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우리강산/강원도

시대의 대선사 탄허스님이 그립다!

찰라777 2017. 8. 3. 12:42

 

 


시대의 대선사 탄허스님이 그립다!


17세에 성혼

22세에 출가

함석헌 선생, 양주동 박사도 

탄허스님 장자 강의 들어

석학 양주동은 탄허스님께 오체투지로 절까지...


방한암스님 스승으로 월정사에서 삭발

새벽 2시가 되면 어김없이 참선하고 경전읽어

참선과 경정독송

입적 전 49년 간 한결 같아...


화엄경 원문 10조 9만 5천48자 전 80권 집필

주역과 예지능력 뛰어나

2000년대 이후 한국이 세계사 주역으로 

우뚝 서게 될 것이라고 예언


"대변혁 시기에는 정치가의 역할이 막중하다"

"정치인은 나라의 어른이 아니라 심부름꾼이다"

"대통령도 세워진 기강에 따라 철학을 제공하는 사람이다"

"정치가 국민의 의사를 묵살하고 권력쟁취에 휘말려 싸우는 것은 

귀신 혓바닥 장난보다 못한 짓이다" 


 

나는 성스러운 붓다의 사리가 보존된 팔각구층석탑을 우러러 참배하고, 적광전으로 들어갔다. 적광전(寂光殿)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이다.  비로자나불은 석가의 진신(眞身)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석가의 진신은 곧 진리를 말한다. 비로자나불은 산스크리트어로 '태양'이라는 뜻이다. 태양은 '빛'이다. 그러므로 적광전은 '빛'의 부처님을 모신 법당이다. 성경에도 창세기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란 구절이 있듯이 빛은 그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의 등불이다.

 

 

 

탄허스님께서 휘갈겨 쓴 '적광전(寂光殿)'이란 편액이 빛처럼 번뜩인다. 적광전의 외부 기둥 16개는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소나무로 세웠고, 2개는 괴목이며, 내부 기둥 10개는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전나무로 만들었다. 1930년대의 조선고적도보에 의하면 과거7불을 모신 칠불보전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6.25 전쟁 때 아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1968년에 만화스님이 주지로 계실 때 다시 중건되었다고 한다. 찰불보전이 아군에 의해 소실되었다니 더욱 아쉬운 마음이 든다 

 

 

 

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것이 통례이다. 그런데 월정사 적광전은 그 통례를 깨고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다. 원래 현판은 <대웅전>이었다고 하는데, 1950년 탄허스님이 오대산수도원을 기념하기 위해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다는 의미로 현판을 <적광전>으로 고쳐 달았다.

 

나는 적광전에 엎디어 삼배를 하고 잠시 입정에 들었다. 경내는 바람소리 풍경소리만 들릴 뿐 고요하다. 그 순간의 시간에 깜박 졸다 기둥에 머리를 부딪친 나는 깜짝 놀라 깨어났다. 어리석은 중생은 이렇게 멍 때리며 졸기나 하는 구나. 나는 다시 부처님께 삼배를 하고 뒷걸음으로 법당을 물러나왔다.

 

 

자장율사 진영을 모신 개산조각

 

적광전을 돌아서 자장율사를 모신 <개산조각>과 월정사 고승대덕을 무신 <진영각>을 참배했다. 개산조각은 월정사를 창건한 자장율사의 진영을 모신 곳이다. 오직했으면 신라시대 아이들이 울면 그 시대의 어머니들은 자장자장 우리아기 잘도 잔다하며 달랬을까? 어머니들은 자신의 아들이 자장율사처럼 총명한 아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진영각에는 한암스님, 탄허스님, 지암스님, 만화스님의 진영을 모시고 있다. 오대산 문수성지를 지켜 오신 현대의 대덕고승들을 진영으로나마 친견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다행이다. 이 어리석은 중생이 상을 쫓는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이 대덕스님들 중에서 우리 시대를 함께 살아가셨던 나는 탄허스님을 잊을 수 없다.

 

 

양주동박사도 오체투지 절을 했다는 탄허스님

 

전북 김제에서 출생한 탄허스님은 17세의 성혼을 하여 이미 아들까지 두고 있는 상황에서 22세에 입산을 했으니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를 한 나이보다 12년 빨리 출가를 한 셈이다. 그는 20세까지 유학을 공부하다가 다시 3년을 도교에 심취하여 노장 철학의 대가로 꼽힐 정도였다. 해방후 함석헌과 양주동은 탄허스님으로부터 장자 강의를 들었다고 하는데, 석학 양주동은 1주일간 장자 강의를 듣고 탄허스님에게 오체투지로 절까지 하였다고 한다. 양주동은 탄허를 가리켜 장자가 다시 돌아와 자기 책을 설해도 오대산 탄허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며 탄허의 학문적 깊이에 탄복을 했다고 한다.

 

탄허스님에 대한 일화 한 가지를 더 소개한다. 출가 전 금택은 책이 없어 주역(周易) 공부하지 못하다가 처가에서 소를 팔아 주역을 사주자, 집에 돌아오지 않아 글방을 방문해 보니 그는 흡사 미친 듯 춤을 추며 큰소리로 책을 읽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처자불고(妻子不顧) 가사불고(家事不顧)를 하지 않겠느냐고 포기했다고 한다. 탄허스님은 당시 주역을 손에 들고 500()을 하였다고 전한다. (탄허 대종사 연보 3233, 17세의 일화 중에서 참조)

 

 

출가 전 탄허스님은 인생에 대한 문제를 풀고자 평생의 스승을 찾아 동서남북으로 구도의 편지를 띄우던 중, 오대산 상원사에 주석하고 계시던 한암 스님과 인연을 맺게 된다. 첫 답장이 오고 가고 다시 편지 왕래를 하기 3, 갓 쓰고 도포 입은 유생 금택(속명)짧으면 3, 길면 10을 기약하고 오대산을 찾아들었으나, 한암스님의 인품에 매료되어 이것이 영영 출가의 길이 되고 말았다. 그는 한암스님에게 승려가 되겠다고 하자 선사는 삭발을 하면서 제자에게 삼킬 ()’ ()’, 탄허(呑虛)라는 법명을 하사했다.

 

그때부터(1934, 22) 탄허는 새벽 2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참선을 하고, 경전을 읽었다고 한다. 그의 참선과 경전 독송은 입적하기 전까지 49년간 한결 같았다고 한다.

 

특히 탄허 스님은 방대하고도 난해한 화엄경’ 80권을 처음으로 우리말로 풀었다. 손 원고지 하루 100장씩 10여 년간 작업을 거쳐 23권 분량으로 펴낸 대작이 신화엄경합론이다.

 

한암 스님은 생전에 화엄경론의 집필을 기구했었는데, 수제자 탄허 스님의 10년에 걸친 대불사도 그의 유촉에 의한 것이다. 1961, 그 유촉을 받들어 방대한 규모의 화엄합론 번역을 시작했다. 화엄경 집필을 발원한 지 10년만인 1971년 봄, 원문 109548자에 달하는 화엄경80권 집필을 마쳤다.

 

또한 가장 현실적이며 직법적인 예언으로 유명한 탄허는 여러 경로를 통해 인류와 지구의 미래에 관해 언급하고 무엇보다도 주역의 원리에 의거해서 세계열강들의 관계와 미래상을 예측하였으며 변화될 세계상으로 자연재해와 핵으로 인해 전 세계가 70% 정도의 타격을 입을 때 한국도 피해를 보나 한국이 세계사의 주역으로서 우뚝 서게 될 것임을 주장하였다.

 

 

▲탄허스님의 스승이신 방한암 큰스님

 

 

나는 탄허스님 법어집 중 <부처님이 계신다면>(1980. 02. 01 출간, 교림)이란 법어집을 구하여 오랫동안 소장하면 여러 차례 읽고 있다. 이 책에는 유가, 도가, 불가에 모두 달통하신 우리시대의 대강백이자 대선사이신 탄허큰스님의 명쾌한 학술과 광활한 지혜, 그리고 예언들이 집약시켜져 실려 있다.

 

 

탄허 스님은 독특한 예측력으로도 화제가 됐었다. 그는 강원도 오대산 중대사자암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1949년 법당 뜰에 개미 수백 마리가 떼로 죽어 있는 것을 봤다. 자기들끼리 싸움을 한 결과였다. 스님은 이를 보고 난()을 예감, 짐을 챙겨 사흘 만에 경남 양산 지산리의 통도사 백련암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듬해 6·25가 터졌다.

 

 

 

 

강원도 울진·삼척에 북한의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했던 1968년에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 당시 스님은 오대산 월정사에서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을 번역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랴부랴 짐을 싸라고 하더니 장서(藏書)와 번역 원고들을 모두 삼척 영은사로 옮겼다. 사람들이 대체 웬일인가 하며 웅성거렸다.

 

원고를 모두 옮긴 지 15일 뒤인 그해 11월 울진과 삼척에 무장공비가 침입했다. 진압작전에 흩어진 공비들은 오대산 일대로 도망쳤는데 이를 소탕하기 위한 군단 사령부가 하필 월정사에 설치됐다. 삼척 영은사에서 한 달가량 머물던 스님이 돌아와 보니 월정사는 암자 주변에 온통 참호가 파인 채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스님이 원고를 삼척으로 옮겨 놓지 않았더라면 신화엄경합론번역은 빛을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탄허 스님은 대변혁의 시기에는 정치가의 역할이 막중하다고 했다. “그들의 손에 우리나라의 흥망성쇠가 달려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흔히 정치인이 되면 세상 전부를 얻은 양 호령하는데 정치인은 나라의 어른이 아니라 심부름꾼이라며,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대통령은 세워진 기강에 따라 철학을 제공하는 사람이며, 그 호령은 각계 지도자, 가정의 부모가 해야 한다고 했다. “정치가 국민의 의사를 묵살하고 권력쟁취에 휘말려 싸우는 것은 귀신 혓바닥 장난보다 못한 짓이라며 정치의 본질은 그렇게 더러운 곳에 있지 않다는 말도 남겼다.

 

 

 

 

그는 대한민국의 앞날에 대해 이런 말도 했다. “모두들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이 고통은 산고의 고통이다. ‘주역에 보면 한국은 간방(艮方)이다. ()은 갓난아기요, 결실을 의미한다. 바로 어머니가 아기를 낳을 때의 진통이다.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어야 아기를 낳듯이 우리나라 1980년대 이전은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는 때다. 그러나 이것은 희망찬 아픔이다. 가까이서 지켜보면 한심스럽고 어수선하고 머리가 아플 지경이지만 큰 안목으로 지켜보면 희망찬 미래를 엿볼 수 있다. 이 고통이 지나면 우리의 숙원이던 남북통일의 서광도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주간조선 참조)

 

 

 

 

탄허 스님이 입적한 때는 1983년으로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方山窟)에서였다. 세수(世壽) 70, 법랍(法臘) 49.

 

올해는 탄허스님이 탄생하신지 104년이 되는 해다. 국가가 어지러운 시국에 이런 선각자가 계신다면 어떤 말을 토해 내셨을까? 탄허스님이 그립다. 나는 탄허스님 영정을 향하여 3배를 하고 어스름한 땅거미가 깔리는 선재길 숲속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