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방랑/80일간의티벳일주

메리설산을 떠나 다시 리장으로...

찰라777 2010. 3. 22. 15:11

 

메리설산을 떠나며....

 

메리설산에서 내려오는데 더친에서 해어졌던 서양인 네 명을 만났다. 그들은 중뎬에서부터 함께 더친으로 왔던 여행자들이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메리설산으로 가기로 약속을 해놓고는 더친에서 사라져버렸었다. 그들은 더친에서 하루 밤을 자고 왔다고 했다. 어쨌든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그들과 헤어져 밍융마을로 내려갔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차마고도를 다라 라사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가 여행을 할 당시에는 메리설산을 넘어 라사로 가는 여행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나는 카와 카르포 설산을 바라보며 다섯 번 시도 끝에 1924년 운남성에서 라사로 넘어 가는데 성공한 프랑스인 여행가 알렉산드라 다비드 넬을 다시 회상했다. 그녀는 <영혼의 도시 라싸로 가는 길>이란 여행기에서 그 때의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번 여행은 폐쇄적인 '눈의 나라' 티베트로의 입국을 시도하는 나의 다섯 번째의 출발이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티베트 당에 발을 들여 놓기 위해 시도를 했지만, 그때마다 출발 상황은 매번 같지 않았다.……그들은(중국) 도대체 무슨 권리로 그들의 법적 관할 구역도 아닌 티베트를 제멋대로 '금단의 땅'으로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시대는 다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티베트를 금단의 땅으로 묶어 놓고 있는 것은 비슷했다. 나는 다비드 넬이 넘어갔던 카와 카르포 설산을 다시 한 번 바라보며 기어이 라싸로 가리라는 다짐을 했다. 여기서 넘어가지 못하면 깡딩으로 넘어가서 청두에서 다시 시도하리라.

 

밍융마을에 내려온 어제 만났던 티베트인 운전사를 만났다. 그는 더친에서 알아본 결과로는 깡딩으로 넘어가는 길이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일시적으로 막혔다고 했다. 만약에 중뎬으로 가고 싶으면 자기 빵차를 타라고 했다. 마침 중뎬으로 가는 일행이 있는데 두 자리가 비어 있다고 하면서 60위안에 우리를 태워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일단 중뎬으로 가서 청두로 가는 길을 알아보기로 했다. 그는 오후 2시에 광복식당에서 출발을 한다고 했다.

 

 

 ▲60위안에 중국인 네명과 함께 합승을 했던 빵차

 

 

아슬아슬한 절벽길을 한 손으로 운전하는 티베트인 운전수

 

광복식당에서 볶음밥을 시켜 먹고 있는데 중국인 네 명을 데리고 운전수가 왔다. 루시요(Lu Xiao)라고 자신을 소개한 중국인 청년은 키가 작고 얼굴이 갸름했다. 네 명 다 키가 아주 작았다. 아마 남방계 중국인들인 모양이다. 루시요는 매우 친절했다.

 

우리는 그들과 일행이 되어 오후 2시 20분에 밍융마을을 출발했다. 메리설산을 뒤에 두고 란창강을 따라 다시 오던 길을 넘어 오는데 아쉬움이 남았다. 언젠가는 이 차마고도를 따라 라사로 가고 말리라는 다짐을 하면서…

 

티베트인 빵차 운전수는 매우 쾌활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난폭 운전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금 한 손으로 핸드폰 전화를 받으며 한손으로 그 아슬아슬한 협곡을 고계를 하듯 차를 몰았다. 한 번은 모퉁이를 돌다가 마주 오는 차와 정면으로 충돌을 할 뻔 했다.

 

다행히 겨우 충돌은 면했지만 간담이 서늘하고 등에서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조금만 길에서 벗어났어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불귀의 귀신이 될 뻔했다. 우리는 오는 길에 낭떠러지로 추락한 자동차를 목격하기도 했다. 중국인 청년이 중국어로 운전수에게 경고를 했다. 물론 내용은 안전운전을 하라는 것이다.

 

중뎬에 도착하니 오후 8시였다. 불과 6시간 만에 그 험한 길을 달려왔으니 얼마나 난폭하게 운전을 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자동차에서 내리니 다리를 얼마나 버텼던지 오금이 재리고 아플 지경이었다.

 

 

우리는 다시 티베트 호스텔에 여장을 풀고 티베트 식당으로 갔다. 차도 한잔 마시고 중뎬에서 청두로 가는 차편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티베트 식당 여자 종업원이 우리를 알아보고 싱긋 웃었다.

 

야크 스테이크를 시켜 먹고 있는데 일본인 여행자 3명과 뉴질랜드에서 왔다는 여행자들이 옆 좌석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도 라싸로 넘어가는 방법을 알아보고 있는데 여의치 않다고 했다. 깡딩으로 넘어가는 길도 사정이 좋지 않다고 했다.

 

호스텔로 돌아오다가 중국인 루시요를 만났다. 그들은 어제 그 차를 렌트해서 리장으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일단 그들과 동승을 하여 일단 리장으로 가기로 했다. 리장에서는 판즈화로 가는 버스가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장의 다락방

 

다음 날 아침 8시 30분 우리는 티베트인 빵차를 타고 중뎨을 출발하여 리장으로 향했다. 12시경에 호도협으로 가는 기점인 챠우터우에 도착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갑자기 여정을 변경하여 호도협을 트레킹을 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빵차를 타고 호도협으로 간다고 하며 함께 가겠느냐고 했다. 우리는 이미 호도협 트레킹을 했는지라 하는 수 없이 50위안을 운전수에게 지불하고 빵차에서 내려 그들과 헤어졌다.

 

챠우터우에서 리장으로 가는 버스는 이미 두절되고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네달랜드에서 왔다는 존 일행을 만나 다시 빵차를 대절했다. 상하이에서 일을 한다는 그는 중국어를 아주 능통하게 잘했다. 6명이 함께 1인당 30위안을 주고 리장으로 돌아오는 시간 내내 존은 중국인 운전수와 수다를 떨었다.

 

오후 2시 리장에 도착하여 우리가 묵었던 고성객잔에 갔더니 방이 없었다. 방이 없기도 했지만 노동절이 겹친지라 리장의 모든 물가는 3배 이상으로 훌쩍 뛰어 있었다. 50위안 하던 방도 150위안을 달라고 했다. 리장을 여행하고자 할 때는 참고해야 할 정보다. 노동절이 겹치는 리장은 각종 축제로 볼거리는 많지만 방을 잡기가 힘들고 물가는 부르는 것 것이 값이다.

  

▲리장의 다락방 너머로 보이는 등불

 

 

고성객잔 주인은 우리보다 샤워를 하고 옥상 텐트에서 자라고 했다. 그러나 밤에는 춥다. 옥사에서는 차마 잘 수가 없어 방을 찾아 나섰다. 여행 중에 감기라도 들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는 흥인객잔의 다락방 하나를 구했다. 나시족이 운영하는 민박집으로 평소에는 20위안정도 했을 텐데 70위안이나 받았다.

 

리장은 축제분위기로 젖어 있었다. 홍등을 밝힌 쓰방제에서는 축제공연을 하고 사람들은 거리마다 삼삼오오 떼를 지어 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아내와 나는 흥인객잔 작은 다락방에 누웠다. 들창너머로 하늘의 별이 보였다. 비록 작은 다락방이지만 마음은 편했다. 이제 내일이면 샹그리라의 대장정을 마치고 판즈화로 떠난다. 아슬아슬한 협고과 설산이 홍등 사이로점멸하며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