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방랑/부탄·다즐링·시킴

미팅

찰라777 2012. 4. 25. 09:33

 

인도로 가는 길-미팅

 

안개낀 동이리

 

4월 23일, 아내와 큰 아이 영이와 함께 나는 안개 낀 동이리 마을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했다. 영이는 우리가 여행을 가게 되자 지난 금요일 날 동이리 집에 와서 함께 머물다가 이곳에서 바로 직장으로 출근을 하기로 했었다. 안개가 자욱이 낀 주상절리는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멋진 풍경이다. 안개가 덮인 임진강과 적벽은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안개는 강에서 피워 올라 금굴산을 덮고 있다. 나는 다소 몽환적인 느낌을 받으며 동이리 마을을 빠져나왔다.

 

“4월과 5월에 여행을 떠나는 것은 자제를 해야겠어. 가장 바쁜 농사철인데.”

“허긴 그래요. 들판에 먹을거리가 천지인데….”

 

농사라고 해보아야 집안에 채마밭을 만들어 일구는 것이지만 섬진강에 살 때보다는 몇 배나 넓은 밭이다. 아내는 몸이 불편해서 힘든 일은 거의 하지 못하므로 밖에서 밭을 일구고 채소를 기르는 일은 거의 내가 해내야 한다. 잔디도 깎아야 하고 잡초도 제거해야 하며 집안 여기저기를 손도 보아 주어야 한다. 더구나 지금은 들과 산에 쑥과 각종 나물이 널려 있어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향기 나는 무공해 나물을 먹을 수가 있다.

 

안개 낀 37번 국도를 타다가 적성을 지나 문산으로 빠져 나가는 길로 나갔다. 금촌에 들려 어제 오늘 아침에 수확을 한 참나무버섯을 하은이 엄마에게 좀 전달해 주기 위해서였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소록도 부근 거금도에서 가져온 참나무 몇 토막에서 수확을 한 귀한 버섯이다. 아내는 작은 양이지만 우리에게 소중한 보금자리를 제공해준 우리가 손수 키운 정성을 하은이네와 나누어 먹고 싶어 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반으로 줄어든다고 했던가?

 

아내는 버섯 말고도 쑥국 거리, 현미가래떡 등 몇 가지를 바리바리 봉지에 싸 넣었다. 하은이네 집에 도착하여 전화를 하니 하은이 엄마가 반가운 모습을 하고 나왔다.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지만 오늘 일정이 너무 바쁘다. 아내는 병원에 가서 영문 진단서와 약을 받아와야 하고, 오늘 정심도 약속이 되어 있다.

 

하은이 아빠는 이번에 우리와 함께 부탄 여행을 동참하게 되어 있다. 하은이 엄마는 하은이도 돌보아 주어야 학 집안 일이 바빠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냥 선걸음으로 버섯을 전달해주고, “잘 다녀오세요.” 라는 하은이 엄마의 인사말을 뒤로 하고 하은이네 아파트를 떠났다. 우리만 여행을 가는 것 같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대문시장에서 갈치조림을 먹다

 

서울 봉천동 집에 도착하여 영이는 상가에서 사온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바로 직장으로 출근을 하고 우리는 남대문 시장으로 갔다. 남대문시장에서 월명수 보살과 점심을 하기로 되어있는데다가, 침낭도 하나 사야 사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지인 다르질링, 시킴, 부탄은 해발 2000~3000m 고도로 밤낮 기온 차이가 심해 침낭이 필수적이다. 침낭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둘째 경이가 인도여행을 하다가 잃어버려서 어차피 마련해야 한다.

 

아내는 남대문 갈치조림 집에서 월명수 보살을 만나기고 약속을 했다고 한다. 월명수 보살도 원래는 우리와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었는데, 피치 못할 사정 있어 가지 못하게 되자 점심이라도 함께 하자며 기어코 만나자고 했다는 것.

 

 

남대문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만국기가 펄럭이고, 백인, 일본인, 중국인 여행자들이 깃발을 들고 거리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남대문은 외국인들에게는 꼭 들려야 할 명소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기모노를 입은 일본여인들이 남대문 시장 거리를 활보 있는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여행을 와서까지 굳이 기모노를 입을 필요가 있을까?

 

나는 반대로 우리나라 여자 관광객들이 한복을 입고 일본 도쿄의 긴자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상상해 보았지만 전통 한복을 입고 그렇게까지 극성을 떨며 긴자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한국여성들은 없을 것 같았다. 자기 것을 고수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의 근성은 세계 어디를 가나 발견할 수 있다. 참으로 무서운 민족들이다.

 

우리는 남대문의 어두운 갈치골목 ‘희락’이라는 음식점에서 월명수 보살을 만났다. 갈치골목에는 점심을 먹으러 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우리는 붐비는 사람들 속에서 기어 고추장을 버무린 갈치조림에다가 정신없이 밥을 먹었다. 그래도 행복하군. 이렇게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점심도 사주는 사람이 있다니. 함께 자기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부탄 잘 다녀오세요.”

“고마워요. 부탄 가서 배낭에 행복을 가득 담아 올게요.”

 

남대문에서 아내는 영문진단서를 발급받기 위해 서울아산병원으로 가고, 월명수 보살은 만두를 사겠다며 그 유명한 가메골 만두집에 길게 늘어선 줄 뒤에 섰다. 아내는 병원에서 다시 인도로 가는 길로 오겠다고 했다. 여행이 그렇게도 좋을까? 아무튼 여행을 떠나기 위해 몸부림치며 준비를 하는 아내를 바라보며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아내가 힘든 일상에서 빠져 나가는 출구는 오직 여행 하나다. 집에 있을 때는 TV채널도 여행프로만 본다. 아내는 ‘걸어서 세계속으로’, ‘세계 테마기행’, ‘세상은 넓다’를 비롯해서 케이블TV채널까지 언제 어디서 무슨 여행프로그램을 하는 것까지 쭉 꿰뚫고 있다. 아내 덕분에 나도 TV를 통해 무료여행을 다니고 있지만.

 

침낭을 사다

 

 

아내와 헤어진 나는 남대문 시장 등산구점으로 가서 침낭을 둘러보다가 유명레저란 등산장비 집에서 마운틴 브랜드표가 붙은 오리털 침낭을 55,000원에 샀다. 여행용 침낭은 다 비슷비슷 했다. 침낭무게는 350g로 비교적 가벼웠다.

 

침낭을 산 뒤 카메라 점에 가서 디지털 카메라 메모리칩을 샀다. 아무래도 메모리가 부족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CF 메모리카드 Sandisk 8GB, Transend SD카드 8GB, 여분의 배터리를 추가로 구입했다. 단기여행을 가는데 외장하드까지 가지고 갈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방송용 캠코더를 들고 비디오를 찍었는데, 캠코더도 너무 오래되어서 고장이 나고, 새로 준비를 하려면 상당한 돈이 들어가야 했기에 비디오를 동영상을 찍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사실 예외 없이 다니는 여행이야 말로 진짜 여행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런 경지까지 가려면 아직은 중생살이를 즐기는 아둔한 사람이다. 동영상이 필요하면 스마트 폰으로 찍으면 된다.

 

카메라 점에서 이것저것을 구경을 해도 그래도 5시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남았다. 허참, 오랜만에 시간이 남아돌아가는 순간이다. 카메라 점을 나와 남대문 시장바닥으로 나오니 더 많은 일본인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단체여행객 중에는 기모노를 여인이 예외 없이 끼어 있었다. 남대문시장을 나온 나는 일단 ‘인도로 가는 길’ 여행사에 들려서 침낭을 맡겨 놓고 인사동을 잠시 산책한다는 것이 조계사까지 가고 말았다.

 

 

조계사는 신도들과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대웅전 앞에는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고, 나비들이 꿀을 빨아 먹고 있었다. 라일락향기가 좋았다. 나는 보랏빛 라일락을 비행하는 나비들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대웅전에 들어가 잠시 명상에 들었다. 오랜만에 들러본 법당이었다. 그러나 명상에 들기에는 밖이 너무 소란했다. 조계사 신도들이 무슨 노랑 자랑을 하는지 ‘소양강 처녀’ 등 유행가를 단체로 마구 큰소리로 불러대고 있었다. 절집분위기도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부좌를 풀고 금강경을 읽다가 시간이 되어 조계사를 나왔다.

 

여행의 고수들이 모이는 ‘인도로 가는 길’

 

 

5시 5분전에 인도로 가는 길에 도착하니 아직 아무도 와 있지 않았다. 정각 5시가 되니 정애자 선생님이 나타났고, 곧이어 청정남씨가 나타났다. 이들은 이번 여행 시 나와 함께 동참을 하기로 한 지인들이다. 아내는 병원일이 조금 늦어 반시간 후에나 오겠다고 했다. 다른 두 분이 더 왔다. 지금까지는 거의 아내와 단둘이서 배낭여행을 떠났었는데 오랜만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곧이어 40대 남자 한 분과 60대의 호리호리한 남성이 왔다. 모두가 여행의 고수처럼 보인다. 부탄여행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인도로 가는 길 부탄 팀장인 김정기씨 말로는 9명이 이번 부탄 여행에 동참을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인원이 부족하여 떠날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는데 다행히 우리 팀 4명이 등록을 하니 다른 사람들이 일정을 조정해서 우리가 가는 날짜로 합류를 한 것이다. 인도로 가는 길 여행사에서는 부탄여행은 최소한 6명 이상이 되어야 출발을 한다.

 

김 팀장은 배낭여행 자료집을 가져와 대강의 여행일정과 준비물을 설명했다. 인도로 가는 길 여행사는 패키지여행이 아니다. 한국에서 일정을 정하여 델리에 도착을 하면 인도 현지에 거주하는 ‘길잡이’(그들은 여행가이드가 아니라 꼭 길잡이라고 불렀다)가 우리를 안내하게 되어 있다. 길잡이 이의 안내에 따라 주요 여행지와 숙소를 안내해 주고 여행은 각자가 기호에 따라 자유롭게 찾아다닌다. 여행일정, 항공티켓, 숙소 등만 해결해주고, 먹고, 구경하는 것은 여행자들이 선택하는 것이다. 호텔팩에서 한 단계 진전한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이런 여행 스타일은 주로 오지 여행길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번 우리 팀을 안내하는 길잡이는 ‘소냐’는 인도 등 동남아시아 오지를 7년 이상 여행을 한 베테랑이라고 했다. 그녀는 델리에 묵고 있다고 한다. 소냐! 이름이 참 좋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소냐와 같은 이름이어서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델리에 가서 만나보면 알겠지. 하여간 느낌은 좋다.

 

인도로 가는 길에서는 배낭여행에 필요한 복대, 배낭커버, 배낭여행 자료집, 목보호대를 선물로 주었다. 물론 다 주는 게 아니라 이 중 하나만 선택을 하고 필요하면 돈을 주고 구입을 하면 된다. 다른 여행사와는 뭔가 차별화를 시도 하고 있는 여행사이다.

 

 

 

1998년에 선장(그들은 사장을 선장이라고 부른다) 정동주에 의해서 설립된 인도로 가는 길은 임직원의 구성도 독특하다. 선장 정동주는 노트북을 팔아 마련한 돈 100만원을 들고 무작정 해외를 떠돌아다니다가 6년 동안 전 세계 6대륙을 섭렵하고 돌아온 ‘세계일주 무전여행’ 국내 제1호(자칭)이락 한다. 그는 돈이 떨어지면 무작정 현지에서 일거리를 찾아 공사장 인부, 레스토랑 종업원, 접시 닦기, 이삿짐센터일꾼, 빌딩 유리창청소, 아파트 계단청소……를 하며 여행을 계속했다고 한다. 여행 6년, 인도 체류 3년 9년의 방랑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귀국하여 ‘인도로 가는 길’을 설립 배낭 여행자를 위한 여행 길잡이를 하고 있다.

 

 

 

 

종업원들도 모두 5년 내외의 배낭여행 경력을 가진 베테랑들로 구성되어 있고, 인도 델리에 인도 현지인으로 구성된 지사가 있다. 10년 넘게 배낭여행을 해온 나로서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한다. 또한 이런 여행사가 있다는 것이 앞으로 여행문화를 선도해 가는 선구자들이 될 것이다.

 

인도로 가는 길의 특징은 쇼핑과 팁이 일체 없다는 것이다. 여행 중에 쇼핑센터에 풀어 놓고, 팁을 달라고 징징대고 하면 정말 여행 기분이 잡치고 만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쇼핑을 하는데 해외로 길잡이를 하러 온 거나 다름없다. 앞으로 우리나라 패키지여행도 이런 여행은 지향해야 한다.

 

아무튼, 전에는 내 스스로 손수 비자를 받고, 여행 스케줄, 항공권, 숙소를 인터넷을 예약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인도로 가는 길을 통해 수월하게 여행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4월 26일 인천공항 K카운터에서 11시 30분에 만나기로 하고 인도로 가는 길을 나왔다. 다른 두 분을 먼저 떠났고, 정 선생과 청정남씨 그리고 아내와 나중에 합류하여 인사동 한과채라는 채식 뷔페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정년퇴임을 하고 여행에 올인을 하고 있는 정 선생님, 바쁜 사업 중에도 제법 긴 시간을 쪼개어 우리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용기 있는 중년의 청정남 사업가와 함께 담소를 나누며 느긋한 저녁식사를 하고 8시에 인사동을 떠났다.

 

501번 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너오는데 여의도에 불빛이 명멸하고 있다. 서울의 한강은 아무리 보아도 아름답다. 아내는 집에 가서 할 일 많다고 했다. 연천에서 캐온 쑥을 삶아야 하고, 여행가방도 챙겨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