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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공원]가을을 기다리는 늙은 해바라기

찰라777 2008. 8. 29. 12:28

가을을 기다리는 늙은 해바라기

 

 

 

 

이른 아침 서울 도심에 있는 올림픽 공원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해바라기 밭을 발견하였습니다. 해바라기는 한 결 같이 일제히 아침 해를 향하여 약속이라도 한 듯 도열해 있습니다. 마치 해바라기의 요정 '클리티에'가 되살아 난 듯 일편단심 사랑하는 아폴론(해)을 향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앞에는 벼이삭이 고개를 숙이며 결실의 가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해바라기와 벼 밭 사이로 난 길은 마치 푸른 잔디와 파란 하늘로 이어지는 희망의 길처럼 보입니다. 멀리 언덕 뒤에 솟아있는 회색의 빌딩도 오늘따라 밉게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해바라기 밭과 벼 밭 사이로 난 희망의 길을 걸어갑니다. 푸른 잔디와 어울려 싱싱한 젊음을 유지한 채 힘차게 솟아나오며 피어오르는 해바라기가 있습니다. 옹골차게 다부진 입술이 갓 피어오르는 소녀처럼 보입니다. 아직 꽃을 피우지는 않았지만 아침 해를 향해 동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치 해바라기의 요정 '클리티에'가 부활을 한 듯한 모습입니다. 아폴론(해)을 죽도록 사랑하다가 다리는 뿌리가 되고 얼굴은 꽃이 되었다는 '클리티에'의 모습 그대로 오직 해를 향한 그리움으로 다시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먼저 피어난 해바라기들이 푸른 하늘을 향해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푸른 하늘은 가을을 미리 보는 듯합니다. 그래서 해바라기는 가을을 부르는 전령사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해바라기 꽃 저편 언덕에는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다정희 손을 잡고 언덕을 산책하고 있습니다. 해바라기의 해맑은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 근심걱정이 다 사라지는 듯합니다. 해바라기처럼 꾸밈없이 언제나 활짝 웃는 그런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영글어 가는 벼 밭 옆에는 부부 해바라기처럼 보이는 두 송이의 해바라기가 이마에 구슬땀을 흘리며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여름내 벼를 정성스럽게 키워온 농부처럼 소박하게 보입니다. 수고로움으로 일그러진 머리칼(꽃잎), 햇볕에 그을린 두툼하고 둥그런 얼굴에는 주름이 져 가고 있지만 가을 수확을 기다리는 기쁨의 미소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 자태가 자못 성스럽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해바라기 밭에서 나는 우연히 일곱송이의 해바라기를 발견합니다. 크고 작은 일곱 송이의 해바라기는 마치 한 가족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이 해바라기는 바라보면서 나는 문득 해바라기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14송이의 해바라기(정확히는 15송이라고 함)를 떠올립니다. 불멸의 화가 고흐는 평생 동안 해바라기를 그렸습니다. 해바라기 꽃은 그에게 '기쁨'과 '희망'의 상징이었습니다. 노란색 하모니가 울려 퍼지는 교향곡이었습니다. 고흐가 말했듯이 앞의 일곱 송이는 고흐를 향하여 기쁨의 웃음을, 다른 일곱 송이는 사방으로 손을 뻗치고 얼굴을 흔들며 흥에 겨워 춤추는 듯합니다. 녹색의 잎사귀들은 춤 장단을 맞추는 북 치는 사람의 손가락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14송이의 해바라기

 

 

 

 "노란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라오..... 올 여름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나로서는 스스로를 좀 속일 필요가 있었다오." 고흐는 찬란한 노란색을 얻기 위해 여름 내내 취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모든 것이 더욱 빛나도록 뒷배경을 노란색의 환희, 태양의 축복으로 그렸습니다. 이 해바라기는 고흐가 세상을 뜬지 134년 후인 1987년에 런던에서 3,990만 달러라는 거액으로 경매되어 팔려 나갔지만 정작 고흐는 생전에 단 한 푼의 돈도 만져보지 못했으니 세상은 참으로 묘합니다. 명성과 돈을 다 함께 주지 않고 있으니 말입니다.

 

 

 

 

 

해바라기의 손짓에 이끌려 나는 그 희망의 길사이로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며 해바라기 한 송이 한 송이를 음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나는 꽃잎이 다 떨어지고 속살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늙은 해바라기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늙은 해바라기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신의 속살을 다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봄에 싹을 티어 세상에 솟아나와 꽃을 피우고 열심히 해를 따라다니다가 암술머리에 씨방을 만들고, 그 암술머리가 벗겨진 자리에 해바라기 씨가 영글어 가고 있습니다. 그는 수확의 가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가을이 오면 황혼을 맞이할 해바라기는 이 세상에 해바라기 씨를 퍼트려 놓고 생을 마감하겠지요. 그러나 이 늙은 해바라기 속에는 영원히 죽지않는 영혼이 깃듯어 있는 듯합니다. 참으로 위대한 탄생과 죽음을 보여주는 식물의 세계입니다.

 

 

 

 

해바라기 밭 앞에 펼쳐진 벼 밭 한 가운데는 허수아비 한 분이 허허롭게 서 있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해 버린 듯 웃고 있습니다. 그는 참새가 날아와도 좇아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해바라기가 오직 해를 향해 웃고 있다면 허수아비는 세상을 향해, 허공과 우주를 향해 웃고 있는 듯합니다. 도를 이룬 경지가 그런 모습일가요? 허수아비처럼 모든 것을 비워버린 경지 그 자리, 그곳이 바로 도를 이룬 경지일까요?

 

 

(서울 올림픽공원을 산책하며 글/사진 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