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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1]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기차

찰라777 2005. 2. 24. 09:00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기차
 
우리는 헬싱키 역에서 러시아로 가는 기차를 탔다. 객실로 들어가는 난간 앞에는 북한군 모자를 쓴 역무원들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무거운 배낭을 멘 우리들의 위아래를 훑어보고 있다. 그는 우리들의 여권과 승차권을 회수해 간다.

 

“아니, 왜 여권까지 가져가지?”

 

뭔가 모를 한 가닥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내가 주춤하며 그를 쳐다보자 빨리 오르라고 탁을 들어 입구 쪽을 가리킨다. 객실에 오르니 쾨쾨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에르미타즈 광장]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러시아 기차. 6인석으로 되어있는 객실은 육중한 철문으로 되어있다. 객실로 들어가 철문을 닫으니 철커덕! 하며 철문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다. 마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도입부의 육중한 피아노 소리처럼…

 

철문에는 감옥에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잠금 고리가 위협적으로 달려 있다. 문을 열고 닫기가 보통 무거운 것이 아니다. 바닥에 깔린 카펫에서는 두엄이 썩는 듯한 냄새가 진동한다. 밀폐된 공간, 

 

“정말 숨이 막혀 버릴 것만 같군요.”

 

- 러시아 객실 기차의 문

 

 

아내는 코를 손으로 쥐며 질색을 한다. 석양노을이 지는 헬싱키를 뒤로하고 드디어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다. 끝없는 자작나무 숲은 마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도입부의 둔탁한 피아노에 소리에 이어지는 부드러운 현의 소리처럼 아름답다.

 

역무원이 여권과 승차권을 가더니, 곧 다시 군복을 입은 여자경찰이 여권을 회수해 간다. 한 참 있다가 여자경찰이 여권을 주고 가더니 이젠 남자 사복경찰이 여권을 다시 검사한다. 아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할 때까지 10번도 더 여권을 검사했으리라! 검사, 검사, 검사…

 

 

 


- 영화 '밀회'의 한 장면

 

 

[밀회]와 [라흐마니노프]

 

그러나 자작나무 숲을 덜커덕거리며 달려가는 기차의 매듭소리는 영화 [밀회 No Shoeing]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숨이 막힐 듯한 공간에서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는 아내는 마치 밀회의 주인공 ‘로라’ 같은 생각이 들고, 나는 알렉스와 존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 앞에는 수다쟁이 아줌마 대신 러시아의 과묵한 신사와 역시 말이 없는 여인이 앉아 있지만…

 

 

예술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기차에 앉아 나는 왜 자꾸만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에 젖어들고 있을까? 광활한 러시아의 평원,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끝없는 설원,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 톨스토이와 또스또예프스키… 잘 알지도 모르면서 이런 일련의 러시아 문학과 음악이 희미하게나마 차창에 스치고 지나가고 있다.

 

기차를 타면서부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딱딱한 석고상처럼 굳어 보이고, 비밀스런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듯한 이 칙칙한 느낌. 기차의 레일소리조차 ‘크렘린 궁전의 종소리’처럼 들려온다.

 

그래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에 나오는 무겁고 긴장된 피아노 소리를 사람들은 ‘크렘린 궁전의 종소리’라고 했을까? 그 무거운 분위기 속에 잠이 들 듯 말 듯 뒤척이다가 밤을 새고 있는데, 예의 북한군 복장을 한 승무원이 다 왔으니 내리라고 한다.

 

역에서 내리니 아직 채 날이 새기 전 새벽하늘이다. 우리는 네바 강을 따라 조용히 잠들어 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새벽길을 달려 숙소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