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벽송사의 도인송과 미인송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도인이 된다?
▲벽송사 뒤편에 미인의 다리처럼 시원하고 미끈하게 뻗어 있는 미인송
사암정사에서 걸어 나와 왼쪽으로 500여 미터를 올라가니 한국선불교 최고의 종가라는 벽송사가 그림처럼 다가온다. 그 가람 뒤로는 거대한 소나무 두 그루가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채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벽송사 가람은 소나무를 뒤로하고 봉황의 깃털 같은 대나무 숲 보금자리에 주리를 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고의 수려한 풍광 속에 자리한 벽송사는 지리산 천봉만학(千峰萬壑)을 앞뒤로 하고 부용(芙蓉:연꽃)이 활짝 핀 것과 같은 부용만개(芙蓉滿開), 푸른 학이 알을 품고 있다는 뜻의 청학포란(靑鶴抱卵)의 형국에 자리하고 있다.
"예사로운 자리가 아니군요."
"예부터 부용정토(芙蓉淨土"연꽃이 활짝 핀 극락정토)라 하여 수많은 대 종장들을 배출한 곳이라고 합니다. 사실 제가 조그마한 암자를 하나 짓고자 하는 것도 도를 닦는 다기 보다는 풍수지리를 공부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럼 신 선생님은 앞으로 풍수대가가 되시겠군요. 자리를 잡으시면 멍석 하나 빌려 주시겠지요?"
"풍수대가라니요. 당치도 않는 말씀. 그러나 암자를 지으면 찰라님 기거하는 방은 기꺼이 내어드리리라. 하하하."
"기대하겠습니다."
▲연꽃이 활짝 핀 것 같은 부용만개의 형국에 위치한 벽송사는 푸른 벽송들로 에워싸여 있다.
조선 중종 1520년에 벽송지엄 선사에 의해 창건된 벽송사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을 하여 도를 깨친 유서 깊은 절이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인 벽계정심, 벽송지엄, 부용영관, 경성일선, 청허휴정(서산), 부휴선수, 송운유정(사명), 환성지안, 호암정혜, 경암용운, 서룡상민 등 기라성 같은 정통 조사들이 이 벽송사에서 수행 교화하여 조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룬 곳이라 한다.
무자화두(無字話頭)에 의해 무명을 타파하고, 선요(禪要)에 의해 지혜의 병을 떨쳐버린 벽송선사는 간화선 수행법에 의해 깨달음을 얻은 조선의 첫 번째 조사가 된다. 그 벽송대사의 뒤를 이어 벽송산문의 제2대 조사에 오른 부용선사는 도가 높고 학문이 깊어 도를 배우러 온 승속제자가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영호남 일대에 부용선사의 가르침을 받은 선비가 수 없이 많아서 "전단향나무를 옮겨 심으니 다른 나무들도 향기가 난다"라는 말이 널리 유행할 정도였다. 그 부용영관 문하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 서산대사라고 불리어 지는 청허휴정이다.
▲서산, 사명과 같은 조선 당대 제일의 선사를 배출한 벽송사 가람은
109명의 대종장을 배출한 한국선불교 최고의 종가라고 한다.
서산대사는 깨달음을 얻은 뒤 벽송산문의 제3대조사가 되어 지리산 일대에서 행화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도총섭이 되어 승군을 일으켜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그 서산대사 문하에서 사명대사 같은 특출한 선사가 탄생한다.
이처럼 선(禪)과 교(敎)를 겸비한 대 종장들을 109분이나 배출한 벽송사는 백팔조사 행화도량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벽송사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라고 할 정도로 조선 시대 최고의 선풍을 날린 곳이다.
그러나 벽송사는 6.25 전쟁 때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사용되다가 국군에 의해 방화되어 완전 소실되는 슬픈 역사를 맞이한다. 그 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벽송사를 구한원웅(久閒元應-현 서안정사 조실)대사의 원력에 의해 1960년대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한산월암(한閑山月庵)스님이 주석하여 지도하고 있는 벽송사는 여전히 선지식을 구하고자 눈 푸른 납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다.
▲벽송사 입구에 서 있는 나무장승.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을 담고 있다고....
우리는 도량으로 가기 전에 먼저 도량 뒤쪽에 있는 도인송과 미인송으로 돌아보기로 했다. 도량 입구 우측에는 오래된 나무장승 2기가 작은 전각 속에 만고풍상을 격은 듯 허허 로이 서 있다. 왼쪽 장승은 몸통부문에 '금호장군(禁護壯軍)', 오른쪽 장승에는 '호법대장군(護法大壯軍)'이라 음각되어 있다.
왼쪽 금호장군은 1969년 산불로 인해 머리 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경남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된 이 목장승은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하여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보물 474호 3층석탑. 조선시대 석탑으로는 드물게 신라양식으로 세워졌다.
도량 뒤에는 생각보다 넓은 절터에 미인송이 하늘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고, 그 밑으로는 오래된 부도와 탑이 세워져 있다. 벽송사는 창건 이래 숙종 30년(1704년), 환성지안이 주석하여 도량을 크게 중수하였는데, 이때에 불당, 법당, 선당, 강당, 요사 등 30여동의 전각이 세워지고, 300여명의 스님이 상주하였으며, 부속 암자가 10여개가 넘었다고 한다.
보물 제474호 3층 석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드물게 신라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2단으로 구성된 기단은 바닥돌과 아래층 기단 사이에 높직하게 딴 돌을 끼워 놓은 점이 특이하다. 위층 기단의 맨 윗돌은 한 장의 널돌로 이루어졌으며 수평으로 얇은 단을 새겼다.
▲하늘높은 줄 모르고 쭉 뻗어 있는 미인송에 기도를 하면 미인이 된다는 전설이 있다고.
중생의 눈에 띠는 것은 시원하게 뻗어 올라간 '미인송(美人松)'이다. 45도 각도로 비스듬하게 내리뻗은 미인송은 곧 아래로 넘어질 듯한데, 사다리 같은 긴 버팀목으로 목 부분을 받쳐놓고 있다. 중간에 어떤 매듭도 없이 어떻게 저렇게 쑥 뻗어 올라갔을까?
"미인송에 기원을 드리면 미인이 되어 태어난다고 하는데, 자, 두 분 사모님들 미인송을 안고 기도를 한 번 하여보시죠."
"에고, 이미 다 늙어버린 청춘인데 어찌 미인이 되겠어요."
예부터 미인송에 기원을 드리면 미인이 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미인송의 몸체를 가만히 품에 안고, 수피에 귀를 댄 채 한동안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본다. 역사의 숨결이 미인송으로부터 전해오는 것 같다. 미인송은 오랜 세월동안 벽송사의 희로애락을 지켜보며 역사의 현장을 지켜 왔으리라. 불에 그슬려 까맣게 맨살을 드러내며 생명을 끈질기게 이어오고 있는 미인송이 대견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처롭다는 생각이 든다.
▲천년을 넘었을 벽송사 도인송은 세 사람이 팔을 벌려도 끝이 닿지 않는다.
문고리만 잡아도 도인이 된다는 벽송사는 푸른 벽송이 많이 자라고 있다.
미인송을 뒤로하고 가람으로 통하는 작은 길을 따라 내려가니 대나무 숲이 이어지고, 대나무 숲 초입에 거대한 벽송이 푸른 솔을 머리에 우산을 인 듯 우람하게 서있다. '도인송(道人松)'라 불리는 소나무다. 예로부터 벽송사 주변에는 수백 년을 넘은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그 가운데 유독 창연하게 푸른빛을 띠고 깨어있는 도인처럼 침묵한 채 서 있는 이 거대한 소나무는 도인송이라는 이름이 아주 제격으로 어울린다. 나무둘레가 어찌나 크던지 세 사람이 팔을 벌려 잡아보았지만 손이 닿지 않는다.
이 도인송에 기원을 하면 도인의 기운을 받아 건강과 소원을 성취한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벽송사의 선방에서 수많은 도인이 배출된 것을 보아도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닌 것 같다.
▲꽂꽂한 선사를 많이 배출한 벽송사는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대나무 숲을 따라 도량으로 내려가는데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하늘을 덮은 대나무 잎이 서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벽송사 앞개울을 거슬러 올라가면 '광점'이란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는 광주리라는 뜻으로 벽계정심 선사가 숙유억불정책으로 은거하며 대나무로 광주리를 만들어 팔며 도를 닦던 터라고 한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는 원통전
대나무 숲에서 걸어 나오니 창호지를 바른 창문을 훤하게 열어놓은 원통전이 고요히 서 있다. 예전에 보광전이었다는 원통전은 아미타 삼존불이 모셔져 있었는데, 어느 때인가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이 도난을 당하고 관세음보살만 남게 되어 원통전으로 변경을 했다고 전해진다. 원통전에 모셔진 관세음보살 뒤편에는 천수천안의 탱화가 갖가지 물건을 들고 중생을 구원하려는 듯 손을 뻗히고 있다.
원통전에 합장 배례를 하고, 몇 걸음 내려서니 오래된 기와집처럼 보이는 벽송선원(碧松禪院)이 안정된 자세로 들어서 있다. 중앙에 '벽송선원(碧松禪院)'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서원은 의외로 심플하게 생겼다. 법당 안에도 이렇다 할 탱화도 없이 삼존불 뒤에는 드물게 반야심경이 후불탱화를 대신하고 있어 선방의 간결함이 돋보인다. 기둥에 새겨진 주련 또한 벽송사의 선풍을 담은 내용답다.
▲벽송선원은 후불탱화가 없고 대신 반야심경이 삼종불 뒤에 걸려 있어 심플한 선풍을 느끼게 한다.
靈光獨耀 逈脫根塵 (영광독요 형탈근진)
신령스런 광명 홀로 빛나, 육근육진을 멀리 벗어났도다.
體露眞常 不拘文字 (체로진상 불구문자)
본체가 참되고 항상함을 드러내니 문자 구애되지 않네.
心性無染 本自圓成 (심성무염 본자원성)
심성은 물들지 않아 본래 스스로 원만하나니
但離妄緣 則如如佛 (단리망연 즉여여불)
다만 망령된 인연만 떠나버리면 곧 여여한 부처라네.
高嶽峨巖 智人所居 (고악아암 지인소거)
높은 산 험한 산중은 지혜있는 사람이 살 곳이요
碧松深谷 行者所棲 (벽송심곡 행자소처)
푸른 솔과 깊은 골짜기는 수행자가 살 곳이로다.
앞의 4연은 당나라 선종사의 큰 봉우리인 백장혜해선사(百丈慧海禪師)의 게송이고,
뒤의 2연은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서 인용한 글이다.
푸른 솔과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한국 선불교 종가 벽송사의 면모를 나타내는 주련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국당과 청허당
벽송선원 넓은 마당 양편에는 승방요사인 안국당(安國堂)과 선원인 청허당(淸虛堂)이 쌍둥이처럼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이곳은 원래 벽송사 채마전이었는데 최근에 두 건물을 세웠다고 한다. 안국당은 안국선원 선원장 수불 스님이 벽송사 불사를 위해 거액을 쾌척하여 세워짐으로 붙여진 이름이고, 청허당은 청허유정(서산대사)을 기리는 당호라고 한다. 안국당 기둥에 새겨진 주련이 구구절절하게 스며든다.
竹影掃階塵不動 (죽영소계진부동)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고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달빛이 못을 꿰뚫어도 물에는 흔적 하나 없네.
入海算沙徒費力 (입해산사도비력) 바다에 들어 모래를 세는 것은 힘만 허비함이요
區區未免走紅塵 (구구미면주홍진) 구구히 홍진(세속)에서 허덕임을 면치 못하리.
爭如運出家珍寶 (쟁여운출가진보) 어찌 집안의 진귀한 보배를 가져와도
枯木生花別是春 (고목생화별시춘) 고목에 꽃피우는 특별한 봄만 같겠는가.
야부도천(冶父道川)스님의 금강경 오가해에 나오는 게송이다. 금강경에 사구게등(四句偈等) 한 구절만이라도 남에게 진실로 전해주는 것이 갠지스 강 만큼이나 많은 금은보화로 남에게 보시하는 것보다 더 복이 많다는 무위복덕이 으뜸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벽송사의 푸른솔이 도를 닦는 푸른 납자들처럼 둘러싸인 벽송사는
한국불교의 선맥을 잇는 도인이 만히 배출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절 마당에서 뒤를 돌아보니 도인송과 미인송을 둘러싸고 푸른 소나무들이 마치 도를 닦는 푸른 납자들처럼 보인다. 소나무와 도량 사이에 대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저 대나무로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어나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꿰뚫어도 물결 하나 흔적이 없는 도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인내와 복덕을 지어야 하는가?
▲빨치산 토벌의 슬픈 역사를 안고 있는 벽송사
도량 좌측에는 빨치산을 토벌했던 역사가 담겨 있는 장소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동족상잔의 슬픈 역사를 다시 보는 것 같이 마음이 아프다. 이유 없이 숨져간 원혼들이 아직도 구천을 헤매고 있을까? 저 도인송과 미인송은 그 사연을 보고, 알고, 그들의 한 맺힌 원혼을 달래주고 있으리라. 우리는 나무 그늘 밑에서 아내의 친구가 삶아온 밤을 까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함양 상림으로 가다가 오도재에서 자동차를 멈추었다.
(지리산 벽송사에서 글 /사진 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