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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선교장이야기 ②]족제비가 점지해준 천하명당

찰라777 2017. 8. 12. 06:14

족제비가 점지해준 천하명당

 

선교장에 도착하여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역시 활래정 연못 주변에 화사하게 피어있는 배롱나무 꽃이다. 붉은 배롱나무 꽃은 선교장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푸른 노송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아름다운 자태를 유감없이 뽐내고 있다. 마치 붉은 연지를 찍듯 피어있는 배롱나무 꽃은 요염하기까지 하다. 더욱이 활래정을 가득 채운 푸른 연잎에서 터져 나오는 연꽃과 어울려 여름 선교장의 모습을 더욱 환상적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뷰티풀!”

 

 

 

 

선교장은 전주 이씨가(李氏家) 효령대군(1396~1486, 태종 이방언의 둘째아들) 11세손인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 1703~1781)이 처음 자리를 잡은 조선시대 양반 고택이다. 무경은 충주에 살다가 강릉으로 옮겨와 저동(苧洞:경포대 주변)에 살았는데, 가산이 일기시작하자 좀 더 너른 터를 찾아다니던 중 지금의 터를 발견했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어느 날 무경의 집 앞에 족제비 몇 마리가 나타나더니 나중엔 한 떼를 이루어 서서히 서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신기하게 여긴 무경은 그 뒤를 좇았다. 족제비들은 서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어느 야산의 울창한 송림 속으로 사라더니 그 많던 족제비 무리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신기한 생각에 한동안 망연히 서 있던 그는 정신을 가다듬어 주위를 살피고는 이곳이야말로 하늘이 내리신 명당이라고 무릎을 탁 쳤다.

 

 

 

 

무경이 전후좌우로 지세를 자세히 살펴보니 시루봉에서 뻗어 내린 낮은 산줄기와 송림이 평온하게 둘러쳐져 바람을 막고, 남으로 향해 서면 어깨와도 같은 부드러운 곡선이 좌우로 뻗어있었다. 왼쪽으로는 살아 있는 용의 형상으로 재화가 증식할 만하고, 오른쪽으로는 약진하려는 듯 내달린 언덕이 자손의 번창을 보여주고 있었다. 앞으로는 얕은 내가 흐르고, 그 바른편에는 안산과 조산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천하의 명당 터였다(이기서 저, 강릉 선교장 참조).

 

하늘이 족제비를 통하여 이렇게 훌륭한 터를 이씨가에 내린 것이라고 믿은 무경은 그 해에 지금의 선교장으로 터를 잡고 이사를 하였다. 동물들은 인간보다 본능과 감각이 뛰어나다. 그러므로 동물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자는 장소는 명당 터가 많다. 족제비에 대한 이야기가 전승되어 오면서 최근까지 이씨가에서는 족제비를 영물로 보호하면서 뒷산에다가 족제비의 먹이를 가져다 놓은 풍습이 전해 오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택

 

선교장의 터는 율곡 이이(李珥)가 탄생한 오죽헌으로부터 1.5km, 허균(許筠, 1569~1618)이 나서 자란 초당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2km 떨어져 있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때 배를 타고 건너 다녔다 하여 '배다리(船橋里:선교리)'라는 이름을 가진 곳인데, 이 이름에서 비롯한 선교장은 지금은 논으로 변했지만 1981년까지만 해도 경포호였던 호수로 배를 타고 드나들었다고 한다.

 

 

 

무경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이씨가의 가세가 크게 번창하였다. 이씨가의 중흥기는 무경의 아들 자영(子榮) 이시춘(李時春, 1736~1785)과 손자 오은(鰲隱) 이후(李垕, 1773~1832) 때였다. 주위에서는 좋은 터를 잡은 덕분이라고 했다. 영동은 물론 강원도 일대의 상당 부분이 이씨가의 소유여서 '만석꾼'이란 칭호를 들었다. 당시 농사지을 만한 평야가 좁고 척박한 이곳에서 '만석꾼'이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만석꾼의 토지를 소유한 선교장은 당시 지역을 나누어 주문진 북쪽에서 생산되는 수확은 북촌에서 저장했고, 강릉 남쪽으로부터 들어오는 수확은 남촌에서 저장토록 했다. 다만 정동(경포면 일대)을 중심으로 한 강릉 지역에서 생산되는 수확만을 본가에서 수납 저장했다.

 

당시 선교장의 소유 토지가 얼마나 넓던지 동대문에서 강릉까지 갈 때 남의 땅을 밟지 안고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선교장 소유의 토지는 북으로는 양양, 남으로는 삼척, 동으로는 동해 바닷가까지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대관령을 넘어 평창까지 이어져 추수를 했다고 한다.

 

 

 

무경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선교장은 여러 대에 걸쳐 많은 집들이 지어졌다. 선교장은 대지 3만평의 규모에 건물들이 '한일()'자 형태로 중세의 한옥 고성처럼 길게 늘어서 있다. 대문이 달린 행랑채와 안채, 사랑채,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외별당, 사당과 정자까지 갖춘 완벽한 99칸짜리 조선 사대부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큰 대문을 비롯한 열 두 대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지난 300여 년 동안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민간주택으로는 처음으로 국가지정 문화재(국가 중요민속문화자료 제5, 1965년 지정)로 지정되어있다.

 

 

 

 

몇 백 년 된 푸른 노송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붉은 배롱나무 꽃과 연꽃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선교장은 한국인들이 가장 선망하는 명당이다. 이 분야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선교장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