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방랑/Nepal

헛되고 헛되다! -네팔의 화장식

찰라777 2010. 12. 16. 12:00

 

 

가장 성스러운 네팔의 화장 장례식

네팔 동부 일람 차밭으로 가는 칸카이 강에서

 

 

▲네팔 동부 칸카이 강에서 치러지는 전통 네팔 화장 장례식 광경

 

 

아열대지방의 비는 무섭게 내린다. 오늘 새벽에 내리는 비는 마치 양동이로 퍼붓듯 빗방울 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언제 비가 왔느냐는 식으로 날씨가 쾌청했다. 아침을 먹고 더먹을 출발한 버스는 일람 차밭으로 향했다.

 

“만약에 어젯밤 버드칼리학교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이렇게 비가 억수로 쏟아지면 버스가 그곳에서 나오기가 쉽지 않거든요.”

 

어젯밤 마을 아이들과 함께 홈스테이를 하려다가 미리 나온 것이 잘 한일이라고 시토울나는 말했다. 그래도 나는 그들과 하룻밤을 지내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다른 곳을 덜 보더라도 그들과 함께 뒹굴며 하룻밤이라도 보내는 것이야 말로 그들의 삶과 고충을 더 깊숙하게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육체적으로 하룻밤을 힘들게 지낸다는 것이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아니 힘들 것도 없다. 오히려 별 하나 나 하나를 헤며 낭만의 밤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친 것이다. 반딧불이 수를 놓은 밤하늘을 어디서 또 볼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입으로만 낭만을 말하고 행동은 반대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정말로 아쉬운 밤이었다.

 

더먹을 출발한 버스는 복잡한 자파시를 지나 한적한 들판으로 나아갔다. 지상스님은 ‘그리움의 노래’란 기도문을 함께 부르자고 하시며 선창을 하였다. 일행 모두가 <나무아미타불> 정근하며 그리움의 노래를 불렀다. 일람으로 가는 길은 좌측은 히말라야 칸첸중가로 이어지는 산맥이고, 우측으로는 평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사이사이에 강이 수없이 흘러내리고 있다. 산이 있으면 강이 있고, 강이 있으면 들판이 있으며, 강은 언젠가는 바다로 이어 진다. 우리네 삶도 강처럼 윤회하는 것일까?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과 화장식용 나무

 

칸카이Kankai라는 강에 다다랐을 때 강가에서 화장식을 하는 광경이 목격되었다. 강은 크고 넓다. 설산에서 흘러내린 강물은 성스러워 보인다. 나는 버스를 잠시 멈추자고 했다. 인도의 바라나시나 카트만두의 바그마티 강에서 화장식을 거행하는 것을 몇 번 본적이 있지만, 이렇게 한적한 시골에서 화장식을 하는 것을 처음 보기 때문이다. 화장식은 다리 바로 밑에서 거행되고 있어서 관람을 하기에 좋았다. 꽤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아마 상당히 덕망 있는 명문가 집안인 모양이다.

 

강가에 안치한 시신은 황금색 천으로 둘러싸여 있다. 다리는 노란 천으로 감아놓은 시신의 다리는 강으로 향하게 하고 머리는 강가로 향해 있다. 시신 옆에는 한 무더기의 장작더미가 쌓여있다.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은 진실하게 보였다. 어떤 사람은 슬픔에 차 있으며, 어떤 여인은 다른 여인의 어께에 얼굴을 묻고 있다. 그러나 결코 소리를 내서 우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모두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장작이 많을수록 명문 부자집. 많은 나무로 보아 상당한 명문가인듯.

 

 

문득 소크라테스의 말이 떠오른다. “죽음이 이르렀을 때, 우리는 생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만큼 진리에 가까워진다”고 말했다. 지금 망자를 보내는 산자들의 표정이 그랬다. 다리 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스러운 화장식, 슬픔에 차 있는 가족들의 표정, 흐르는 강… 우리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젊은 날에 그토록 화두로 잡았던 생의 의문들이 네팔의 화장식을 지켜보면서 다시 불을 지핀다.

 

톨스토이는 참회록에서 말했다. “진리를 사랑하는 우리는 이 세상의 생애에서 무엇을 바라고 곧장 나아가는가? 육체로부터의, 육체의 생활을 빚어내는 모든 악으로부터의 해탈을 바라고 나가가는 것이다. 그런데 죽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어떻게 기뻐하지 않겠는가? 현인은 한평생 자기의 죽음을 탐구한다. 따라서 그는 죽음이 무섭지 않다” 톨스토이는 해탈의 일찍 경험하기 위해 몇 번이나 자살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죽지 못했다. 자살은 해탈이 아니오, 적멸이 아니다.  

 

 

 

▲사람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 가장 진리에 가가워진다. 슬픔에 잠긴 가족들

 

▲망자의 시신이 완전히 장작더미에 가려지고 있다.

 

“제행무상 시생멸법(諸行無常 是生滅法), 생멸멸이 적멸위락 (生滅滅已 寂滅爲樂)”(세상의 모든 일은 항상 됨이 없어서 한번 나면 반드시 없어지고, 나고 죽음에 끌려가는 마음이 없어지면 적멸의 고요가 즐거우리라). 열반경에 나오는 가르침은 무엇인가? 이는 자연의 심오한 이치를 말함일 것이다. 나고 죽음에 끄달리지 않는 삶이야말로 대자유인의 깨우침이 아니겠는가?

 

환갑을 넘은 나이에 다시 네팔에 와서 허무하기 그지없는 화장식을 바라보노라니 “인생은 참으로 허무하다”란 생각이 뇌리를 때린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제행무상의 인생은 지속되고 있다. 참으로 인생은 무의미한 존재다. 그래서 불타는 금강경에서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이라고 설파했을까?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어질 수 없다. 마음이 본래 공한 자리인데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우리는 마음이 공하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중생일 뿐이다.

 

우리는 사실 언제 죽을지 모르고 산다. 오늘, 아니면 내일, 어떤 사고에 의해서 곧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또한 설령 지금 곧 죽지 않더라고 언젠가는 결국 생명이 끊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이 공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일까? 내 자신, 혹은 내 주위에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도 질병이나 사고로 죽음이 덮쳐 온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다. 40대 초반에 나는 내 어머니, 형님, 친구 등 나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참으로 허무한 것이 인생이다 는 것을 절실히 느꼈던 시절이었다.

 

 

▲강가에는 계속 소라고동이 울려퍼지고, 불을 지필 준비를 하고 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솔로몬의 말이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있던 것이 뒤에 다시 있고, 이미 한 일을 뒤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인가?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눈이 밝고, 우매한 자는 어둠 속에 다닌다. 그러나 우매한 자이 당한 것(죽음)을 모두가 당하리니 그 누가 지혜가 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지혜로운 자나 우매한 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죽음으로)을 얻지 못한다. 그러니 지혜로운 자의 죽음이 우매한 자의 죽음과 일반이라고 솔로몬은 말한다. 의인과 악인,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않은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종말도 결국은 일반이다.

 

한 여인 강으로 들어가 두 손으로 강물을 떠서 시신의 입에 흘러 넣어 준다. 여인은 거의 허벅지까지 물에 적셔있다. 그리고 또 다른 여인이 물을 떠서 시신의 입에 흘러내린다. 히말라야에서 흘러내린 성수聖水를 마지막으로 망자에게 주는 것이다. 먼 저승길을 갈증 없이 가시라는 뜻일까?

 

 

▲불을 지피기전 모두 일어나서 힌두경전을 독경해주고 있다.

 

 

소라 고동이 길게 울리자 사람들이 시신을 어깨에 메고 장작더미로 옮긴다. 망자의 시신을 멘 사람들은 장작더미를 세 바퀴 돌더니 장작더미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는다. 장작더미를 도는 동안 소라 고동은 강물에 계속 울려 퍼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망자에게 입힌 주황색을 천을 벗기고 흰 천까지 벗겨낸다. 이 천은 카트로Katro라고 하는데 대를 이어 쓰는 천이다. 망자는 이제 거의 알몸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공수래공수거란 말이 실감이 난다. 알몸의 상태에서도 생을 놓아버린 망자는 말이 없다. 저 상태가 바로 적멸위락의 상태일까?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생명이 끊어지기 전에 적멸을 깨우친 자야 말로 진전한 도인일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은 적멸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인위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망자의 시신이 장작더미에 가려 완전히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사람들이 망자의 시신 위에 장작을 덮기 시작한다. 망자의 얼굴까지 장작을 쌓아올린다. 충분한 장작이 올려 질수록 부유한 집안이라고 하는데 이 집안은 상당히 부유한 집안인 모양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 여인이 슬픔에 잠겨 있다가 거의 쓰러질 뻔 한다. 옆에선 사람들이 그녀를 부축한다. 아마 망자의 아내인 듯싶다. 

 

장작에 덮인 망자에게 쌀과 반찬을 집어 넣어준다. 먼 저승길을 가는데 굶주리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생명이 끊어진 자에게 무슨 밥이 필요하며 노자가 필요하단 말인가? 한 현자가 망자를 향해 힌두의 경전인 글을 읽어준다. 이제 장작에 불을 지피는 일만 남았다.

 

▲시신에게 마지막 음식을 주고 있다.

 

 

네팔에서 남편이 죽었을 경우 아내는 13일간 밥과 물만 먹어야 한다. 소금기 있는 음식은 먹어서는 안 된다. 몸에 장신구를 지닐 수 없으며, 양미간에 띠까도 할 수 없다. 머리를 묶을 수도 없고, 옷은 빨간 색 샤리만 입어야 한다. 13일이 지난 뒤부터 1년간은 하얀 색 옷만 입어야 한다. 1년간 친척들의 경조사에도 참석을 할 수가 없고, 문밖출입도 제한을 받는다.

 

불을 지피는 광경까지 보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 우리는 가을 떠나야 했다. 가장이 죽었을 경우 불을 지피는 사람은 장남이다. 장남은 모든 재산을 상속 받을 자이기 때문이다. 망자의 옆에는 불씨를 지피고 있었다. 불을 지필 때에는 지푸라기로 하며 시신에 석유 등을 부으면 좋은 데로 가자 못한다고 한다. 때문에 돈이 있는 집안은 나무를 이용한 화장만을 고집한다. 화장이 끝난 시신을 태운 재는 강으로 밀어 버림으로써 장례식은 끝난다.

 

장례식 후 딸은 4일 간 금식한다. 그러나 아들은 가르마 부분에 머리카락 몇 개만 남겨두고 삭발을 해야 한다. 특히 장남인 경우에는 독방에 들어가 13일 동안 밥과 물만 먹고 소금기 있는 음식은 일절 금한다. 키리야Kiriya라는 의식을 엄격하게 치러야 한다. 죽은 날로부터 13일 동안은 하루하루 제사상을 차려야 한다.

 

▲머리를 박박 민 두 아들이 강물에 서서 망자를 지켜보고 있다.

 

 

 

가이드 아식은 갈 길이 멀어 더 이상 지체를 할 수 없다고 한다. 빨리 버스를 타라고 한다. 저 죽은 자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까? 가면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우리는 버스에 올라 다시 지상스님의 선창으로 “그리움에 노래”를 불렀다. 높이 올라갈수록 길이 점점 험해진다.

 

천 길 낭떠러지를 버스는 슬금슬금 올라간다. 거기에 안개까지 끼여 길은 한 층 더 위험하다. 도대체 일람 차밭에 무엇이 있기에 우린 이 험한 길을 목숨을 걸고 간단 말인가? “나무아미타~불” 일행은 험한 길을 잊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나무아미타불을 길게 외운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아아, 드디어 일람 차밭이 보인다.

 

▲히말라야 칸첸중가에서 흘러네리는 성스러운 칸카이 강에는 다른 망자의 장례식도 진행되고 있었다.

 

▲이 사진은 같은 날일람에서 돌아오면서 다른 강에서 진행되고 있는 화장식을 찍은 것이다.

 

 

(2010.10.10 네팔 동부 일람차밭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화장 장례식을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