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임진강일기

고구마를 심으며...

찰라777 2012. 5. 21. 09:17

고구마를 심으며…

 

▲무공해 고구마를 심는 친구의 마음은 정성으로 가득차 있다.

 

 

여행에서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니 도대체 컴 앞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군요. 채마밭에 잡초를 뽑고, 모종을 하고, 귀여운 녀석들을 돌보아야 하니 말입니다. 아무리 작은 농사라도 때를 놓치면 아니 되기 때문이지요.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느라 바쁩니다. 물을 주면 녀석들이 미소를 짓고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아, 어린 싹들이 얼마나 귀여운지…

 

 

그나마 녀석들이 저렇게 싱그럽게 살아 있는 것은 내 친구 응규 덕분입니다. 그는 내가 없는 사이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소요산역까지 와서 다시 버스를 타고 전곡으로, 그리고 또 다시 버스를 타고 동이리로 와서는 이곳 금가락지까지 걸어서 왔다고 합니다.

 

 

 

 

서울 상도동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4~5시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그것은 버스 시간이 띄엄띄엄 있는데다가 시간을 잘 못 맞혀 버스를 한번 놓치면 1시간 정도 서서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운전을 하지 않는 그는 그런 불편을 감수하고서도 두 번이나 이곳 금가락지에 와서 나 대신 채마밭에 물을 주고 녀석들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내 친구 응규는 정말이지 고구마 같은 친구입니다. 그는 언제나 변함이 없으며, 욕심이 없고, 남을 도우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구마는 전혀 농약을 뿌리지 않아도 잘 자라나는 식물입니다. 추운 겨울에 싱싱하게 자라는 보리와 함께 고구마는 무공해 식품의 대명사이지요. 그는 마치 무공해 고구마 같은 순도 100%의 해맑은 친구입니다.

 

 

오늘은 그런 응규와 함께 고구마를 심느라고 바빴습니다. 아랫집 연희 할머니와 전곡까지 가서 호박고구마, 복수박, 단호박, 토마토 등 모종을 더 사왔습니다. 그리고 응규와 함께 채마밭을 일구어 로타리를 치고 모종을 했습니다.

 

 

▲복수박

 

 

순만 잘라서 심는 고구마가 살아날까 반신반의 하면서도 모래흙에 퇴비를 섞어서 비닐을 씌우고 고구마를 정성스럽게 심었습니다. 볼품없이 축 쳐지는 고구마가 잘 살아날지는 모르겠지만 고구마를 심고 물을 주는 마음은 어느덧 행복한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호박, 고추, 감자, 강낭콩, 줄콩, 땅콩, 상치, 부추, 오이, 가지, 쑥갓, 토마토, 옥수수 등 열 가지도 넘게 심어 놓은 채마밭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성해집니다.

 

 

내 친구 응규의 도움이 없으면 혼자서는 하기 어려운 일들입니다. 쑥과 잡초로 헝클어진 땅을 쇠스랑으로 파헤쳐 밭을 일구고 퇴비를 듬뿍 뿌려서 우리는 채마밭을 일구었습니다. 이장님 댁에 가서 퇴비를 처음에는 30포대를 사왔으나 모자라서 20포대를 더 가져 왔는데 50포대의 퇴비가 어디로 들어 간줄 모르게 다 써버렸습니다. 작은 채마밭을 일구는데 퇴비를 50포대나 가져가는 나를 보고 이장님이 한마디 하였습니다.

 

 

▲물을 머금은 고구마 순

 

 

“아니 손바닥만 한 채마밭에 뭐를 심기에 그렇게 많이 퇴비를 가져가지요?”

“감자도 심고 고구마도 심으려고요. 족구장으로 쓰던 밭이 전부 모래라서요.”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퇴비를 많이 하면 고구마와 감자가 아이들 머리통 마나 커지고 말 텐데요. 하하.”

“하하하, 그럴지도 모르지요.”

 

 

울다가도 "응규야 밭에 가자" 울음을 그쳤다는 아이

 

그래도 척박한 땅에 첫해 농사를 퇴비를 듬뿍 주어야 한다는 것이 응규의 지론이었습니다. 나는 응규의 말을 따랐습니다. 내 친구 응규는 시골에서 부농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워낙에 부지런하여서 농사를 하도 잘 지어 매년 농토를 늘려갔던 분입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응규는 농사를 짓는 일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마를 심는 정성스럽게 내 친구 응규

 

 

부잣집 외아들이라면 흔히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놀고먹는 아이로 성장을 하게 마련인데 응규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적에 울다가도 “응규야 밭에 가자” 하면 울음을 뚝 그치고 헤헤 웃으면서 밭이나 논으로 따라가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는 것을 좋아 했습니다.

 

 

외아들인 응규를 공부를 시키기 위해 교통이 좋은 곳에 집을 사 줄 정도로 부모님은 향학열이 대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정작 공부보다는 흙을 밟고 농사를 짓는 것을 더 좋아 했습니다. 부모님이 대학을 가라고 해도 “나는 농사일이 더 좋아요” 하면서 대학 가기를 포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물론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두뇌가 아주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여동생이 이화여자대학교를 합격을 하여 대학을 가게 되자 어느날 그의 아버님이 그를 불러 놓고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외아들인 너도 대학을 가지 않았는데, 딸인 동생을 서울로 대학을 꼭 보내야 하겠느냐?”

“아버지 걱정 하지 말고 동생을 대학에 보내십시오. 저는 농사일이 좋아서 대학을 가지 않을 뿐이니까요.”

 

 

그 말을 들은 그의 아버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딸을 대학에 보냈다고 합니다. 응규는 그 뒤로도 대학에 입학을 하지 않고 농사일을 돌보았습니다. 그는 농사가 취미이고 농사일을 너무도 잘 합니다.

 

 

그런 그가 어찌어찌 하다 보니 시골을 떠나 서울에 살게 되었는데 아직도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그의 아내는 농촌으로 돌아가는 것을 극구 반대하여서 아직 귀농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고구마 같은 고향 친구들

 

 

▲곁에 있어도 그리운 고구마 같은 고향친구들

 

 

나는 요즈음 나의 죽마고우인 응규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그는 나와 같은 중고등학교를 나온 친구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기차를 타고 시골에서 목포로 기차통학을 했던 사이입니다. 당시 기차통학을 하면서 우연히 알게 된 친구들이 몇 명 있습니다. 문태중학교와 광주일고를 다녔던 S, 목포고등학교를 다녔던 L, 목포상업고등학교를 다녔던 H, T, K 등 8명의 친구들이 우연히 만나 모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가난하지만 수재라고 할 정도로 명석한 두뇌를 가진 친구들입니다. 이 친구들 중에서 응규내가 가장 부자여서 우리는 늘 일로역에 있는 응규내 집에 모여 쌀밥을 얻어먹기도 하며, 우리들의 미래를 밤새워 이야기하기도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응규내 집은 우리들의 사랑방 같은 집이었습니다.

 

 

1968년 우리는 어머니를 위한 ‘모(母)자(子)회(會)’란 모임을 결성하고 우리를 낳아서 길러주시고 가르쳐 주신 어머님들을 기쁘게 해드리는 모임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그때가 어제일 같은데 벌써 40년도 넘게 세월이 훌쩍 흘러 버렸군요. 그 사이에 우리들의 어머님들은 한분 두 분 세상을 떠나시고 지금은 두 분의 어머님만 살아 계십니다. 이 친구들은 1년에 한 번 만나도 언제나 만나 있는 것 같고, 곁에 있어도 항상 그리운 친구들입니다. 정말 고구마 같은 순도 백의 친구들이지요.

 

 

▲부추밭

 

 

5월 19일에는 응규와 S, 이렇게 셋이서 동이리 금가락지에 보내며 고추와 토마토, 오이에 지주대를 새우고, 마당에 잔디를 깎았습니다. 아랫집 현희 할머니네 집에서 상추와 부추, 쑥갓 모종을 얻어와 추가로 채마밭에 심었습니다. 잡초를 뽑아주고 물을 아침저녁으로 주고 나니 채소들이 훨씬 싱그러워졌습니다.

 

 

▲뒷곁에서 잘라온 지주대

 

▲지주대를 세운 고추, 토마토

 

 

잡초만 무성했던 채마밭에 채소들이 싱그럽게 자라나니 갑자기 집안 전체에 생기가 도는 것 같습니다. 축 쳐져 있던 고구마 순도 고개를 쳐들고 있습니다. 함초롬히 물을 머금고 햇빛에 반짝이며 춤을 추는 녀석들을 바라보노라면 저절로 비시시 웃음이 나옵니다. 블루베리가 연한 보랏빛을 띄우며 익어가고 있습니다.

 

 

“녀석들은 행복을 전파하는 행복 바이러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