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의 시인 옥천 정지용 생가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려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나지 않고
머언 하늘만 떠도는 구름………(정지용의 시, 고향 중에서)
신록의 계절 오월, 문득 고향이 그리워진다. 고추 내놓고 시냇물에 멱을 감고, 실개천 휘돌아 가는 언덕에 앉아, 까만 재 얼굴에 묻혀가며 서리한 감자를 구워먹던 그 시절. 아아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가진 모든 것과 맞바꾸고 싶어진다.
고향! 고향이 하도 그리워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향에 대한 그 애틋한 <향수>가 가슴 속 깊은 곳에 박혀 있어, 고향에 대한 추억마저 끄집어내기도 쉽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북에 고향을 둔 사람들은 가고싶어도 가지 못해, 고향을 생각만 해도 서러움이 복 바쳐 오르기 때문이다.
▲정지용 생가 앞 <향수상회>. 향수의 시가 강하게 떠오르게 하는 간판이다.
남에 고향을 가진 사람들도 그 시절 추억을 더듬으며 고향을 찾아가지만, 어느 날 갑자기 공장의 굴뚝과 아파트가 옛집을 밀어내 버리거나, 댐으로 수몰되어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고향에 오히려 상처만 입고 오는 경우도 있다. 무자비한 개발이 고향의 향수를 송두리째 부셔버렸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다면 차라리 정지용 시인의 고향 옥천으로 가보자. 가수 이동원의 '향수'와 조수미의 '고향'이란 노래로 더욱 유명해진, 실개천에 <향수>와 <고향>의 음악이 흐르는 옥천으로 가보자. 용산역에서 무궁화 열차를 타고 손 때 묻은 기차표를 문지르면서 정지용의 시를 읊조리며 옥천으로 가보자.
▲정지용의 시가 흐르는 100년 넘은 옥천역
차창 밖으로 오월의 햇살이 눈부신 푸른 들판을 바라보며 정지용 시집<향수>를 뒤적거리다 보니 어느 듯 옥천역에 닿았다는 차장의 멘트가 들린다. 옥천역, 서울에서 183km 떨어진 옥천역은 100년도 넘은 오랜 역사(1905년 개역)를 지니고 있다.
개찰구를 빠져나가니 자전거가 아무렇게나 역사 벽에 기대어 서 있고, 한적한 역사 앞 광장에는 정지용의 시비 하나가 딸랑 길손을 반기고 서 있다. 앞쪽에는 정지용의 대표 시 <향수>가 새겨져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정지용 시, 향수 중에서)
▲옥천역 광장에 있는 정지용 시비
시비에 새겨진 향수를 입속으로 읊조리다 보니 까닭도 없이 왈칵 그리움이 복 바쳐 오른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고향에 대한 향수가 사무친다. 얼룩백이 황소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드는 기분도 든다. 그 누가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 대한 향수를 꿈엔들 잊을 손가?
시비의 뒷면에는 그 옛날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성큼 끄집어내게 한다. '할아버지가 담뱃대를 물고/들에 나가시니/궂은 날도/곱게 개이고/할아버지가 도롱이를 입고/들에 나가시니/가믄 날도/비가 오시네' 아아, 이 얼마나 소박한 표현인가? 옥천에 오길 잘했어. 내가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정말 고향에 온 기분이 든다.
돌에 새겨진 시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흥얼거리는데, 진한 감동이 손가락 끝에 묻어 울려온다. 그 울림을 간직하며 택시를 타고 구읍으로 갔다. 옥천은 손바닥처럼 작은 읍내다. 눈 깜짝할 사이에 택시는 구읍에 내려준다.
▲정지용의 시가 걸려있는 구읍 우편취급국. 한산한 거리도 시적으로 보인다.
구읍의 거리에 서니 정지용 시가 펄펄 천지를 이루고 있다. 음식점에도, 미용실에도, 마트에도, 우체국에도, 정미소에도, 담배 가게에도…… 정지용의 시 한 구절이 없는 곳이 없다. 이곳에서는 정지용의 시 한 구절 외지 못하는 사람은 축에도 끼지 못할 것 같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가 모차르트의 도시이고, 쿠바 아바나가 헤밍웨이의 도시라면, 옥천은 정지용의 고을이라고나 할까? 옥천 구읍 거리에 서면 누구나 시인이 된 듯 정지용의 시 한수를 저절로 지줄대게 되니 말이다.
거리도 간판도,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시적이다. 글씨체조차 시의 음률이 흐르듯 율동적이다. 네거리에 있는 <구읍 우편취급국>이란 간판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 마음은 어느새 먼 과거로 회귀해 버리고 만다. '모초롬만에 날러온 소식에/반가운 마음이 울렁거리여/가여운 글자마다 먼 황해가 남설거리나니…(정지용, 오월소식 중에서)'. 참으로 우체국에 걸 맞는 시 구절이다.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정지용 시, 향수 중에서)'. 소고기집에 붙여진 정지용의 시이다. 또 있다.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산꿩이 알을 품고/뻐꾸기 제철을 울건만… (정지용 시, 고향 중에서). 붕어, 생선국수전문집 구읍식당에 붙어 있는 시다.
길을 거닐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차를 마시면서도 옥천의 구읍은 정지용의 시 한 구절을 읊조리게 한다. 그런데 간판이나 벽에 붙은 그 모든 시의 내용들이 그 업소에 기가 막히게 딱 들어 맞는다는 것이다.
'흑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함부로 쏜 화살 찾으려/풀 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이던 곳…(정지용 시, 향수 중에서')-치킨 호프집.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정지용 시, 그의 반 중에서)'-사랑 노래방.
'얼골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정지용 시, 호수 중에서)'-마트.
'나의 가슴은 조그만 갈릴레아 바다/때 없이 설레는 파도…(정지용 시, 갈릴레아 바다 중에서)'-미용실, 이용원.
'불 피어오르듯 하는 술 한 숨에 키여도/ 아아 배고파라…(정지용 시, 저녁햇살 중에서)-정지뜰식당.'
'앵도나무 밑에서 우리는 늘 셋 동무…(정지용 시, 딸레 중에서)'-앵도미용실.
'곡식알이 거꾸로 떨어져도/싹은 반듯이 우로!…(정지용의 시, 나무 중에서)'-정미소.
간판과 벽에 새겨진 정지용의 시를 지줄대며 향수길을 걷다보면 너무나 재미가 있어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눈에 띠는 시를 흥얼거리며 향수길을 걷다보면 실개천이 나오고, 그 실개천 옆에 정지용의 생가가 서 있다. 그러나 새로 이은 초가지붕 정지용의 생가보다는 그 앞에 있는 오래된 향수상회가 더 눈에 띠는 것은 왜일까? <향수>가 그만큼 정지용의 시를 대표하고 있는 탓일 게다.
정지용은 1902년 옥천군 하계리(현 죽향리)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에는 죽향리가 중심이었지만 경부선 철도가 남쪽으로 비켜 가는 바람에 지용의 고향은 조용한 마을로 남을 수 있었다. 만약 이곳 구읍이 개발되어 빌딩이 들어서고 차량이 꽁지를 물고 있다면 지용의 주옥같은 시어들은 빛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비록 얼룩백이 황소는 음식점의 간판으로 남아있고,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을 줍던 논밭이 사라졌더라도 실개천은 여전히 흐르고, 지용이 태어난 흙은 그대로 있으며, 파란 하늘빛도 그대로 남아있어 그의 시는 펄펄 살아서 그의 고향에 빛나고 있다..
생가 앞에는 지용의 명시 <향수>가 그의 마음을 대신하고 있다. 담장 너머에는 아그베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원래 이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지고, 1996년 옥천군에서 본채와 행랑채, 돌담, 우물을 갖춘 초가집으로 단장해 놓았다.
지용은 이 집에서 자라나 12살에 송재숙과 결혼을 하고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어린 아내를 고향에 남겨둔 채 서울로 간다. 그때부터 어린 지용의 마음속에는 고향에 대한 <향수>가 싹 텄을 것이다. 17세에 휘문고보를 입학한 지용은 시에 눈을 뜨게 되어 박종화, 홍사용, 정백 등과 사귀었고,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펴내기도 했다.
1923년 도쿄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을 하여 8.15 해방 때까지 휘문고보 영어교사로 재직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는 이화여자대학 교수로 옮겨 문과과장이 된다. 1946년에는 좌익 성향이 짙은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경향신문 주간이 된다. 이때부터 지용은 고난의 길을 가게 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조서문학가동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강연에 종사한다. 그러다가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지용은 전쟁 3일 만에 녹번리 집에서 북의 정치보위부에 자수하러 간다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영영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이후의 행적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월북했다가 1953년 북한에서 사망한 것이 통설로 알려져 있다.
전쟁 후 지용이 월북했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그의 시는 발간금지가 되며 한국 근대시 문학사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지고 만다. 그의 가족들도 월북자 가족으로 분류되어 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 후 40년이 지난 1988년에야 지용의 작품은 해금이 되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2001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북에 있는 그의 셋째 아들 정구인이 정지용과 큰 형 정구관을 찾는다는 신청이 있어 세상을 놀라게 한다. 정구인은 실로 51년 만에 큰 형 구관과 누이동생 구원을 만났다. 이 사실은 지용이 북에 가기도 전에 사망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전쟁 통에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그가 어디서 죽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생사도 무덤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2005년 5월 15일 그의 102회 생일을 맞아 그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정지용 문학관'이 생가 옆에 세워졌다. 영상실, 문학전시실, 문학교실로 꾸며진 문학관에는 그의 업적과 시 세계에 흠뻑 빠질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생과 사의 기로에 서서 생존을 위한 우익과 좌익의 이데올로기가 어떠하든 지용이 빚어낸 시는 아름답다 못해 찬란하기까지 하다. 그의 섬세한 언어 구사와 선명한 이미지의 표현은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누구나 쉽게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만다. 강한 향토적 정서와 곱게 다듬어진 우리말의 섬세한 이미지는 순수한 감각적 서정이 깊숙하게 깃들어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그가 살아서 고향에 다시 돌아온다면 뭐라고 읊조릴까? '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란 하늘빛이 그리워/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풀 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그가 노래한 <향수>의 시처럼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이슬 젖은 풀 섶을 휘적이며 돌아다닐까?
지용의 생가를 나와 육영수 생가 터로 가는데 들 건너 산에서 산꿩 소리가 들려왔다. 길옆에는 몇 백 년을 묵었을 느티나무가 새끼 금줄을 감고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그 산 위로 '햇살이 피어 이윽한 후, 머흘 머흘 골을 옮기는 구름'이란 그의 시어처럼 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있었다.
육영수 여사 생가 터에서 다시 향수길을 뒤돌아 오는데, 생가 터 실개천에 오리 두 마리가 다정히 이마를 맞대고 놀고 있다.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오리 모가지는 자꾸 간지러워…(정지용 시, 호수2 중에서)'. 실개천에서 멱을 감는 오리를 바라보며 지용의 시를 읊조리니 내 모가지조차 자꾸 간지러워진다.
옥천의 어디를 가나 정지용의 시는 구석구석 물결치고 있다. 고향이 없는 자도, 고향을 잃은 자도, 설혹 고향이 있을지라도 옥천 구읍에 가면 마음속 고향을 찾게 된다. 하여 사람들아, 고향이 그립거든 옥천으로 가는 기차를 타라.
푸른 오월, 모처럼만에 찾아온 연휴를 가족과 함께 단아하게 옥천에서 맞이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옥천에서는 때마침 5월 13일부터 <지용축제>가 열린다. '모초롬만에 날러온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울렁거리어……(정지용 시, 오월 소식 중에서)'. 혹 누가 아는가? 옥천을 찾은 그대에게 가슴 울렁거리는 반가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