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속(離俗)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을 내려놓고.
이제 가을바람이 소슬하군요. 사나운 비바람이 멈추더니 하늘이 훌쩍 높아졌습니다. 구름색깔도 하얀 뭉게구름으로 변해갑니다. 개울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밖은 적막하기 그지없습니다. 9월, 그리고 가을.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입니다.
이곳 섬진강으로 이사를 온 이후 찾아오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서울에 있을 때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리움을 안고 오는 사람들, 우리가 사는 것이 궁금해서, 여행을 하다가, 자신의 문제가 풀리지 않아서… 그 사연은 여러 가지입니다.
거의 하루 걸러 한 번 꼴로 이곳 수평리 집을 찾아드는 사람들을 보고 수평상회 아주머니는 "웬 사람들이 그리 많이 찾아와요?" 하고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네, 우린 사람만나기를 좋아해서요." 그렇습니다. 원래 아내와 나는 사람들을 만나기를 좋아 합니다.
9월 들어서 O와 S, J, K, C가 다녀갔고, 오늘은 P부부가 다녀갔습니다. 모두가 멀리서 오신 분들입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분들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저희들이 갑자기 섬진강으로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저희 집을 오겠다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누구도 곁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하잘 것 없는 사람도 곁을 떠나고 보니 사람들은 떠난 우리들이 그리워지는 모양입니다. 물론 지리산과 섬진강이라는 풍경이 우리들보다 더 그들을 끌어당기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풍경이 좋아도 누군가가 기다리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입니다. 여행은 풍경도 좋지만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더 특별한 맛을 가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리운 사람과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교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소중하고 또 반가운 일인지 모릅니다. 차 한 잔을 나누며 정담을 나무다 보면 도대체 시간이 가는 줄 모릅니다.
저희 집은 언제나 대문이 열려 있습니다. 다른 집에 비해 대문도 상당히 큽니다. 돌담장 사이로 자동차가 쑥 들어올 정도이니 시골 집 치고는 큰 대문이지요. 외출을 하더라도 그 큰 대문을 그대로 열어 놓고 갑니다. 집에 들어 와 보아야 모두 중고 가구에 값나가는 것도 없지만 대문을 닫아 놓으면 어쩐지 답답하게 느껴져서 우리는 아예 문을 열어 놓고 다니기로 했습니다.
며칠 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J가 홀로 찾아왔습니다. 항상 부부와 함께 다니던 그녀였는데, 홀로 여행을 떠나 다니다가 어찌어찌하다 보니 우리가 생각이 나서 구례까지 왔다고 합니다. 그날은 아내도 서울 병원에 갔다가 기차를 타고 오는 중이었습니다. J는 먼저 아내에게 전화를 했던 모양입니다. 아내로부터 J가 구례버스터미널에 기차가 도착하는 시간과 비슷하게 올 거라고 전화가 왔습니다.
아내가 도착하는 기차는 용산발 무궁화호로 구례구역에 오후 3시 39분에 도착예정이어서 3시쯤 집을 나서는데, J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구례버스터미널에 이미 도착을 했다고요. 그래서 나는 먼저 버스터미널로 가서 그녀를 픽업을 하고 구례구역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버스터미널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가까스로 J를 만났습니다. J는 나의 오랜 친구의 부인입니다. 어쨌든 반가웠습니다.
"구례에 오시면 누군가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지요. 하하하."
"정말 그러네요!"
구례구역으로 가며 내가 농담을 하자 J도 구례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서부터 괜히 가슴이 설레였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여행을 떠나 낯선 풍경이 펼쳐지는 곳에서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누구나 가슴이 설레게되지요. 낯선 곳에서의 만남. 그것은 항상 그리움과 설레임이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편견이 없습니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리움'과 만남의 기쁨만 남아있습니다.
항상 부부가 다니던 분인데… 궁금했지만 나는 왜 홀로 왔는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홀로 떠나고 싶은 여행었을 것이고, 본인이 사연을 말을 하기전에는 굳이 묻지않는 것이 홀로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의 불문율이기 대문입니다. 버스터미널에서 구례구역까지는 그리 멀지가 않습니다.
"저게 무슨 나무죠?"
"네, 벚나무인데 올해는 벚나무 잎이 미리 저렇게 저 버리는군요. 단풍이 들면 무척 아름다운데."
"어머 왜 그럴까요?"
"아마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냉해 병이 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백미러 사이로 살짝살짝 J를 바라보며 몇 마디 대화를 하는 사이 섬진강 다리를 지나고 바로 구례구역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런데 백미러 사이로 보이는 J의 얼굴이 어쩐지 우수에 차 있는 듯 보입니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구례구역에 도착을 하니 아내가 배낭을 걸머지고 역 앞에 서 있었습니다. 블루진 바지에 배낭을 메고 서 있는 아내의 모습이 역시 홀로 가을여행을 떠나온 여인처럼 보입니다.
"하하, 각하 구례구역에 내리면 누군가가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을 것만 같지 않소?"
"당신이 어찌 그걸 알았지요? 정말 그래요."
"척 보면 알지.하하."
그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아내는 J와 함께 뒷좌석에 앉았습니다. 섬진강을 따라 집으로 가는 동안 내내 풍경이야기와 지난번 폭우로 유실된 다리와 수혜으 흔적을 바라보며 섬진강 이야기만 했습니다.
"정말 너무 좋군요."
"그래요? 그럼 며칠 머물다가 가세요."
"정말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숙박비만 두둑이 내시면. 하하"
"물론 숙박비야 두둑이 내야지요. 호호"
그러는 사이 어느새 우리는 수평리 집에 도착을 했습니다. 하루에 두 여인을 버스터미널과 기차역에서 픽업을 하여 집에 도착을 하니 특별한 날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J는 우리 집에 여정을 풀고 함께 개울에 나가 다슬기도 잡고, 물장구도 치며 하루를 집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마침 수평상회 아주머니가 준 농주가 있어서 농주를 반주 삼아 시골 밥상으로 저녁을 함께 했습니다. 그녀가 울먹이며 이곳까지 여행을 온 사연을 털어놓았습니다. J가 들려준 이야기는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사연이었습니다.
J는 누구한테 그 사연을 털어놓기도 어려워 벙어리 냉가슴을 앓듯 하다가 너무나 답답해서 여행을 떠났고, 마침내 우리를 만나 가슴을 털어 놓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J의 사연을 듣고 보니 정말 '세상에 이런 일'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사연이었습니다. J의 프라이버시를 생각해서 그 사연을 이곳에 털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 우리는 J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고, 아내와 나는 J에게 여행은 잘 떠나왔고,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이곳에 머물다 가라고 했습니다. 밤잠을 자지 못한다는 J를 위해서 아내는 어떤 비방을 내려주기도 했습니다. 마음을 내려 놓고.
마음을 내려놓고.
다음날은 J와 함께 천은사에 들려 '이속'이라는 찻집에서 차를 마셨습니다. '이속(離俗)'은 '속세를 떠난다'는 뜻을 가진 찻집입니다. 30대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찻집인데, 전에도 한 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두 부부는 7년 전 우리가 세계 일주를 할 때에 남미 칠레의 땅 끝 파타고니아에서 만났던 친구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에서 살다가 이 찻집으로 이사를 오고 그 집을 우리에게 물려준 고마운 친구들이지요. K부부는 너무나 천진하게 보여서 보기만 해도 맑아지는 모습입니다. 그들에게는 '시안'이라고 부르는 3살짜리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J와 함께 이속에서 찬 한 잔을 마시며, K와 만나게 된 인연, 그리고 K가 이곳 지리산가지 오게 된 사연을 들었습니다. K가 하루에 만원이면 세 식구가 살아간다고 하자 J는 "저렇게 천진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요?" 하며 놀라기도 했습니다. 하여간 이틀을 지내는 동안 J의 마음이 많이 가라앉는 표정이었습니다.
"다시 마음을 내려놓고…"
사실 어떠한 큰일이라도 한 마음을 내려놓고 보면 별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보면 더더욱 별일이 아닐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J의 사연은 우리가 들어도 놀라운 일이었고, 견디기 어려운 사연이었습니다. 그래도 점점 마음이 누그러지는 J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습니다.
이속에서 나와 우리는 시안이랑 시안이 아빠랑 함께 천은사 경내를 산책하였습니다. 마침 저녁예불 시간이어서 고요한 경내에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댕~~~~ 댕~~~~ 댕~~~~"
마음을 내려놓고....
종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팍 가라앉게 하는 마력이 있습니다.
"방아착~ 방아착~ 방아착~"
천은사 종소리는 마치 그렇게 울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말없이 천은사 경내를 산책하였습니다. 그리고 300년인가 된다는 보리수나무 아래서 보리수나무를 올려다보기도 하고ㅡ 만져 보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부처님께서 6년 고행을 하다가 정각을 이루었다는 보리수나무지요."
마침 스님께서 종을 치고 올라오셨습니다. 우리는 스님으로부터 천은사 보리수나무에 대한 내력을 들었습니다. 천은사 경내에는 많은 보리수나무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대웅전 좌측에 있는 부리수나무가 가장 큽니다.
"보리수나무 열매를 모두 따서 염주를 만드는 공장으로 보냈지요."
"언제 그 염주를 살 수 있나요?"
"한 달 후면 살 드릴 수 있어요. 지금도 이 아래 가게에서 팔아요. 천은사 염주는 알이 굵고 모두 둥글어서 아주 좋아들 하지요. 천은사 보리수나무 염주로 기도를 하면 번뇌가 잘 사라진다고 해요."
스님의 자상한 설명을 듣고 우리는 보리수나무를 다시 한 번 쳐다보고 천은사를 내려왔습니다. 이속 찻집 부부와 시안이와 이별의 인사를 하고 우리는 간전면으로 돌아오다가 섬진강 다슬기 집에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청정 지리산 계곡과 섬진강에서 잡은 다슬기 수제비는 맛이 아주 담백하고 신선합니다.
J는 이틀 후에 구례구역에서 10시 52분 기차를 타고 서울로 떠나갔습니다. 우리는 J를 구례구역까지 바래다주었습니다. 그녀를 떠나보내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녀가 더 편안한 마음을 가질 때까지 머물렀으면 좋겠는데… 하여튼 그는 떠나갔습니다. 그를 떠나보내고 섬진강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데 J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두 분 언제 봐도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좋은 일깨움 되었습니다. 이틀의 유숙 머리 숙여 감사드리며 행복했습니다.'
차창에 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문자를 보냈을 J를 생각해 봅니다.
'추측이나 판단을 하려고 하지 말고 이해하려고 노력 하십시오.'
나는 답신을 이렇게 보냈습니다. 확실함이 없는 추측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오해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또 판단은 매우 주관적이어서 오류로 인하여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판단과 판결은 오직 신만이 오류없이 내릴 수 있는 거싱 아니겠습니까? 아내와 나는 J의 일이 잘 풀리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순간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누구요?"
"P부부가 지금 온대요."
"그래?"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P부부를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우리 집은 속세를 떠나온 '이속(離俗)'과도 같은 집인데 속세에 있는 집보다 더 바쁩니다. 그러니 '이속(離俗)'은 속세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속세와 가까워지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을 내려놓고...
(201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