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섬진강일기

지리산에도 벼이삭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찰라777 2011. 9. 7. 11:57

 

햇볕만 쨍쨍 더 내리쪼여 준다면…

농부들의 삶과 꿈이 영글어가는 황금들판을 걷다!

 

 

여름 내내 장마와 폭우로 햇빛을 쐬어 본지가 손가락 꼽아 세어 볼 정도였으니 사람도 나무도 모두 햇볕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햇볕을 갈망하고 있는 농부들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 갈 정도입니다. 더욱이 논과 밭에서 익어가는 오곡백과(五穀百果)는 정말로 햇볕이 필요할 때입니다.

 

 

익을수록 고개를 수그리는 벼이삭

 

 

 

 

다행히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인다는 처서가 지난이후부터 해님이 구름 속에서 보일 듯 말 듯 숨바꼭질을 하더니 며칠째 태양이 작열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요즈음 그 귀한 해님을 맞이하러 아침 일찍 들판으로 산책을 나가고 있는데, 햇빛을 받은 벼이삭이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매일 조석으로 걸었던 산책길이지만, 지난여름 내내 비가 쏟아지는 날이 워낙 많았던지라 한동안 산책을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다니는 산책길은 북쪽으로는 지리산, 동쪽에는 백운산, 그리고 남쪽과 서쪽으로는 계족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한가로운 들판길입니다. 거대한 산줄기 사이에 삼각형으로 델타지역을 이루고 있는 들판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멀리 구례읍까지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습니다.

 

 

 

 

이 들판은 조선 시대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도 언급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름지다는 땅입니다. 택리지에 보면 "봄에 볍씨 한 말을 뿌려 가을에 예순 말을 수확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기름진 구례 땅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름진 땅이라 해도 사람이 가꾸지 않고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풍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침이슬을 머금은 벼이삭들은 아직 덜 익은 채로 푸른색을 띠고 있습니다. 최근까지도 비가 내린 날이 워낙 많았던지라 익을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금년은 예년보다 절기가 열흘가량 빨라진데다 기상악화로 수확시기도 예상보다 늦추어 지고 있습니다. 햅쌀을 비롯하여 밤과 감 등 과일의 수확량도 크게 감소할 것 같다는 보도에 농부들은 걱정을 태산 같이 하고 있습니다.

 

 

 

 

산책을 하다가 논에서 물고를 손보고 있는 수평리 마을 이장님을 만났습니다. 부지런한 이장님은 하루에도 몇 번씩 논과 밭을 둘러보곤 합니다. "추석 전까지 이대로 햇볕만 쨍쨍 내리쪼여 준다면, 예년보다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수확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디… 날씨가 문제여. 하늘이 돌보아 주기를 기도할 수밖에…." 이장님은 이마에 흐른 땀방울을 닦아내며 하늘을 쳐다봅니다.

 

그러나 그 모진 폭우와 태풍에도 씩씩하게 자라준 벼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일 년 내내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농부들의 '삶과 꿈'이 영글어 가고 있는 숭고한 순간입니다. 작은 볍씨가 뿌리를 내려 싹을 틔우고, 이삭을 패어, 알갱이로 영글어져서 쌀로 변하는 볍씨의 일생은 장렬하기 그지없습니다.

 

 

 

 

익을수록 고개를 수그리는 겸손함을 보여주는 벼이삭은 존엄스럽기까지 합니다. 잘 익은 벼이삭은 목이 잘려 껍질을 벗는 아픔을 견디며 흰쌀로 거듭나서 우리들의 밥상에 올라 장렬한 일생을 마칩니다. 그리고 몸통은 소의 먹이나 혹은 거름이 되어 다시 고스란히 흙으로 남김없이 돌아갑니다.

 

이렇듯 볍씨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온 몸을 남을 위해 희생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연의 섭리를 거슬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욕심은 오히려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여 하늘과 땅을 화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인간에 의해 파괴된 자연은 이상기온을 몰고 와 하늘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비바람이 내리고, 땅에는 예고도 없이 지진과 해일이 몰아치며 지구에 대재앙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걸어야 할 시골길

   

 

 

하얀 백로들이 다랑이 논에서 먹이를 쪼아 먹다가 발자국 소리에 놀라 후다닥 비상을 하더니 저만치 날아가 논두렁에 다시 앉아있습니다. 고요한 아침식사를 하는 그들을 놀라게 하여 미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녀석들은 더 멀리 날아가 소나무 위에 살포시 내려 앉아 있습니다. 소나무 위에 앉아 있는 백로가 지리산 운해와 절묘하게 어울려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아름답다 못해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행운을 상징하는 토란잎이 다이아몬드 같은 이슬을 머금은 채 우산처럼 하늘을 향해 푸른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논두렁에는 닭의장풀이 파란 꽃대를 내밀며 앙증맞게 피어 있습니다. 밤새 피어있던 달맞이꽃이 날이 새자 고개를 웅크리며 꽃잎을 오므리고 있습니다. 나팔꽃이 푸른 하늘을 향해 힘찬 희망의 기상나팔을 불어주고 있습니다. 들판 건너 지리산 왕시루봉에는 하얀 운해가 환상적으로 띠를 두르고 있습니다.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에 섬진강이 흐르고 있는 이곳은 안개와 운해가 날마다 다른 풍경을 선물해주고 있습니다.

 

 

 

 

 

찬란한 가을 아침, 고요한 이 논두렁길을 걸어가는 마음이 너무나 상쾌합니다. 다행히도 '지리산둘레길'에서 살짝 빗겨난 들판은 조용하고 한적합니다. 지리산둘레길은 너무나 많이 알려진 탓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소란하고 더러운 길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둘레길을 찾아 걷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길바닥 아무데서나 취사를 하며 술판을 벌리고 여기저기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있어, 아름다워야 할 둘레길이 추한 길로 변해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 농부들이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있는 시골길은 그냥 걷기조차 미안한 그런 길입니다. 비지땀을 흘리며 일을 하는 농부들 곁을 조심스럽게 걸어가도 시원치 않은 데, 술판을 벌리며 고성방가에다 쓰레기로 몸살을 앓게 하다니 당치도 않는 일입니다. 둘레길이나 시골길을 걸을 때에는 항상 감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제주도에 '올레길'이란 길이 생긴 이후 각 지방마다 둘레길이 경쟁적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습니다. 길은 어디나 뚫려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꼭 이름을 붙여 사람들이 떼거리로 몰려들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올레길이나 둘레길은 원래 스페인의 산타아고로 가는 순례길을 모방하여 만든 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별 의미도 없이 오히려 농부들에게 피해를 주며 마구잡이식으로 길을 내는 것은 한번쯤 깊이 생각을 해볼 문제입니다.

 

이대로 조금만 더 햇볕이 쨍쨍 내리쪼여 준다면…

 

수평리 마을에서 지리산을 바라보고 걷다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백운산 자락을 향해 걷게 됩니다. 다랑이 논이 층계를 이루고 있는 이 길은 제법 경사가 있습니다. 평지만 걷는 것보다는 오르락내리락 변화가 있는 길을 걷는 것이 훨씬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백운산에도 운해가 모락모락 피어나며 하얀 면사포처럼 산허리를 두르고 있습니다.

 

 

 

 

 

다랑이 논에는 일부 밭농사도 짓고 있습니다. 풋고추가 빨갛게 익어가며 고개를 숙인 채 도열해 있습니다. 밭두렁에는 호박이 여기저기 넝쿨째 익어가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보라색 나팔꽃이 풍년을 예고하듯 힘차게 기상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밤나무에는 밤송이가 옹골차게 영글어 가고 있습니다. 성질 급한 녀석은 벌써 밤송이를 쫙 벌려 알토란같은 밤알을 살짝 내밀고 있습니다. 감나무에 열린 감도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아, 어떤 감은 새들이 벌써 쪼아 먹었군요.

 

 

 

 

 

 

 

초가을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아침산책의 종착지인 작은 저수지에 도착했습니다. 오, 이 아름다운 수채화! 작은 저수지는 벼들에게 물을 공급해주는 역할 외에도 마법사처럼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오늘따라 명경처럼 맑고 잔잔한 저수지는 지리산 운해를 절묘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푸른 버드나무가지가 잔잔한 물빛에 거꾸로 투영되어 그대로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거꾸로 보이는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던 그런 풍경입니다.

 

 

 

 

 

이슬을 털며 논두렁길을 걷다보니 바짓가랑이가 흥건히 젖어 있습니다. 그래도 마음은 흐뭇하고 행복합니다. 집에 돌아오니 담쟁이에 핀 박주가리 꽃잎에 호랑나비 두 마리가 춤을 추며 꿀을 빨아먹고 있습니다. 한 마리는 얼룩덜룩한 진짜 호랑나비이고, 다른 한 마리는 황백색 띠무늬가 선명한 산제비나비입니다.

 

나비들은 수시로 파르르 날갯짓을 하며 박주가리 꽃 속에 입을 내밀어 평화롭게 꿀을 빨아 먹고 있습니다. 꽃은 나비에게 꿀을 내주고, 나비는 발가락에 꽃가루를 묻혀 꽃의 번식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모두가 자연의 순환 고리에 따라 상부상조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제논은 '인생의 목적은 행복에 있고, 행복은 자연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선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 갈 때에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들판에 자란 벼와 아무렇게 피어 있는 야생화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우는 그런 아침입니다.

 

"이대로 햇볕만 쨍쨍 내리쪼여 준다면…" 간절한 바람을 담은 이장님의 말씀이 다시 떠오릅니다. 결실의 계절, 햇볕이 쨍쨍 내리 쬐여 벼이삭과 오곡백과가 실하게 영글어서 수고를 아끼지 않고 땀을 흘린 농부들에게 풍년을 안겨주기를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