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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을 따라간 목포여행

찰라777 2013. 4. 17. 10:52

목포 출신 문일석의 노랫말과 이난영이 부른

 

불후의 명곡 <목포의 눈물>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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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도에서 바라본 목포항과 유달산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부두의 새악씨 아롱 젖은 옷자락/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호남선 종착역인 목포역에 내리니 '목포의 눈물'이 애잔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봄기운이 완연한 4월 13일, 플랫홈을 밟는 순간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찡해지며 코끝이 시큰해진다. 

 

우리나라 국도 1.2호선의 기점인 목포는 항구다. 목포하면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목포의 눈물'이란 이난영의 노래다. 톡~ 쏘는 홍어에 막걸리 한잔 마시고, 나무젓가락 두들기며 부르는 노래는 '목포의 애국가'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모두가 애창하는 노래다. 목포의 눈물은 20세기 우리나라 서민들 사이에 가장 많이 불려왔던 민초들의 노래다.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오는 목포역 플랫홈

 


'목포의 눈물'은 일제 강점기인 1935년 19세 소녀가수 이난영이 부른 '울분'과 '저항'이 담긴 노래다. 그 당시 호남은 기름진 쌀과 목화를 일제에 침탈당해 목포 항구에서 일본으로 실려갔다. 일제의 핍박하에 민초들은 헐벗고 굶주리렸다. 다도해를 오가는 연락선, 젊은이들이 징병으로 실려 가는 기차… 목포는 이별의 항구인 동시에 만남의 항구였다.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항구도시 목포에는 언제나 민초들의 눈물이 바다를 적시는 설움의 북받치고 있었다.

 

'목포의 눈물'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목포의 눈물'이란 노랫말에 깔려 있는 저항 정신이다. 1934년 조선일보사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고통 받던 우리민족의 고유정서를 북돋우기 위해서 오케레코드사와 함께 향토노래 가사를 공모했다. 그 때 목포의 무명시인 문일석(본명 윤재희 1916년생)이 응모한 작품 '목포의 사랑'이 3천여 편의 응모작 가운데 영예의 1등으로 당선되었다.

 

유달산에서 바라본 전설의 삼학도. 저곳에 이난영의 유해가 수목장으로 안장 되어 있다.

 

천재시인 문일석은 일본와세다 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후 무명시인으로 목포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조선일보사에서 노랫말 가사를 공모한다는 소식을 듣고, 24세 때 '목포의 노래'를 습작으로 지어 응모했다. 당시 일본 와세다로 유학을 보낼 정도로 명문가였던 그의 집안의 아들인 그가 유행가 가사를 응모하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자, 그는 문일석이라는 필명으로 응모하게 되었다고 한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문일석은 이 가사를 지은 후, 이 노랫말 때문에 28세(어던기록에는 26세라고도 함)의 젊은 나이로 유랑을 하다가 요절을 하고 만다.

 

그의 노랫말 중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이 일본을 겨냥한 것이라 하여, 그는  일본경찰에 끌려가서 호된 문초를 받게 된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란 가사는 3백 년 전 이순신 장군이 고하도와 유달산 노적봉 밑에 진을 치고 있어, 왜적들이 그 당시에는 꼼짝도 못했던 곳이었다는 내용은 담고 있다. 사실 노랫말 속에는 그 당시 한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노랫말에서 문제가 된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오케레코드사에서 이 노래를 음반으로 제작하여 일제의 검열을 받으러 가자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이란 가사가 문제가 되어 통과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 당시 오케레코드사의 이철 사장은 '원한'은 인쇄과정에서 착오가 일어나 '원앙'을 잘못 표기한 것이라며, 삼백연(三栢淵)의 바람이 사이좋은 원앙새처럼 노적봉으로 편안하게 분다는 뜻으로 둘러대어 검열에 통과를 시켰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일제 감점기가 끝난 후 '삼백년 원앙풍'은 다시 '삼백년 원한 품은'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노랫말 중 '임 자취 완연하다'는 이순신 장군의 넋과 정신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으며, '유달산 바람'은 민족의 정기를 의미한다. 문일석의 민족의 설움을 노랫말에 은근히 숨겨 담았다.

 

그러나 그는 이 노랫말 때문에 일제의 감시와 징용을 피해 함경남도 함흥 산골 공사장에서 숨어살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무명시인으로 불우한 생을 문일석, 그는 한낱 유행가에 그친 노랫말을 지은 것이 아니라,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는 노랫말 하나를 짓고 쓸쓸하게 숨져 갔다.

 

목포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목포출신 무명시인이 문일석이 지은 가사는 묘하게도 목포출신 무명가수 이난영이 부르게 되는 운명을 만나게 된다. 본명 이옥례. 당시 19세의 소녀가수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을 부르면서 하루아침에 일약 유명 가수로 발돋움을 하게 되었다.

 

1916년 목포에서 태어난 이난영은 항상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와 지독한 가난 때문에 집을 떠난 이후 삼촌댁에서 더부살이 아이로, 제주도에서 아이보개로, 떠돌이 유랑극단의 식모살이와 무명의 막간 가수로 살아가야만 했다.

 

유달산에서 바라본 목포대교와 고하도

 


그러다가 1930년 초반 그녀는 태양극장의 막간 무명가수로 일본공연에 참가하게 된다. 그 무렵 태양극장 단장이었던 박승희가 무명가수 이옥례에게 '이난영'이란 예명을 지어 주었다. 1935년 그녀의 나이 19세에 생애 최고의 날이 찾아왔다. 한국가요사에서 불후의 명작인 '목포의 눈물'을 부르게 된 것. 이난영 특유의 콧소리로 흐느끼 듯, 잔잔하게 애간장을 토막토막 끊어내는 듯 부르는  그녀의 창법은 단번에 그녀를 엘레지의 여왕으로 등극시켜 놓고 만다.

 

그러나 이난영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남편인 작곡가 김해송이 한국전쟁 발발로 실종되자 홀로 자녀들을 키우면서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 가수 남인수와 사실혼 관계로 지내다가 남인수 마저 세상을 뜨자 홀로 외롭게 살아가다가, 1965년 삼일절 기념공연을 마지막으로 서울 중구 회현동에서 심장마비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게 되다.

 

국도 1.2호선의 기점표시석


 "노래는 추억의 묘지명"이라고 한다. 그만큼 노래 한곡에는 한 개인의 추억, 슬픔, 애달픔, 고뇌… 그리고 그 시대 사회의 시대상황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목포의 눈물'은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 민족의 망향가였고, 해방 후에는 설움 받는 전라도 사람들의 시름가였다.

 

호남인들은 오랜 지역차별로 받는 설움을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열렬하게 해태타이거스 야구단을 응원하면서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었다. 하여, 목포의 눈물은 호남인들의 응원가가 되었으며, '목포의 애국가'라고까지 불려지게 되었다. 또한 민주투쟁에서는 장렬히 산화한 열사들에 대한 진혼가가 되기도 했다.


목포역에서 택시를 타고 유달산으로 갔다. 국도1.2호선 기점을 나타내는 표시석에서 내려 유달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석양노을이 지는 유달산에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나는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서 잠시 젊은 나이에 유랑을 하다가 요절한 목포의 눈물 노랫말을 지은 문일석을 생각했다.

 

빛으로 둘러싸인 목포 시내 야경

 


그러나 노적봉은 말이 없었다. 임자취는 완연하나 일제의 구둣발에 밟힌 정조의 흔적이 남은 목포.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어왔다. 일제도 이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은 어찌 할 수 없었으리라. 문일석은 목포항과 영산강을 바라보며  임(해방)을 그리면서 목포의 노래를 지었을까?

 

높이 228m의 유달산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호남정맥의 땅끝에 우뚝 선 마지막 명산이다. 신선이 춤추는 듯한 형상을 가진 유달산은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 영혼이 거쳐 가는 곳이라고 한다.

 

오랜 옛날부터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유달산 일등바위(율동바위)에서 심판을 받은 뒤, 혼령이 이등바위(이동바위)로 옮겨져 대기하고 있다가, 저승길에서 극락세계로 가는 영혼은 세 마리 학(삼학도를 가리킴)이나, 고하도 용머리의 용에 실려 떠난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유달산 얼굴바위

 

유달산에는 노적봉을 비롯하여 얼굴바위, 고래바위, 종바위, 마당바위, 거북바위, 남근석, 여근석 등 오랜 세월 풍파로 다듬어진 수많은 기암괴석들이 곳곳에 포진을 하고 있다. 바위를 감상하면서 오르다가 이난영의 노래비가 세워진 곳에 다다랐다. 이난영의 노래비는 불빛이 하나 둘 켜지는 목포 시내를 바라보고 있다.

 

유달산 중턱에 있는 이난영 노래비

 


유선각을 지나 마당바위로 올라갔다.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어와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마당바위에 서니 목포 야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유달산과 고하도를 잇는 목포대교가 한줄기 선율처럼 반짝거린다. 빗 바랜 항구도시 목포는 어느 듯 빛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목포는 야경으로 훤해진 밤거리보다는 옛날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오래된 모습이 더 정감이 간다.


너무 어두워져 일등바위까지 오르기엔 무리가 있을 갓 같았다.나는 일등바위 밑 마애불을 새겨 놓은 바위로 갔다. 그 밑에서 일등 바위를 쳐다보니 붉은 동백이 환하게 피어 있었다. 그 일등 바위 위에는 조각달이 떠 있었다. 시인 문일석도 이 조각달을 바라보았을까? 그의 영혼이 조각달이 되어 아직도 목포를 잊지 못하고 일등바위를 떠도는 것일까? 함경도 어느 오지에서 한줌의 재로 남아있을 문일석.

 

일등바위 밑에 피어난 동백과 마애불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는 임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내가 찾은 날 밤 목포는 그랬다! 조각달이 일등바위로 흘러가고 항구에는 굳은 절개로 맺은 목포의 사랑이 있었다. 저 조각달은 일등바위를 떠도는 무명시인 문일석일 수도 있고, 소녀가수 이난영일 수도 있다.

 

유달산 일등바위 위에 떠 있는 조각달

 


4월 11일은 목포가 낳은 불세출의 가수 이난영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경기도 파주공원묘지에 있던 이난영의 유해는 지난 2006년 화장을 한 뒤 삼학도 중턱 20년 생 백일홍나무(배롱나무)아래 뿌려졌다. 고향을 떠난 지 그년 41년 만에 그녀가 태어난 목포 땅에 묻혔다. 이난영의 영혼은 일등바위에서 떠돌던 영혼이 삼학도를 나르는 세 마리 학에 실려 극락세계로 갔을까?

 

 

■유달산에서 바라본 목포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