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다고 행복할까?
4호선 전동차를 타고 남부버스터미널에 내리니 8시 정각에 출발하는 버스 시간이 15분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지하에서 내려 버스를 타는 데까지 가고 나면 시간이 얼추 맞을 것 같았습니다. 터미널 입구에는 우리 부부 말고도 열 한 명의 보살님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들과 함께 화엄사 선등선원에서 동안거 수행정진을 하고 계시는 스님들을 위한 대중공양을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대중공양이란 불교신도들이 음식과 다과 등을 준비하여 용맹정진하고 있는 스님들께 대접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11분의 보살님들이 대중공양을 위한 음식꾸러미를 6상자나 준비를 하여 택시에 싣고 왔습니다. 우리는 그 짐을 버스 짐칸에 정성스럽게 실었습니다.
8시 정각에 버스가 출발했습니다. 버스는 복잡한 서울 도심을 벗어나 아직 눈이 채 녹지 않은 들판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붉은 태양이 저 산 너머로 이글거리며 떠올랐습니다. 흰 눈이 쌓인 논과 밭, 나무들이 차창 밖으로 끊임없이 지나갔습니다. 세월은 이렇게 창밖으로 무심히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버스에서 차창 밖으로 펼쳐진 시골 풍경을 바라보니 마음이 한가해집니다. 버스가 대전을 지나가자 나는 가방에 넣어둔 책 한 권을 꺼내들었습니다. 일본의 환경운동가 쓰지 신이치의 <슬로 라이프>란 책입니다. 그는 한국계 일본인으로 '느림의 철학'을 실천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오후의 낮잠, 텃밭이 있는 생활, 친구들과의 잡담, 정원가꾸기, 아침산책, 일요 목공, 비폭력 평화... 그가 추구하는 삶은 '느림의 삶'입니다.
그러나 돈, 효율, 경제성장 같은 것을 우선시하는 우리 사회는 먼 동화속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단어들입니다. '패스트 라이프'를 살아가면서 삶에서의 사소한 즐거움, 편안함, 한가함 등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슬로 라이프>란 책을 읽다 보면 우리는 삶에 있어서 가치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하고 새로운 삶의 국면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버스는 남원 인근 오수라는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곧 구례에 도착했습니다. 남부터미널에서 구례까지 오는 데 딱 3시간이 걸렸습니다. 임진강 동이리에서 서울 우리 집으로 가는 시간보다 무려 1시간 반이나 덜 걸리다니…. 현대는 거리의 개념을 시간으로 따지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4시간 반이면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면 홍콩에 닿을 수 있는 시간이 됩니다. 과연 시공을 초월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그렇게나 빨리 가도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걸어서 가는 것보다 생활은 더욱 바빠지고 있으니 참 이상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빠르게 간 시간을 남겨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데 그곳에 도착하면 더욱 바쁘게 움직이니 빠르다고만 해서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빨리 가기 위해서 자동차와 비행기를 발명했는데, 자동차와 비행기를 타고 빨리 간 사람들은 더 바쁘게 움직이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더구나 자동차와 비행기는 소음, 배기 가스를 일으켜 대기를 오염시키고, 운동부족에 따른 비만으로 도시인들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세계인구의 절반이 도시로 집중된 인구는 자동차가 일으킨 교통 혼잡으로 오히려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한 보고서에 의하면 런던 시내를 달리는 자동차의 속도는 100년 전 마차의 속도와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자동차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속도보다 훨씬 느리게 되는 역 현상이 도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동차로 인해 일어나는 교통사고에 의한 사망자는 매년 88만 5천 명, 대기 오염 관련 질환으로 사망하는 사람의 연간 추정치는 300만 명에 달해, 이는 전쟁으로 인한 사망을 크게 앞질러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삶이 빠르다고 행복할까요?
무지개 터널을 지나
고궁 같은 느낌을 주는 구례버스터미널에...
이야기가 좀 빗나갔군요. 전주에서부터 버스는 마흔 개도 넘는 터널을 지나간 것 같습니다. 전주 순천간 고속도로는 산과 산 사이를 터널로 연결해 놓고 있습니다. 드디어 무지개 터널이 보입니다. 이 무지개 터널을 지나면 곧 구례에 도착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절의 고을 구례!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서울에서 먼 과거의 세계로 회귀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와를 올린 터미널의 예스런 풍경이 마치 어느 고궁에 온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곳에 살 때에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산듯하게 완공을 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였군요. 우리나라에 이런 우리고유의 미풍양속을 살릴 수 있는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으면 좋겠습니다.
날씨도 화창하고 터미널 풍경이 마음을 매우 평화롭게 하여줍니다. 고개를 드니 지리산이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길게 누워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습니다. 아아, 지리산! 그리고 섬진강! 언제 찾아도 어머니 가슴처럼 포근 한곳입니다.
버스에서 내리니 각초스님의 상자이신 혜담스님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혜담 스님은 두 대의 자동차를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한 대는 스님 차이고 또 한대는 봉고차를 렌트를 하여 대기를 시켜 놓았다고 했습니다.
나는 졸지에 봉고차 운전사 겸 가이드가 되었습니다. 1년 전에 이곳 지리산 자락에서 살았던 나는 일행 중에 누구보다도 이 지역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봉사를 하게 하여준 스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봉고차에 보살님들을 태우고 화엄사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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