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을 추모하며
춘설에 허리가 부러진 소나무
모진 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꺾이게 된다.
-법정스님, 무소유, 雪害木중에서-
지난 3월 10일 서울에 이례적으로 폭설이 내렸다. 우수도, 경칩도 지났는데 폭설은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 버렸다. 기상청에 의하면 시베리아에 머물던 영하 35도c 이하의 찬 공기가 상대적으로 습하고 따뜻한 서울 경기 상공에 충돌하면서 생긴 눈구름이 하강한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제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하며 싹이 터져 나오는 나뭇가지와 별꽃, 할미꽃, 산수유 등 봄꽃들이 된서리를 호되게 맞은 샘이다. 10일 찾았던 올림픽공원에는 병아리 털처럼 보송보송하게 피어나오던 할미꽃, 은하계의 별처럼 반짝거리며 봄을 노래하던 별꽃, 노란 저고리를 입고 봄을 찬양하던 산수유도 모두 눈 속에 갇혀 떨고 있었다.
아, 복수초는 또 어찌되었을까? 이튿날(3월 11일)나는 서둘러 홍릉에 있는 국립산림과학원으로 갔다. 산림과학원 뜰에는 복수초가 역시 갑자기 내린 폭설에 파묻혀 신음하고 있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이 온 것 같지 아니하네)" 복수초는 마치 당나라 시대 절세 미녀 왕소군의 처지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끌끌, 너무 일찍 피어나도 뭇 중생의 시샘을 받아 저렇게 된 서리를 맞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복수초는 눈보다 더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차가운 눈속을 뚫고나오며 아름다운 꽃을 피기를 멈추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일들이 홍릉 숲에 벌어지고 있었다. 산림과학원 본관 앞에 심어진 백송이 뿌리 채 뽑혀 벌렁 자빠져 누워 있었고, 홍릉 숲의 여기저기에는 소나무들이 춘설의 무게를 못 이겨 허리가 두 동강이 난 채 부러져 있었다.
소나무는 그 단단한 허리가 통째로 부러져 있었다. 그것도 몇 수십 그루나 되었다. 도대체 비바람치는 태풍도 아닌데, 부드러운 춘설春雪에 저 단단한 몸통이 맥없이 부러지다니… 나는 한 동안 어이가 없어 허리가 부러진 소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정녕,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것일까? 맥없이 부러진 소나무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법정스님의 <雪害木>이란 수필이 생각났다.
모진 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꺾이게 된다.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하얀 눈에 꺾이고 마는 것이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꺾이는 메아리가 울려올 때 우리들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에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겨울이 지나면 않고 난 얼굴처럼 수척하다.....
-법정 스님, 無所有, 雪害木중에서-
아아,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가? 부러진 소나무 앞에서 법정스님의 수필을 더듬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아내로부터 온 전화였다. "법정스님께서 오늘 입적 하셨대요.…" "뭐? 뭐라고?" 아내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고, 나는 폭설을 맞은 소나무처럼 주저 앉고 말았다.
법정스님은 내게 있어서 스승처럼, 친형님처럼 언제나 가까이 계셨던 분이셨다. 스님의 간결한 법문, 맑은 글, 청정한 모습에서 항상 나는 용기와 희망을 찾았었다. 내 서가에는 스님께서 쓰신 책이 수십 권이나 꽂혀있다. 책이 곧 스님이셨고, 스님이 곧 책이셨다. 스님은 언제나 부드러운 글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곤 했다. 스님께서 산에서 내려와 길상사에서 법문을 하실 때에는 길상사 뜰 느티나무 아래서 스님을 먼발치로 바라보며, 조용조용 토해내는 스님의 사자후를 듣곤 했었다. 부드럽지만 때로는 매서운 회초리를 맞은 듯 아프기도 했다.
아아, 그런데 스님께선 이렇게도 춘설이 내리던 날, 떠나는 것을 미리 예견 하셨을까? 스님은 가셨다. 마치 춘설에 소나무가 부러지듯이 스님은 갑자기 떠나셨다. 춘설이 내리던 날 소나무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으셨을까? 자연의 이치를 따라 스님은 춘설에 부러진 소나무처럼 홀연히 떠나셨다.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다듬는 물결인 것을.
-법정 스님, 無所有, 雪害木중에서-
부러진 소나무 속을 들여다 보니 그곳엔 아픔과 고통이 보였다. 평생을 나쁜 공기를 들여마시고 신선한 산소를 내품어주었던 소나무가 아니던가!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라고 했던 유마힐 거사의 말이 생각난다. 저 소나무의 아픔이 스님의 아픔이 아닐까? 스님께선 평생을 저 소나무가 내품는 산소처럼 이 땅에 신선한 공기를 뿌려 주셨고, 바닷물처럼 바닷가에 떠도는 조약돌(중생)을 둥글고 예쁘게 다듬다가 입적을 하셨다. 스님께선 평생을 중생의 아픔을 어루만지다가 떠나 간 것이다.
이제 <말빚>도 빚이라며 모든 출판물까지 절판을 선언하시고 홀연히 떠난 스승님의 모습을 어디서 뵐 수 있을까? 스님께선 평생을 바닷물처럼 바닷가에 떠도는 조약돌(중생)을 둥글고 예쁘게 다듬다가 입적을 하셨다. 이제 <말빚>도 빚이라며 모든 출판물까지 절판을 선언하시고 홀연히 떠난 스승님의 모습을 어디서 뵐 수 있을까?
(홍릉숲에서 찰라 글/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