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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법정스님이그립다!

찰라777 2011. 3. 1. 10:37

 

법정스님 1주기 추모제

 

법정스님의 '무소유'정신을 일깨우는

보성스님의 사자후, "출가자는 그래야 해!"

 

 

 

 ▲법정스님 1주기 추모재

 

 

 "출가자는 그래야 해!"

 

보성 노장스님의 벼락같은 '할' 소리에 법정스님 추모법회장에 앉아있던 좌중은 모두가 움찔하며 놀랐다. 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추모법회장에 겨우 들어오시던 노장스님의 활시위를 튕겨나오 듯 터져 나오는 일갈은 무서웠다. 저 노구의 몸 어디에서 그런 벽력같은 소리가 나오실까? 아마 평생을 닦아온 법력일 것이다.

 

법정스님 추모 법문을 하기 위해 천천히 법상에 오른 송광사 방장 보성(菩成, 83)스님은 쌍계사에서 법정스님이 젊은시절 효봉(曉峰, 1888~1966)스님을 시봉했던 일화로 잔잔하게 운을 띠기 시작했다. 이 일화는 법정스님께서 글로도 썼던 일화다.

 

 

 

▲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추모장으로 가는 송광사 방장 보성스님

 

 

"……하루는 (법정스님이 쌍계사에서) 20리 떨어진 구례 장터에 (걸어서)가서 찬거리를 사고, 아는 집에 가서 고추장도 좀 얻었다. 그걸 가지고 (걸어서) 오느라 법정스님은 그만 공양 시간에 조금 늦고 말았다. 그때 효봉스님이 '법정아, 이리 좀 들어오너라'라고 하더니 '오늘은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만 점심을 먹지 말자'고 하셨다."

 

나는 이 말을 듣자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쌍계사와 구례읍 중간지점인 간전면에 귀농하여 살고 있는 우리 마을에서 구례장터까지는 8km 정도의 거리이다. 구례 장을 보러 차를 몰고 갈 때마다 나는 걸어서 장을 보러 갔을 법정스님을 생각하게 된다. 추은 겨울날 음식을 탁발하기 위해 홀로 길을 걸어가는 스님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기도 한다.

 

 

길상사 설법전에 붙여진 '묵언'

 

 

그런데 법정스님 추모 법회에서 노장스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다시 듣고 있자니 괜히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다른 보살님들도 훌쩍거리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려 자판이 잘 보이질 않는다.

 

말이 걸어서 가는 길이지 쌍계사에서 구례장터까지는 20리가 아니라 40리는 족히 넘는 거리다. 추운 겨울 날 왕복 80리 길을 걸어서 겨우 장을 보와 왔는데 점심공양시간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고 밥을 먹지말자는 효봉스님의 추상같은 가르침을 말없이 따르던 법정스님이다. 효봉스님과 함께 점심공양을 들기 위해 부지런히 걸어오느라 얼마나 배가 고팠을 텐데 말이다.

 

노장스님은 잠시 말씀을 멈추고 좌중을 둘러 보았다. 좌중은 고개를 수그리고 침묵에 젖었다. 간혹 눈물을 훔치며 훌쩍거리는 보살님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침묵을 깨고 스님은 다시 느리게 말을 이어갔다.

 

 "자,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 내가 세세생생 이 일은 잊지 못할 거다. 내 말이 둔하게 들려도 그래도 이 말은 들릴 거다…… 출가자는 그래야 해!"

 

 

▲길상사 '침묵의 집'

 

 

보성스님은 "출가자는 그래야 해!"라는 벼락같은 일갈을 끝으로 법상을 천천히 내려왔다. 법정스님이 돌아가신 뒤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어떤 이유로든지 간에 법정스님의 유지가 흐려지는 세간의 잡음에 경고를 울리는 보성스님의 사자후는 우리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법문이다.

 

지리산 자락에 살고 있는 나는 법정스님의 1주기 추모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 길상사에 왔다. 전에는 길상사가 생기고 나서부터 두 달에 한 번씩 산에서 내려와 법문을 하시는 법정스님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스님의 법문을 듣곤 했었다. 이번에는 내가 거꾸로 산에서 서울로 내려오면서 지금은 이 세상에 아니계시는 법정스님을 생각하노라니 스님이 더욱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법정스님 1주기 추모재를 알리는 타종(길상사)

 

 

스님의 법문은 1시간을 절대로 넘지 않았다. 스님은 우스갯소리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법석에 수녀님들이 열분 정도 앉아있는 것을 보시더니, "수녀님들이 뭣하러들 여기 오셨소. 성당에서 기도를 올리시기도 바쁠 텐데. 이 늙은 중한 테 무슨 들을 것이 있다고." 그 소리에 좌중도 수녀님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스님은 그런식으로 좌중을 가끔 웃겼다.

 

스님의 간결한 법문과 날카로운 눈초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스승처럼, 형님처럼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바로 잡아주는 매운 '죽비'였다. 그러나 이 사회는 침묵은 없고 집단이기주의를 관철하려는 이전투구의 소리만 무성하다. 

 

지금 이 시대는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이나 선승하신 법정스님 같은 어려운 어른이 없다. 언제나 바른 소리를 하시던 김수환 추기경은 각막까지 기증을 하시고 선종 하셨고, 법정스님은 춘설이 내리던 날 흰눈에 꺾이는 소나무처럼 수척하신 모습으로 입고 있던 허름한 가사장삼 하나 걸치시고 자연으로 돌아가셨다.

  

 

 ▲길상사를 시주한 길상화 보살 공덕비

 

▲설법전 앞에 세워진 성모상

 

 

길상사에는 법정스님을 기리는 그 어떤 상 하나도 없다. 추모장인 설법전 앞에는 가냘픈 성모상이 하나가 서 있고, 계곡 한 모서리에는 10년 동안 법정스님을 좇아다니며 절을 만들어 달라고 이 절터를 시주 했던 길상화 보살의 작은 공덕비 하나가 서 있다. 오늘 따라 두 석상 앞에는 많은 꽃과 향, 초가 놓여있다. 아마 법정스님을 기리는 중생들의 마음일 것이다.

 

법정스님은 종파를 가리지 않으시고 모든 중생을 끌어 안으시려고 노력 하셨다. 그래서 스님의 법문과 책은 종파를 초월하여 듣고 읽힌다. 추모법회장을 나온 나는 가냘픈 성모상과 길상화 보살의 추모비에 합장을 하고 '침묵의 집'으로 들어갔다. '침묵의 방'에서 한동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자니 법정스님이 더욱 그리워진다.

 

아아, 법정스님이 그립다!

 

 

(2011. 2. 28 길상사 법정스님 추모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