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섬진강일기

아내가 없는 집은 썰렁하다

찰라777 2011. 2. 12. 04:58

 

 

아침 일찍 병원외래차 서울로 가는 아내를 구례구역에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니 오랜만에 홀로 남았다. 아내가 없는 집은 어쩐지 공허하다. 집안에 훈기가 없고 갑자기 건조해지는 것 같다.

 

▲구례구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떠나는 아내

 

설상가상으로 바람이 윙윙 불어대고 날씨는 추워지는데 보일러까지 완전히 고장이 나서 가동이 되지 않으니 집안은 더욱 썰렁하다. 설치된지 오래 된 '대원OK보일러'라는 회사는 부도가 난지 오래되어서 서비스를 해주는 곳도 없다.

 

 

서재로 쓰고 있는 작은 방에 전기난로를 켜놓고 어제부터 배우기 시작한 중국어교본을 꺼내어 펼쳤지만 통 머리속에 잡히지가 않는다. 책을 덮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들려고 했지만 이 역시 잡념만 더 생기고 답답하게만 느껴져 때려치우고 말았다. 바람이 워낙 강하게 부는지라 산책을 나가기도 쉽지가 않다.

 

 

고개를 들어 서가를 올려다보니 법정스님의 책 '홀로 사는 즐거움'이 눈에 들어온다. 책을 꺼내들고 55페이지 '홀로 사는 즐거움'을 펼쳐보았다. 스님께서는 '홀로 있을 수록 함께 있다'고 하셨지만 나처럼 속물근성이 있는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인 모양이다. 아내가 없는 빈자리가 금세 휭 하니 구멍이 뚫리는 것 같고 외로워지니 말이다.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고 예절 바르고 현명한 동반자를 만났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리니 기쁜 마음으로 그와 함께 가라. 그러나 그와 같은 동반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마치 왕이 정복했던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의 이 구절은 내 경우에는 마치 아내를 두고 한 말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손가락을 꼽아 아내와 살아온 햇수를 세어보니 올해로 38년이나 된다. 긴 세월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아내는 이제 한 이성이기 이전에 내 인생의 동반자이다. 인생의 동반자인 아내와 함께 하고 있으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함께 가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홀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서글퍼지고 만다.

 

법정스님의 글은 언제 읽어도 향기롭다. 스님은 가셨지만 스님께서 남겨놓은 주옥같은 글들은 언제 읽어도 영혼을 깨워주는 내용들이다. 스님은 내 마음의 스승이다. 책을 읽고 있는 데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난다. 처음에는 바람소리인가 했는데 "계시오!" 하는 소리가 역력히 들려온다.

 

 

누굴까? 집배원 아저씨인가? 쪽문을 열고 나가니 만수마을에 살고 있는 하 시인이 서 있질 않는가? 반갑다! 홀로 있는 집을 찾아주는 방문객이 이렇게 반가운 것도 처음이다.

 

 

"아니 이게 누구요? 어서 들어오세요."

"지나가다가 차가 있기래 들렸어요."

"마침 잘 왔소. 혼자 심심하던 차인데."

 

 

하 시인은 진주가 고향인데 만수마을에 귀농을 하여 보금자리를 튼 지 6년이 지났다. 나보다 나이는 적지만 귀농으로서는 대 선배다. 그는 이곳 구례가 좋아 진주에서 이사를 와서 나처럼 빈집에서 세를 살다가 만수마을에 땅을 사서 손수 집을 지어살고 있다.

 

 

"여기 밤을 좀 가져 왔어요. 작년에 수확을 한 것을 냉장 해두었던 것인데."

"아니 이런 귀한 밤까지… 고맙수다."

"산불 감시를 하다가 산에서 방금 내려오는 길에 냉장실에서 좀 꺼내 왔어요."

"저런,  날씨가 건조하니 산불은 정말 조심해야겠어요."

 

 

찻물을 올려놓고 우리는 지난번 지리산 왕시루봉에 났던 산불이야기를 한 동안 나누었다. 그는 겨울에는 특별히 농사 일도 없고 하여 산림청의 산불 감시 요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아직 아이들이 대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아이들 뒷바라지도 하고 과외수업으로 용돈을 벌고 있어 주중에는 하 시인 홀로 있는 시간이 많다.

 

 

"그래 홀로 사는 재미가 어떻소?"

"처음엔 영 어렵더니 그도 이력이 나서 이럭저럭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사모님은 어디 가셨나요?"

"서울병원에 갔어요. 내일 오는데 집 사람이 하루만 없어도 홀로 밥을 차려 먹으려니 영 옆구리가 시려지는데요. 허허허."

"하하하. 그게 시간이 좀 지나가야 합니다."

"그렇군요. 심심하던 차인데 바둑이나 한 수 둘까요?"

"그거 조오치요. 딱 한수만 하지요. 오늘 아내가 진주에서 와 있는데 이따 저녁 때 순천에 가서 영화도 한 프로 보고, 모처럼 함께 콧김 좀 쐬고 오자고 하네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내요. 그럼 지금 곧 가셔야 되는 거 아니오?"

"아니요. 딱 한수 할 시간은 있어요."

 

 

그래서 시인과 나는 바둑판을 벌려 놓고 첫 대국을 두기 시작했다. 내가 백을 잡고 시인이 흑을 잡았다. 이곳에 이사를 와서 처음으로 두어보는 바둑이다. 지난번에 그의 집에 갔을 때 바둑판이 눈에 보였다. 허지만 이 동네는 바둑을 두는 사람이 없어 바둑을 둘 기회가 없는데 내가 바둑을 좀 둔다고 했더니 그는 매우 반가워했다.

 

 

침묵 속에 차를 마시며 바둑을 똑똑 두어갔다. 시인은 3급 수준이라고 하는데 3급으로는 잘 두는 바둑이다. 개가 결과 내가 시인에게 다섯 집을 졌다.

 

 

"오늘은 손님 대접 하느라 져 주신 거 아닙니까?"

"어딜? 바둑은 이기려고 두는 건데 일부러 져줄 수야 없지요. 하 형의 바둑이 된장 바둑이라 3급치고는 센데요? 하하하."

"하하 그래요. 다음에 다시 한 번 두지요."

 

 

시인은 아내와의 약속 때문에 자리를 털고 있어났다. 시인을 보내고 나니 집안은 다시 조용해지고 시계를 보니 6시다. 나는 어제부터 배우기 시작한 중국어 교본을 들고 구례읍으로 갔다. 중국어 강의를 듣고 집에 돌아오니 밤 8시 반이다. 밤이 되니 날씨가 더 추워진다.

 

보일러가 꺼진 방은 냉기가 휭 돌고 썰렁하다. 도심에 홀로 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도심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 각종 소음, 오가는 사람들, 자동차 소리… 이런 것들이 있어 이렇게 썰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아내가 미리 준비해둔 찌개를 끓이고 보온 밥솥에서 밥을 떴다. 냉장고에서 김치와 반찬을 꺼내들고 홀로 밥을 먹으려고 하니 영 밥맛이 없다. 몇 숟가락 떠 넣다가 상을 물리고 말았다. 전기장판을 켜놓고 전기난로도 켜 놓았지만 아내가 없는 집은 여전히 썰렁하다.

 

아내가 없는 빈 자리가 이렇게 크고 공허하다니. 시골 벽촌이라서 그럴까? 불 꺼진 창, 보일러가 거진 집, 아니 그보다 아내가 없는 집은 어둡고 쓸쓸하기만 하다. 

 

"이거야 정말… 나는 혼자 살기는 아직 멀었나보다."

 

 

(2011. 2. 10 홀로 집에 있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