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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 하나하나가 묘비명을 이룬 봉하마을 노무현 대통령의 묘

찰라777 2011. 8. 25. 08:25

박석 하나하나가 비명을 이룬

봉하마을 노무현 대통령의 묘

 

그냥 살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을까?

부서진 대통령의 꿈...봉하마을을 가다

 

 ▲봉하마을 들판에 새겨진 고 노무현대통령 초상화

 

 

봉하마을은 거가대교에서 그리 멀지않는 곳에 있었다. 부산을 향해 가다가 진영으로 가는 길로 좌회전을 하여 20여분 달려가니 봉하마을이 나왔다. 봉하마을에 도착하자 제일먼저 눈에 띠는 것은 논두렁에서 돌아가고 있는  노란 바람개비였다. 언젠가는 한 번 가보아야지 하고 벼르던 봉하마을에는 바람개비가 무더위를 식혀주고 있었다. 바람개비는 때마침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푸른 들판을 배경으로 스르르  돌아가며 길손을 반기고 있었다. 대통령의 꿈이 아직도 바람개비를 타고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봉화마을에 돌랑가는 노란 바람개비

 

 

 

 

 

샛노란 바람개비를 보자 어린시절 바람개비를 접어서 달려가며 돌리던 생각이 떠올랐다. 바람개비는 대통령 생가를 지나 묘역까지 이어지며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소년 노무현이 태어나 대통령이 되기까지 꿈을 키우며 돌렸던 바람개비처럼 보였다.

 

주차장을 지나자 대통령의 생가가 보였다. 1946년에 태어나 8살까지 살았던 생가라고 한다. 생가는 전통적인 시골초가집 형태로 약 11평 규모의 본채에 방 2칸과 부엌, 약 4.5평의 아래채 헛간과 옛날식 화장실 복원되어 있다. 사람들은 생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냥 살게 내버려두지..."

 

 

 

 

 

 

 

그랬다.

고향으로 내려와 살고자 하는 그를 언론과 검찰은 왜 그리도 야박하게 그를 공격했을까? 사람듥의 말처럼 그냥 살게 내버려두지를 못하고. 그가 죽자 언론도 검찰도 잠잠해졌다. 꼭 죽여야 직성이 풀릴까? 한국사람의 보통 양심으로 볼 때에 노무현대통령처럼 양심적인 정치인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역대 대통령 거의가 몇 천억, 억억억 하는 정치자금을 받아 챙기며 대통령을 해 온것에 비하면 차라리 그는 순진한 대통령이다. 아니 힘이 없는 대통령이란 말이 맞을 것이다.

 

 

 

 

 

소년 노무현이 꿈을 안고 자란 곳. 생가는 소박했다. 작은 책상에 등잔불과 주판고동이 놓인 것이 퍽 인상 깊게 눈에 띤다. 상업학교에 다녔던 그가 쓰던 주판일까? 주판고동을 보자 초등학교 시절부터 주판공부를 했던 내 어린시절의 추억이 떠올랐다. 주판을 만지작거리며 취미로 주판을 연습한 덕분에 나는 주판 3단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계산기대신 샘을 할때는 주판고동을 튕긴다. 때문에 주판에 대한 애착이 크다.

 

그가 만약 은행시험에 낙방을 하지 않고 합격을 하였더라면 오늘 같은 비극은 없지 않았을까? 에이, 그의 불같은 투지와 야망으로 보아서는 은행에 들어갔더라도 평범한 은행원으로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고 했는데...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대통령의 꿈을 안고 태어난지도모른다.

 

생가를 지나자 대통령 사저가 나왔다. 그가 고향으로 내려와 막걸리 마시며 농부들과 소박하게 지내고 싶어 지었던 집.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낙향을 한 집. 그러나 그는 지금 그곳에 없다. 그의 영혼만 바람개비가 되어 집 주위를 맴돌뿐...

 

 

 

 

 ▲사저로 들어가는 입구

 

 

대통령 사저는 소박한 생가에 비하면 다소 위압적으로 느껴진다. 대나무가 병정처럼 도열해 있는 사저로 통하는 길 앞에는 경비원이 지키고 서 있다. 대통령 사저는 길에서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봉화산에 올라야 지붕이 보인다. 생가처럼 수수하게 안이 들여다 보이게 지을 수는 없었을까? 그랬더라면  그가 죽음까지는 가지않았을까? 괜한 생각이 든다.

  

사름들은 이 집을 두고 "아방궁"이니 어쩌니 하고 또 떠들어 댔다. 대통령의 사저를 짓는 비용은 7억원 정도 들어갔다고 한다. 물론 시골에서 7억원을 들여 짓는 집을 아방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돈은 서울 도심의 열평짜리 아파트 값만도 못한 돈이다. 사람들은 참으로 묘하다. 시골 고향에 내려와 집짓고 사는 물러난 대통령까지 물고 늘어지며 아방궁이니 호화저택이니 시비를 걸다니... 한국의 역대 대통령으로서는 유일하게 낙향을 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사저는 대지 1209평, 연건평 243평이라고 한다. 봉하마을 대통령 사저를 직접 설계한 건축가 정기용(2011.3.11 작고)씨는 대통령 사저가 아방궁이라고 항간에 떠도는 엉뚱한 말에 어처구니 없다고 하며 직접 해명에 나섰다.

 

"나는 두 가지를 마지막으로 가시는 길을 위해 밝혀야 한다. 한 가지는 세상 사람들이 TV 카메라에 비친 모습만 바라보는,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저에 관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통령이라기보다는 귀향한 한 농촌 인으로서 농부 노무현의 꿈꾸던 소박한 세계를 알리는 것이다.

봉하마을 사저는 내가 설계했기 때문에 건축가인 내가 제일 잘 안다. ……대통령의 사저는 재료로 말하자면 흙과 나무로 만든 집이다. 그리고 아방궁이 아니라 불편한 집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안채와 사랑채를 나누어 살았듯이,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동할 때에는 신을 신고 밖으로 나와서 이동하는 방식의 채 나눔 식 집으로…… 흙집에다가 도시 사람으로는 살기에 불편한 집이다…… 그리고 경호원들과 비서진들의 공간은 너무 떨어뜨리지 말고 한 식구처럼 생활하도록 하는 집으로 다소 커져 보이는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경호동을 안채와 붙여서 비서진들과 경호원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나는 중정형의 집으로 화답한 셈이다. (한겨레신문 2009년 5월 29일자 '내가 설계한 사저가 아방궁이라니…' 정기용/건축가)"

 

 ▲일본에서 온 관광객들이 기념품점을 둘러보고 있다.

 

 

그러나 이 집을 설계하고, 이 말을 남긴 건축가 정기용 씨도 세상을 등지고 없다. 이렇게 모든 것은 역사의 질곡 속에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대통령 사저를 지나니 사자바위와 부엉이 바위가 바라보이는 비교적 널따란 평지에 대통령 묘역이 나온다. 꽤 많은 사람들이 무더운 염천인데도 불구하고 땡볕에 서서 참배를 하고 있다. 일본에서 온 참배객들도 보인다. 그들은 자결한 대통령을 어떤 잣대로 바라볼까? 사저를 지내 묘역으로 갔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이 짧은 유서를 남긴 대통령의 뜻과는 달리 의외로 커 보이는 묘역이다. 묘역 입구에는 작은 연못이 사람들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처럼 설치되어 있다. 묘역 왼편에는 노란 바람개비가 대통령의 영혼을 쉴새없이 돌리고 있다. 참배공간에는 국민 참여로 조성되었다는 수천개의 박석이 빼꼭히 들어차 있다.

 

 

 ▲묘역에 새겨진 박석. 국민참여로 이루어진 하나하나가 묘비명처럼 보인다.

 

 

박석 하나하나에 국민들의 애도와 추모의 글이 새겨져 있다. 박석에 새겨진 글 전체가 비문을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제동>이란 박석도 보였다. 수많은 박석에 담긴 사연을 즈려밟고 묘지로 걸어갔다. 그가 죽은 후에도 유독 많은 사람들이 참배를 하며 애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나리에서는 가장 젊은 대통령으로 임기를 마치고 낙향을 해서 소박하게 살고자 했던 대통령의 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꿈은 1년도 채 못가서 뭇 언론과 권력의 몰매를 맛고 처첨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또 안타까워 할 것이다.

박석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또 말했다.

 

"끌끌, 그냥 살게 내버려 두지...."

 

 

 

 

▲무더운 여름에도 참배객들이 끊이지않고 있는 고 노무현 대통령 묘역

 

 

묘지는 고인돌 형태의 너럭바위(지하의 안장시설을 덮고 있는 남방식 고인돌 형태의 바위)를 봉분처럼 올려져 있다. 너럭바위 뒤로는 자연과 경계를 구분하는 곡장(묘역 뒤편 벽)이 짙은 갈색을 띠며 둘러져 있다. 그러나 벽은 다소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냥 자연과 경계가 없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고인의 뜻에 맞지 않았을까? 브란운 색깔의 철벽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너럭바위 위에는 "대통령 노무현"이란 여섯 글자가 묘비명으로 새겨져 있다. 그것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샤를르 드골 1890~1970"이란 묘비명을 연상케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삶을 보면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삶과 다소 흡사한 점이 있다. 드골이 큰 거인이라면 그는 작은 거인이라고 할까?

 

 

▲ "대통령 노무현"이란 비명이 새겨진 너럭바위 묘

 

 

드골은 1970년 80세로 사망하였을 때 그의 유언에 따라 간소한 가족장으로 고향에 묻혔다. 그는 유언에서 가족장으로 할 것과 대통령이나 장관들이 참배하는 것을 일체 금하였다. 그리고 생존 시에 그가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장애인이었던 그의 딸 안느의 옆에 묻혔다. 그는 바쁜 공무로 장애인이었던 그의 딸 안느를 잘 보살피지 못했던 것을 늘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의 딸 안느는 그보다 먼저 죽어서 시골 공도묘지에 묻혀 있었다. 한 시대 프아스의 영웅이었던 드골은 시골 공동묘지 장애인이었던 그의 딸 옆에 그의 딸 묘지만큼이나 작고 초라하게 묻혀있다. 이는 마치 노무현이 바쁜 공직생활로 그동안 놀아주지 못했던 손녀를 자전거에 태우고 다니며 즐거워했던 짧은 생활에 비유된다.

 

▲대통령직을 물러난 후 손녀와 자전거를 타며 가장 행복 했던 순간 

 

 

드골은 자신이 추진했던 헌법개정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자 임기를 3년이나 남겨 놓고 "나는 오늘 밤 12시를 기해 대통령직을 사임한다"란 짧은 하야성명을 남기고 그날 밤 파리에서 287km 떨어진 그의 고향 콜롱배로 낙향했다. 노무현은 임기 중에 낙향을 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대통령 중 임기가 끝난 후 유일하게 낙향을 한 대통령이다. 서울에서 500여 km나 떨어진 봉하마을로 낙향을 한다는 것은 우리나라 정서로 보아 내리기 어려운 결단이다.

 

그는 농촌으로 귀향하는 이유를 아름다운 자연으로 귀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농촌에서 농사도 짓고, 마을에 자원 봉사도 하며, 자연을 돌보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유기농법을 연구하고, 봉화산과 화포천 일대의 자연환경을 보존하여, 청소년 생태교육의 장을 만들며 소박한 삶을 살고자 하였다. 오리농법을 주방하며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그의 모습이 어른 거렸다. 손을 번쩍 든 손녀를 자전가에 태우고 노란 들녘을 달리던 순간이 그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부엉이 바위가 바라보이는 대통령의 길

 

 

 

 ▲대통령이 마지막 숨을 거둔 역사적인 부엉이 바위

 

 

묘역을 떠나 '대통령의 길'이란 팻말이 쓰인 길을 따라 봉화산을 올랐다. 그러나 대통령의 길이란 팻말은 봉하마을의 정서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무엇이든지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 그냥 봉화산 등산로란 말이 더 어울리지않을까? 대통령의 길을 따라 부엉이 바위를 끼고 봉화산 중턱에 오르니 거대한 마애불이 부서진 채로 바위틈에 끼어 있다. 양손과 왼쪽 어깨 부분이 훼손되긴 하였으나 전체적인 보존 상태는 좋은 편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마애불은 당나라 황후의 꿈에 한 청년이 나타나 자꾸만 괴롭히므로 신승(神僧)의 힘을 빌려 그 청년을 바위틈에 넣어 김해 봉화산의 석불이 되게 하였다고 한다. 그 청년은 지금도 바위틈에서 번뇌를 않고 있다는 것. 주변에는 유독 부서진 바위들이 많다. 대통령도 이 길을 걸으며 저 부서진 마애불처럼 번뇌를 앓았을까?

 

 

 

 

 

 

▲봉화산 중턱 마애불과 부서진 바위들

 

 

마애불을 지나면 곧 부엉이 바위로 연결되는 소로가 나온다. 대통령이 마지감 숨을 거둔 부엉이 바위 앞에는 경비병 두 명이 바위를 지키고 있다. 혹 누군가가 이곳에서 떨어져 죽을까봐 경비를 서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 사저가 그 부엉이 바위 밑으로 너무 가깝게 보인다. "대통령이 그토록 사랑하던 부엉이 바위가까이에 지붕 낮은 집을 설계한 내 탓이다"라고 했던 건축가 정기용 씨의 말이 떠오른다. 부엉이 바위와 멀리 떨어지게 설계를 하였다면 대통령은 죽지않았을까?

 

▲부엉이 바위에서 내려다 본 대통령 사저 

 

 

부엉이 바위에서 한 동안 대통령 사저를 바라보다가 정토원으로 향했다. 무더운 여름인지라 숨이 턱에 차고 등골에 땀이 흥건히 베인다. 정토원은 봉화산 정상 사자바위 밑에 들어선 작은 암자이다. 정토원 앞마당에는 수피가 울툴불퉁하게 생긴 배롱나무 한그루가 묘하게 뒤틀리며 서 있다. 백년은 족히 넘었을 배롱나무에는 선혈처럼 붉은 꽃이 피어있다. 100일을 핀다고 하여 백일홍이라고도 불리는 꽃이다.

 

백일홍 나무에는 제물로 바쳐진 자신을 대신하여 이무기와 싸운 장사를 기다리며 백일 동안 기도를 하다가 죽은 처녀의 무덤에서 피어났다는 백일홍에 대한 전설이 새겨져 있다. 사람의 혼백은 다시 환생을 하는 것일까?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 환생을 한다면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태어날까?

 

 ▲정토원

 

 ▲정토원 모셔진 영정

 

 

▲목포상고와 부산상고 출신의 두 대통령은 마치 형제처럼 보이기도...

 

 

정토원 수광전(壽光殿) 안으로 들어가니 노무현 김대중 두 대통령의 영정이 안치되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영정이 이곳에 모셔져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것은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형제처럼 보이는 두 대통령은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묘하게 상업고등하교 출신이다. 목포상고와 부산상고 출신의 두 대통령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같은 운명의 배를 탄 사람들이다. 그러다가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같은 해에 세상을 떴다. 노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해 눈물을 쏟아내던 김대중 대통령의 모습이 영정 속 포개진다. 젊은 대통령을 먼저 보내여 흘렀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그도 셍상을 등졌다. 이렇게 모든 것은 사라져 가는 것이다. 그런데 살아있는 동안 사람들은 그들을 그냥 가만 놓아두지 못한다.

 

사자바위에서 내려다보는 봉하마을은 겉으로는 평화롭게만 보인다. 벼 이삭이 자라 푸른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그러나 대통령 사저가 있는 들판은 어쩐지 푸름보다 짙은 슬픔이 베어있는 것 같다. 그 푸른 들판에 그림 하나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노무현 대통령의 웃는 모습이다. 밀짚모자를 쓰고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 밑에는 "내마음속 대통령"이란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만감이 교차하는 모습이다. 오리농법으로 유기농을 실천하며 고향에서 살고자 했던 대통령! 그러나 소박한 대통령의 꿈은 산산이 부서진 채 봉하마을에 그 혼백이 파편처럼 여기저기 꽂혀 있다. 최초로 고향에 낙향을 하여 살고자 했던 대통령의 꿈! 그것은 부서진 채 바위틈에 끼어 있는 봉화산 마애불처럼 고뇌에 찬 대통령의 꿈이었다. 

 

봉화산에는 유독 부서진 바위가 많이 눈에 띠었다. 봉화산을 내려와 다시 묘역을 지나게 되었다. 묘역 입구에는 방문객들의 사인을 받는 방문록이 비치되어 있다. 사름들은 대통령을 그리며 방문록에 사인을 했다. 무더운 여름인데도 참배객들은 끊임없이 찾아왔다. 시골에서 온 단체 방문단도 있었다. 어떤 아주머니가 방문록을 적으며 말했다.

 

"쯧쯧, 그냥 살게 내버려 두지..."

 

그랬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렇게 무자비하게 영혼을 짓밟을 수 있을까?  그냥 살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을까? 봉하마을을 떠나며 한 사람의 일생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