽃이 피어 있었고, 노란 밀감이 열려 있었다.

 

 

 

 △ 샌드라의 집 정원에 있는 동백나무와 밀감나무. 맥스가 가꾸던 정원을 잘 돌보고 있다고...

 

 

거실로 들어간 샌드라는 우리를 위해 맥스가 손수 꾸며 놓은 작은 방을 보여 주었다. 맥스는 정말로 아내가 좋아하는 분홍색으로 방을 색칠을 해 놓았었다. 그 분홍색 방을 본 순간 아내와 나는 서로 마주 보며 한숨과 함께 탄성을 질렀다. 아내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고, 나는 코끝이 찡해졌다. 샌드라의 눈에도 다시금 눈물이 고였다. 이래서는 안 되지....

 

 

맥스샌드라의 추억이 담긴 모자를 선물로 받고...

 

분홍색 방을 나 온 나는 거실 전화기 옆에 놓인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샌드라에게도 그 모자를 씌웠다. 분위기를 전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자를 쓴 나를 보고 샌드라가 웃었고, 나도 샌드라를 보고 웃었다. 아내와 나는 모자를 번 갈아 쓰면서 샌드라와 함께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비록 짧은 시간을 보냈지만 우리들에겐 너무나 즐겁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 분홍색으로 칠한 방에서 맥스와 샌드라의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샌드라는 자기 집에서 묵어도 된다고 했지만 맥스가 없는 집에 머물기도 그렇고, 다음날 여행일정도 빡빡하여 우리는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별은 언제나 아쉬운 법. 우리가 거실을 나서는데, 갑자기  샌드라가 전화기 옆에 놓아둔 모자를 들고 나왔다.

 

"이 모자... 나에겐 가장 소중한 것이지만... 두 분에게 맥스를 추억하며 선물로 드리고 싶어요."

"아니, 그렇게 귀중한 모자를요?"

 

그러나 샌드라는 이미 모자를 쇼핑백에 넣어서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이 카우보이모자는 맥스와 샌드라가 말을 탈 때나 농장으로 갈 때에 늘 즐겨 쓰던 모자라고 했다. 'Mountcastle'이라는 브랜드인데, 샌드라의 말로는 호주에서는 명� 모자로 맥스의 모자 사이즈는 57이고, 그녀의 것은 56이었다. 맥스가 떠난 후에도 그녀는 마치 맥스를 보듯이 거실 전화기 옆에 놓아두고 늘 바라보곤 한다고 했다. 샌드라는 다시 우릴 호텔로 데려다 주었는데, 호텔로 오는 중에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기는 모자를 우리에게 선뜻 건네주는 그녀의 마음을 나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샌드라가 돌아간 후 아내는 꽤나 심각하게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죽은 사람 유물은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태워 없애버리고, 그 물건을 쓰는 것도 꺼림 찍하게 여기는데, 이 모자를 받아도 괜찮겠느냐는 것. 그러나 나는 샌드라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선물로 주는데 아니 받을 수도 없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을 하며, 그 모자를 결국 우리 집으로 가져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호주에서는 죽은 사람이 아끼는 유품이나, 자신이 평소에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선물로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집 내 방에는 맥스와 샌드라의 모자가 아주 귀한 선물로 자리매김을 하며 걸려있다.

(◁사진:샌드라가 우리에게 선물한 모자(2003년 6월). 생전에 맥스와 즐겨쓰던 모자로 맥스의 유품중에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고...) 

 

맥스와 샌드라의 모자!

이는 우리들의 여행을 추억하는  것 중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중에 하나다. 나는 오늘 도착한 샌드라의 편지를 읽으며, 다시 추억의 그 모자를 바라보았다. 맥스와 샌드라와 함께 했던 추억의 편린들이 모자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솔솔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샌드라의 전화번호를 찾아 시드니로 다이얼을 돌렸다. 사실 지난 2주 전(2007년 11월 9일)에 호주 태즈마니아 여행을 갔을 때에도 전화통화를 몇 번 시도를 했지만 통화를 하지 못했던 것. 밤중에 몇 번을 시도해서라도 전화통화를 했어야 하는건데….

 

국제전화의 긴 신호음이 지난 후 드디어 샌드라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한국에서 전화를 한다고 했더니 그녀는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우선 어머니를 잃은 그녀의 슬픔을 함께한다고 전하고, 그녀의 허리 건강을 상태를 물었다. 그녀는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썩 좋지는 않다고(not bad)말했다.

 

당신이 보내준 카드와 편지, 선물을 받아서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은 도저히 모를 것이라고 했더니, 그녀는 그냥 껄껄 웃기만 했다. 그리고 태즈마니아에 갔을 때 전화를 했으나 통화를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더니, 여행 중에 전화를 하기가 무척 어려운 줄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며 이해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다음에 호주에 올 때에는 자기를 찾아오지 않으면, 크리스마스카드도 보내지 않겠다고 조크를 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누구나 건강도 나빠지고, 직장도 잃게 되지만, 자원봉사라도 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하다고 했더니, 자기는 혼자서는 집에서 바보처럼 보낼 수는 없고, 누군가와 함께 일을 하거나 여행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 한국으로 여행을 떠나오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생각은 해 보겠는데 너무 멀다고 했다. 끝으로 그녀는 아내의 건강을 위해 늘 기도를 하겠다고 말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가장 그리웁고 만나고 싶은 사람!

8년 동안이나 나에게 가장 먼저 크리스마스카드, 새해 캘린더달력과 함께 선물을 보내주는 사람!

가장 아끼고 소중한 맥스의 모자를 선뜻 선물에 내주던 사람!

그 사람은 호주에 살고 있는 "Mrs Sandra Slade"이다!

이 얼마나 고마운 사람인가!

 

"샌드라, 당신은 지구상에서 정말로 너무나 고마운 사람이에요. 당신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늘 기도 할게요."

 

 

 

  

 △ 샌드라로부터 2007년 크리스마스선물을 받고 나서.

 

 

-Memory of Christmas Card from Sandra-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항상 그립고 고마운 샌드라에게 ....

2007년 11월 21일

서울에서 찰라 올림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