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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남도 여행②-詩가 그리울 땐 강진으로 가라?

찰라777 2011. 12. 1. 05:01

그리울 땐 강진으로 가라!

은행잎 뚝뚝 떨어지는 영랑시인의 집

 

 

눈이 곧 펑펑 쏟아져 내 내릴 것만 같은 늦가을.

어쩐지 한줄기 시詩가 그리워지는 그런 날씨다.

나는 강진에 있는 영랑시인 생가로 갔다.

시인의 생가에 도착을 하니 빨간 모란꽃잎 대신 노란 은행잎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다.

 

 

 

 

 

"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서름에 잠길테요/5월 어느날 그 하로 무덥던 날/떠러져 누은 꼿 님마져 시드러버리고는/ 천지의 모란은 자취도 업서지고/뻐처 오르든 내 보람 서운케 문해졌느니/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시인은 모란이 떨어진 자리에 찬란한 봄을 기둘리고 있었다. 찬란한 슬픔을 여윈 봄을. 그러나 그곳에는 모란 대신 빨간 입술 내민 동백꽃 한 송이가 진하게 속살을 보여주고 있다.

 

샛노란 은행잎

새빨간 동백꽃

동백꽃 바라보며

툇마루에 앉아있던 

어디에 있는가

아아, 달을보고

별을 총총 세는 시인이여!

하늘 우러러보며 돌담 거니는 시인이여!

 

 

시에도 토질土質이 있다면 영랑의 시에서는 남도의 빛깔과 정서, 그 청잣빛 순수한 슬픔과 정조가 깃들어 있다. 그의 저항적이면서도 열정적인 성격은 고향 남도가 가지고 이는 아름다운 자연과 남도 특유의 정서와 잘 어우러지고 있다. 영랑은 지극히 맑은 결로 순화를 거듭하며 주옥같은 서정시를 뽑아냈다.

 

영랑 김윤식은 1903년 1월 16일 강진에서 태어나 1950년 9월 29일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80여 편의 시를 발표 하였다. 그 중 60여 편의 시를 그는 광복 전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이곳 강진에서 생활하며 썼다. 시인의 생가 타를 중심으로 <예던 길>이 낮으막한 보은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예던 길>은 <가던 길>의 옛말이다. 시대를 초월한 다산과 영랑 두 큰 스승의 고뇌와 철학이 스며 있는 길이다. 강진에 가거든 <예던 길>을 꼭 걸어보라. 오늘은 사는 우리들에게 다산의 향기와 영랑의 시향詩香을 동시에 누리는 즐거움을 맛볼것이다.

 

 

 

영랑생가는 1948년 영랑이 서울로 이사를 한 후 몇 차례 전매되었으나, 1985년 강진군에서 매입을 하여 1992년 원형을 보수하였으며, 1993년 가족들의 고증을 거쳐 복원하였다. 생가에는 시의 소재가 되었던 샘, 동백나무, 장독대, 감나무 등이 남아 있으며 그의 대표시의 소재인 모란이 여기저기 심어져 있다.

 

 

 

 

 

영랑 생가 앞에는 '영랑현구문학관'과 향토미술관이 한옥형태로 고즈넉이 서 있다. 그러나 문학관은 아침 일찍이라서 문이 잠겨 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영랑 생가 앞으로 시인의 발자국을 더듬으며 발길을 옮겼다. 돌담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한적한 길에는 동백과 담쟁이 넝쿨이 늦가을의 서정을 노래하고 있다. 길가에 초가지붕으로 이어진 탑골샘이 정겹게 느껴진다. 영랑도 저 탑골샘에서 물을 퍼 마셨을까?

 

 

 

 

돌담을 지나니 전형적인 우리나라 전통 사립문이 나온다. 대나무발로 역어진 사립문에 <SECOM>이란 팻말은 아무리 보아도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처럼 보인다. 저 팻말을 달지 않으면 안될까? 시인의 집에서 무엇을 도둑맞을 것이 있으리오. 활짝 열려진 사립문 사이로 새로 이은 초가지붕이 정겹게 다가선다. 바로 영랑시인 윤식의 생가다. 돌담장 위에 몇 백 년을 묵었을 은행나무 한 그루가 높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저 은행나무는 영랑이 태어가기 전부터 강진의 역사를 새기며 이 집을 지키고 있었으리라. 돌담장 밑으로는 샛노란 은행잎이 뚝뚝 덜어져 내린다.

 

황금보다 값어치 있는 은행잎이다! 누가 황금을 저렇게 멋들어지게 떨어지게 할 수가 있을까? 자연만이 연출하는 기막힌 예술이다. 나는 황금 밭을 살포시 즈려밟고 영랑의 생가로 들어간다. 시인은 이렇게 황금으로 길을 만들어 나그네를 반기고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이 고요히 돌담에 드리운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물아래 우슴짓는 샘물가치....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물아래 우슴짓는 샘물가치/내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우에/오날 하로 하날을 우러르고 십다/새악시볼에 떠오르는 붓그럼가치/시의 가슴을 살프시 젓는 물결가치/보드레한 에메랄드 얕게 흐르는/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 십다."

 

마음은 거석에 새겨진 영랑의 시처럼 물결친다. 어쩌면 이리도 고운 시를 쓸 수 있을까? 소리나는 대로 노래한 쉬우면서도 간결한 시인의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김소월, 정지용, 윤동주의 시, 그리고 영랑의 시는 누구나 이해하기 쉽다. 시란 모름지기 쉬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돌담장 위로 내 마음이 고요히 흐른다. 은행잎 사이로 한 점 부끄럼 없는 하늘이 보이지만 하늘을 바라보는 나는 부끄럽다. 세상에 얼마나 때를 묻히며 살아온 세월인가?

 

 

 

안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영랑의 대표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비가 타원형의 거석위에 새겨져 있다. 나는 다시 돌 판에 새겨진 시를 읊조려 본다. 한해가 다가고 겨울이 다가 오는데도 시인이 기다리는 찬란한 봄은 찬란한 봄은 어디에 있는가? 한일도 없는데 어느덧 흘러가버린 세월의 덧없음이 섭섭해 울고 싶다. 나의 찬란한 봄은 어디에 있을까?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웁네다/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즉 그 기둘리고 잇을테요/찬란한 슬픔의 봄을……"

 

서까래 사이로 거기 영랑이 살았던 안채가 살포시 보인다. 마당 오른편에는 샘물이 있고, 그 옆에는 모란꽃 밭이 있다. 그리고 "마당앞 맑은 새암을"이란 시비가 새겨져 있다. 시비는 읽어보라고 애써 세워 놓은 것이다. 나는 다시 홀로 돌판에 흘겨 쓴 영랑의 시를 천천히 읊조린다.

 

 

 

 

 

"마당앞/맑은 새암을 드려다 본다/저 깁은 땅밑에/사로잡힌 넉잇서/언제나 먼 하날만/내여다 보고 게심가터/별이 총총한/맑은 새암을 드려다 본다/ 더 깁은 땅속에/편히 누은 넉잇서/이밤 그는 반작이고/그의 것 몸 부르심 가터/마당앞/맑은 새암은 내 령혼 얼굴"

 

아하, 맑은 샘물에 비친 총총총한 별이 시인의 영혼이라? 이 얼마나 고결하고 순결한 마음인가? 별처럼 총총한 영랑시인의 마음이 우물속에서 반짝인다. 그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며 맑은 새암물에 비친 자신의 영혼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더 깊은 땅속에 편히 누워 맑은 영혼으로 독립을 기리며 그는 찬란한 봄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마당 뒤쪽으로 돌아가면 수백 년은 넘었음직한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대숲에 서 있다. 계절을 망각한 동백은 붉은 꽃이 듬성듬성 피어 있다. 동백나무 밑에는 "동백닙에 빗나는 마음"이란 시비가 세워져 있다.

 

 

 

 

 

"내마음의 어듼듯 한편에 끗업는/강물이 흐르네/도처오르는 아츰날빗이 빤질한/은결을 도도네/가슴엔듯 눈엔듯/ 또 밋줄엔듯/마음이 도른도른 숨어잇는 곳/내 마음의 어듼듯 한편에 끗업는 강물이 흐르네"

 

시인의 노래처럼 뒤뜰에는 동백잎이 반질반질하게 빛나고 있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은 어디로 흘러갈까? 바람이 불자 동백나무 뒤로 빽빽이 들어선 대숲에서 우우 노래를 부른다. 그 옆으로 시인의 작업실이었다는 사랑채가 나타난다. 시를 쓰는 영랑의 밀랍인형이 다소 조잡스럽게 놓여 있다. 그냥 비워 두면 좋을 걸.

 

 

 

 

 

사랑채 앞에는 수백 년 된 고목과 동백나무가 잘 어우러져 있다. 영랑은 이곳에서 지인들과 문학과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을, 인생의 철학을 이야기 하였으리라. 늦가을 겨울은 다가오는데 은행잎 떨어지는 길 위에 동백이 붉은 입술을 내밀고 있다. 동백아 너는 어찌하여 시절을 잊고 입술을 내밀고 있느냐? 황금밭에서 붉은 동백을 올려다 보는 나그네는 행복하다. 시인이 남겨준 위대한 유산인 황금밭에서 아름다운 동백꽃을 바라보다니...  영랑도 툇마루에 앉아 떨어지는 은행잎과 동백꽃을 감상했으리라. 은행나무 건너 감나무 밑에는 영랑이 툇마루에 앉아 달빛에 어린 감나무 그림자를 감상했을 <달>이라는 시비가 서있다.

 

 

 

 

"사개틀닌 고풍의 툇마루에 업는 듯이 안져/아즉 떠오를 긔척도 업는 달을 기둘린다/아모런 생각업시/아모런 뜻업시/이제 저 감나무 그림자가/삿문 한치식 올라오고/이 마루우에 빛깔의 방석이/보시시 깔리우면/나는 내 하나인 의론 벗/간열픈 내 그림자와/말업시 서로 맛대고 잇스려니/이밤 옴기는 발짓이나 들려오려리라"

 

 

 

 

툇마루에서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시인의 시선이 절로 느껴진다. 그리고 달빛에 따라 조금식 마루로 얼비치는 <감나무 그림자>를 이토록 아름다운 언어로 빚어 내다니... 고요함 속에서 빛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시인의 통찰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낡고 허물어진 <사개틀린>툇마루에 앉아 아무런 생각없이, 아무런 뜻도 없이 달을 감상하는 시인의 체온이 느껴진다. 고독한 시인의 의로운 벗은 가냘픈 자신의 그림자 뿐이었을까? 세상에 단 한 사람만이라도 진정한 벗이 있다면 죽어도 외롭지 않으리라. 그런데 내 의로운 벗은 과연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나는 홀로 내 그림자를 밟으며 시인의 그림자를 좇고 있으니 말이다.

 

 

 

 

영랑의 생가를 나와 생가뒤로 돌아가면 긴 담장이 이어진다. 시인이 산책을 했을 <예던 길>이다. 담장에는 시절을 잊은 듯 나팔꽃이 하릴없이 피어있다. 그 담장을 따라 올라가면 금서당 고옥이 나온다. 금서당은 강진중앙초등학교 전신으로 강진 신교육의 발상지다. 1919년 4월 4일 이곳에서 200여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영랑도 금서당 출신으로 1919년 휘문의숙 시절 구두에 독립선언문을 감추어 강진으로 내려와 강진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목숨을 건 시인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현장이다.

 

 

 

 

 

현재 금서당은 고 완향 김영렬 화백이 반파된 것을 보수하여 유화 작품 활동을 하는 작업실로 이용하였다. 금서당에서 바라보는 강진만의 평화로운 풍경은 과히 압권이다. 삶의 여유와 풍요를 함께 맛보는 그런 풍경이다. 금서당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영랑과 다산의 예던 길'이 이어진다. 예던 길은 가던 길의 옛말이다. 소공원과 충혼탑으로 이어지는 고즈넉한 길에는 영랑의 시들이 드문드문 걸려 있다. 은행나무 가지에 걸려 있는 '청명' 이란 시가 유독 마음을 사로잡는다.

 

 

 

 

 

 

 

 

"호르 호르르 호르르르 가을 아참/취여진 청명을 마시며 거닐면/수풀이 호르르 버레가 호르르르/청명은 내머리속 가슴속을 저져들어/발끝 손긑으로 새여가나니……"

 

말갛게 다가오는 가을 아침에 끊어질듯 이어지는 풀벌레 울음소리가 발길에 차인다. 마치 은구슬이 구르는 듯한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영랑은 이름처럼 영롱한 시의 감각을 키웠나 보다. 밭 고랑에 심어진 유자나무에 노란 유자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침이 입에 가득 고인다. 시인이 그랬듯 문득 언덕에 누워 바다를 보고 싶다.

 

"어덕에 누어 바다를 보면/빛나는 잔물결 헤일수 업지만/눈만 감으면 떠오른 얼굴/뵈올적마다 꼭 한분이구려"

 

이 언덕은 강진의 아름다운 전경을 한 눈에 조망 할 수 있는 곳이다. 고개를 들면 낮으막한 사나세가 베토벤의 전원음악처럼 펼쳐져 있고, 멀리 잔물결이 비발디의 사계처럼 아름다운 강진만이 바라다 보인다.

 

 

 

 

 

 

 

나는 다시 예던 길을 따라 내려오며 영랑시인의 발자취를 되새김질 하듯 애써 더듬어 본다. 시가 그리우면 강진으로 가라. 초봄이면 동백이 후드득 떨어져 시뻘겋게 뒹굴것이며, 5월이 되면 모란이 뚝뚝 떨어져 내릴 것이다. 그리고 늦가을엔 노란 은행잎이 돈방석으로 그대 발밑에 깔아줄 것이다. 가라, 시가 그립거나 배가 고프거나, 황금이 그립거든 강진 영랑시인의 생가로 가라!

 

(2011.11 강진 영랑시인 생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