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임진강일기

중공군 전투가 치열했던 금굴산에 오르다

찰라777 2012. 1. 9. 07:40

돛단배 모양의 큰여울이 있는 동이리(東梨里) 마을

 

 

오늘은 왠지 뒷산에 오르고 싶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동이리 마을 뒤에는 야트막한 산이 있다. 동네 사람에게 물어보니 산 이름이 금굴산이라고 했다. 왜 산 이름을 금굴산이라고 했을까? 동이리와 금굴산은 앞으로 내가 살아갈 곳이므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배울교 쪽에서 바라본 동이리 마을, 뒤쪽에 보이는 산이 금굴산이다.

 

 

미산면사무소 홈페이지에서 마을 유래를 찾아보니 동이리(東梨里-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마을은 본래 마전군 군내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부리(中部里), 동부리(東部里), 이동리(梨洞里)를 병합하고 ‘동이리'라 하여 미산면에 편입되었다.

 

1945년 해방 후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3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돛단배 지형을 이루고 있는 동이리는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합수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동이리에는 금굴산(金窟山, 金掘山)과 임진강의 큰 여울인 밤여울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동부리, 큰배울 등이 있었다. 큰배울은 동이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지형이 큰 돛단배 형상인 산 안쪽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동부리(東部里)는 큰배울 동쪽에 있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도상으로 보면 합수머리에 해당하는 동이리는 지형이 마치 돛처럼 생겼다.

 

 

'배울'은 그 어원이 머리, 산의 뜻으로 쓰였던 고어 '받'에서 나온 것으로, '받-박-백-배 등으로 음이 변해 왔다. '배'와 '골짜기'의 뜻인 '울'이 합하여 '배울'로 불리던 것이 소리 나는 대로 한자로 옮기면서 '이동(梨洞)', '주동(舟洞)'이 되어 '큰 돛단배 형국, 배나무가 많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동이리 마을 앞에 있는 배울교

 

 

▲배울교에서 바라본 동이리 마을과 금굴산

 

 

동이리는 한국전쟁 전에는 개성 왕씨 8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었고, 마전군 당시 군내에서 가장 으뜸가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동이리 마을 앞에는 '배울교'라는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의 이름도 큰배울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을 것 같다.

 

 

동이리가 있는 미산면은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전 지역이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4년 11월 17일 행정권이 수복되어 민간인 입주가 허용되었다.

 

 

금광과 철광이 있었다는 '금굴산(金窟山)'

 

금굴산(金窟山, 金堀山)은 우정리와 경계를 이루는 곳에 높이 195.7m의 산으로 쇠가 많이 매장되어 있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금광과 철광이 개발되었으며, 채굴로 인해 산 내부가 텅 비어있어 '공굴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마전군편에는 미두산(尾頭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인근에 대홍수로 인하여 온천지가 물바다였는데, 산 정상만 소등에 앉은 쇠파리만큼 남았다 하여 '쇠파리산'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 내용은 마치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또 고려시대에는 봉화를 올렸던 곳이라 하여 봉화산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금굴산 자락에 위치한 금가락지

 

 

나는 금가락지 뒤쪽에 있는 오솔길을 따라서 금굴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첫날(1월 3일)은 눈 내리는 풍경을 찍기 위해 산에 오르는 것을 시도 했는데, 눈이 워낙 펑펑 쏟아져 내려 길을 찾기가 힘들어 초임에서 사진만 몇 장 찍고 포기를 했다.

 

 

1월 5일 나는 두 번째로 산에 오르는 것을 시도 했다. 10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수은주는 영하 12도를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금가락지 뒷집을 통해 능선을 따라 올라갔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 등산로가 거의 없었다. 눈 위에는 고라니의 발자국으로 보이는 짐승들의 발자국이 많이 나 있었다.

 

 

▲1월 3일 날 금굴산을 오르려고 했으나 눈이 많이 워낙 많이 내려 포기를 했다.

 

 

 ▲1월 5일 날은 눈이 거의 녹아 다시 등산을 시도 했다.

 

 

▲저 철조망을 친 곳에 고라니가 있다가 나를 보더니 황급히 도망을 쳤다.

 

 

고라니 한 마리가 밭의 경계를 이룬 철조망에서 황급히 일어나 도망을 쳤다. 아마 먹을거리가 없어 내려왔다가 놀라 도망을 치는 모양이다. 윗집 밭에는 철조망이 이중으로 쳐 있는데 처음에는 울타리로 된 철조망만 둘렀다가 아마 고라니 피해가 심해 보조 철망을 덧씌운 듯 했다. 불쌍한 고라니, 이 철조망을 끼어 들어가지는 못하겠구나.

 

 

▲고라니 발자국이 꽤 크다

 

 

능선은 처음에는 완만하게 오르다가 점점 가팔라졌다. 등산로 표시가 거의 없고, 참나무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접시 물에도 빠져 죽는 다는 말이 있듯 작은 산에서도 길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 더구나 이 지역은 지뢰가 창궐하는 지역이 아닌가?

 

 

▲사람이 다니지 않아 길이 등산로가 거의 없어 산을 오르는데 애를 먹었다.

 

 

▲중간에 산비탈로 난 작은 오솔길을 찾았다. 

 

 

▲중간에 이런 쇠말뚝이 박혀 있어 혹 지뢰밭이 아닌가 겁이 더럭 나기도 했다.

 

 

"찰라님 절대로 길이 없는 산에는 올라가지 마세요. 함부로 산에 들어가면 큰일 납니다. 지뢰를 밟아 손발이 전단되어 불구자가 된 사람들이 많아요."

 

 

며칠 전 동이리로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해봉 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그는 이 지역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는데 아직도 수거 되지 않은 지뢰가 복병처럼 남아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를 해주었다.

 

 

▲중간 중간에 발견되는 참호

 

 

거의 길이 없는 산을 오르다보니 겁이 더럭 나기도 했다. 나는 짐승들의 발자국이 있는 곳만 조심스럽게 따라가며 산정 상을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산 중간 중간에는 참호 같은 것이 파 있었다. 정상으로 오르는 능선에는 아예 참호가 줄줄이 파져 있었다.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금굴산

 

 

나중에 인터넷을 뒤져보니 한국전쟁당시 이 금굴산에서 UN군과 중공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영연방 소속 벨룩스(벨기에-룩셈부르크군) 제29여단과 중공군 제65군은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금굴산을 중심으로 임진강 방어를 위해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다.

 

 

▲능선에는 참호진지처럼 움퍽 패인 지형이 늘어서 있다.

 

 

금굴산은 임진강 북쪽에 위치한 돌출 고지로 동쪽과 남쪽이 임진강으로 둘러싸여 도감포에 설친 된 2개의 교량이 유일한 통로로 이로 인해 중공군의 공격에 고립될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이러한 전술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벨기에 대대는 금굴산 일대에 철조망과 지뢰를 매설하여 강력한 방어거점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집중 공격으로 영 제29여단은 금굴산을 탈출하여 전곡으로 물러났다.

 

 

▲북쪽을 향해 있는 이상한 철구조물 

 

 

▲이 지역은 한국전쟁 당싱 벨기에-룩셈부르크 소속 UN군과 중공간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기관포 총구처럼 보이는 철구조물을 보자 등꼴이 오싹해졌다.

 

 

능선에 난 참호는 전쟁참화의 역사를 안고 있는 듯 보였다. 능선을 따라 임도가 제법 넓게 나 있었다. 능선을 따라 1차고지에 오르니 이상한 철 구조물이 진지에 남아 있었다. 드럼통 위에 기관포 총구처럼 생긴 철 구조물이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런 오지까지 와서 우리나라를 위해 피를 흘리며 목숨을 담보로 치열한 전투를 치루었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군대가 정말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기에는 한국전쟁 당시 3,498명을 파병하여 금굴산 전투 중에서 99명이 전사를 하고 300명이 넘게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지난 2010년 한.EU정상회담 참석차 벨기에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도 브뤼셀에서 <한국전쟁 전시회>를 찾아 "대한민국이 동일돼 한국전 참전용사와 후손들을 초청할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감사 표시를 한바 있다.

 

철 구조물을 보자 괜히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더 이상 등산을 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건너편에 금굴산 정상에는 군막사로 보이는 건물이 보였으나 날씨도 점점 더 추워져 나는 하산을 하기로 했다. 나는 아무도 없는 능선에서 전쟁으로 이유없이 죽어간 젊은 넋들을 위하여 잠시 묵념을 한 후 하산을 서둘렀다.  좁은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다가 나는 이상한 수첩을 발견하였다.

 

 

▲철구조물이 있는 고지에서바라본 금굴산 정상에는 군막사 같은 건물이 보였다. 

 

 

▲능선에서 바라본 동이리 임진강 풍경

 

 

금굴산에서 발견한 성경수첩

 

 

파란색으로 된 수첩이 처음에는 무슨 유리조각처럼 보였는데, 가까이 가보니 비닐로 싸여있는 수첩이었다. 주변에는 큰 비닐이 둘러쳐져 있고, 마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간첩들의 소행은 아닐 거고. 기분이 묘했다.

 

나는 수첩을 몇 개 챙겨들고 서둘러 하산을 했다. 집에 돌아와 비닐을 뜯어보니 놀랍게도 성경이 빽빽이 인쇄되어 있었다. 깨알처럼 박혀진 성경은 마태복음부터 시작되는 신약성경이었다.

 

  ▲금굴산 중턱에서 발견한 성경수첩. 처음에는 이상한 수첩처럼 보였는데

집에 돌아와 뜯어보니 글자가 빽빽히 새겨진 신약성경이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를,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리를, 베레스는 헤스론은 람을, 람은 아미나답을, ……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이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를 나셨다."

 

 

마태복음은 예수의 족보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추운 날에 누가 금굴산에 이 성경책을 뿌리고 갔을까? 이곳에서 누군가 산상기도라도 했단 말인가? 금굴산과 성경, 나는 이 풀리지 않는 의문을 않고 생각에 잠겼다.

 

 

"점심이나 먹으로 가요? 오늘은 밖에 나가서 점심을 먹고 싶어요.'

"그럴까?"

 

 

▲어유지리에 있는 이가내 집 메뉴. 고추장삼겹살뚝배기를 먹었는데 너무 매웠다.

 

 

아내가 만날 집에서만 밥을 먹기도 지겨우니 어디 가서 얼큰한 음식을 먹고 오자고 했다. 우리는 어유지리에 있는 이가(李家)네 집에 가서 고추장삼겹살뚝배기를 시켜 먹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고추장 뚝배기를 먹고 나니 기분이 좀 누그러졌다. 그러나 고추장으로 발라 놓은 뚝배기는 너무나 매웠다.

 

 

점심을 먹고 나서 들어오다가 삼화교 삼거리에 있는 안흥찐빵 집을 들렸다. 아내는 이런 곳에서 파는 안흥찐빵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는 것. 마전리쉼터상회 아주머니는 안흥찐빵 재료를 받아다가 스팀으로 찐다고 했다. 우리는 3000원을 주고 안흥찐빵 5개를 샀다.

 

 

 ▲마전리 삼거리에 있는 안흥찐빵집

 

 

장사가 잘 되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2009년 북한 댐 방류 이후에는 임진강을 방문 하는 손님이 적어 장사가 영 안 된다고 하였다. 아주머니는 친절하게 이 근처의 정보를 알려주었다. 간단한 쇼핑을 하려면 임진교를 건너가면 하나로마트가 있다는 정보까지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마침 먹을 찬거리도 떨어지고 해서 왕징면을 거쳐 임진교를 지나 하나로 마트에 들렸다. 군남면 진상리에 위치한 하나로 마트는 제법 큰 규모였다. 아내는 야채와 라면, 빵 등을 골라 넣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다락방 서재에 올라가 다시 금굴산에서 발견한 성경수첩을 펴들고 마지막 장을 읽어 보았다.

 

 

"나는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말해둡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덧붙이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벌하실 때에 이 책에 기록된 재난도 덧붙여서 주실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서 무엇을 떼어 버리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그 거룩한 도성에 대한 그의 몫을 하나님께서 떼어 버릴 것입니다. 이 모든 계시를 보증해주는 분이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주예수의 모든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정초에 금굴산을 산책하며 발견한 이 성경수첩은 나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이렇게 매서운 추위에 성경수첩을 금굴산에 놓아둔 사람은 누구일까?

 

 

▲10년전에 들렸던 터키 에페스 인근 부르부르산에 있는 성모마리아의 집.

사도요한은 이곳에서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터키에 있는 부르부르산을 상기 시켰다. 부르부르산은 사도 요한이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다는 산이다. 나는 2001년도에 에페소에서 7km 떨어진 부르부르산을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높이 420m의 부르부르산은 마치 금굴산의 지형과도 비슷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한복음 19-26-27)

"보라, 네 어머니라."

 

 

▲동이리 마을에 위치한 동이마을교회

 

 

예수는 죽기 전에 요한과 마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수가 승천을 한 후 4~6년(AD 37~48)뒤에 사도 요한이 성모마리아를 모시고 이곳 터키의 부르부르 산 위에 집을 짓고 성모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다는 기록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로부터 1800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 성모 마리아의 집은 독일의 캐서린(Catherine Emmerich)이라고 하는 수녀의 꿈속에 나타났다.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그녀는 그 내용을 "성모마리아의 생애"(1878)라는 이름으로 책을 펴냈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이곳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여 성모마리아의 집으로 공식 선포를 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금굴산에 다녀와서 묘한 상상에 사로잡혔다. 금굴산에서 발견된 성경 수첩이 왜 터키의 부르부르산 성모마리아의 집까지 연상케 하였을까? 그것은 시공을 초원한 상상이다. 금굴산과 부르부르산은 어떤 인연이 있을까?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어 에페소에서 사역을 했으며, 요한복음, 요한일.이.삼서, 요한게시록을 남겼다. 그는 사랑의 사도로 예수님의 12제자 중 유일하게 십자가 형장까지 따라간 인물이다.

 

 

▲금가락지 정자에 매달린 고드름

 

 

동이리 마을에는 '동이리 교회'라는 아주 작은 교회가 하나 있다. 지난번 큰 아이 영이가 주일예배를 보러 갔을 때에 잠시 들렀던 교회이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이 성경 수첩을 들고 동이리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가 이 성경수첩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워 보아야 겠다.

 

정자에 매달린 고드름이 푸른하늘에 유난히 빛나보인다.

 

 

(2012.1.5 금굴산을 오르며)

 

*참고문헌 : 미산면 홈페이지, 연천군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