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세운 계획 없이도 기차를 타고 싶다//덜커덩거리는 사념과 함께/후회 않는 시간 속으로//삶이란 바퀴를 굴려/달리고 싶은 여름날//못 마시는 캔 맥주도 시원히 터뜨리면서//간이역쯤 지나치는/철마에 실려 가면/창밖엔 세월도 멈춰 설/그 기차를 타고 싶다.”
시조시인 오영희 선생님이 기차를 타고 멀리 섬진강에서 임진강까지 왔습니다. 세월도 멈춰 설 그 기차를 타고 50년 전 추억을 더듬으며 임진강을 다시 찾았습니다.
섬진강변 하동송림이 고향이신 오영희 선생님이 반세기가 지난 긴 세월이 지난 후 임진강을 찾은 데는 숨겨진 깊은 사연이 하나 있습니다. 선생님은 50년 전 선생님은 이곳 연천군 미산면 우정리 임진강변에 위치한 ‘왕산초등학교’ 교사로 첫 부임발령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20대의 앳된 나이에 우리나라 최남단 섬진강에서 덜커덩거리는 기차를 타고 천리 길을 달려 최전방 38선 이북에 위치한 연천군 미산면 왕산초등학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간이역쯤 지나치는/ 철마에 실려 가면’ 어디가 나올까 알 수 없는 먼 길을 달려 온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당시 갓 결혼을 했던 선생님의 남편이 공병장교로 이곳 연천군 최전방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편 덕분(?)에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임진강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50년 전 추억이 담긴 왕산초등하교 교정
그런데… 남편을 따라 그 먼 길을 왔건만 정작 선생님의 남편은 곧 발령을 받아 부산으로 임지를 옮겨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홀로 임진강 변에 셋방을 한 칸 얻어 3년 동안이나 왕산초등학교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임을 따라 왔건만 임은 멀리 떠나버리고,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젊은 날을 보내야 했던 그 사연을 듣고 나니 지금도 참으로 애틋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이곳을 떠난 지 50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정말 ‘창밖엔 세월도 멈춰 설’ 긴 시간입니다. 선생님은 당시 왕산초등학교 시절 낳은 자식을 따라 현재 미국에 거주를 하고 있습니다.
반세기가 지난 후 태평양을 건너서, 기차를 타고 임진강을 찾은 선생님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오랜 세월 삶이란 바퀴를 굴려 인연 따라 다시 찾은 이 길은 가슴 아리아리한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찰라 선생님이 이곳에 살고 계시기에 제가 50년 전 추억의 길을 다시 찾게 되어 참으로 감개가 무량합니다.”
▲<오영의 50년 전 추억의 길>이란 플래카드까지 들고 임진강을 찾은 오영희 시인은 감격에 젖었다.
얼마나 감개가 무량했으면 <오영희 50년 전 추억의 길>이란 플래카드까지 들고 왔을까요? 플래카드를 들고 수줍은 듯 감격스러워하는 모습에서 50년 전 교사 발령장을 들고 왕산초등학교에 부임했던 그 때의 앳된 모습을 다시 엿보게 됩니다.
인연이란 참으로 지중한 것 같습니다. 오영희 선생님과 나는 2001년 인도여행을 함께 다녀 온 후로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2011년 지리산 섬진강으로 이사를 가자, 선생님은 자신의 고향으로 이사를 갔다면 태평양 건너 멀리 미국에서 뜨거운 갈채를 보내며 환영을 해 주었습니다.
그 후 내가 이곳 연천군 임진강변으로 이사를 왔다고 소식을 전했더니 “아이고, 50년 전 내 첫 교사 발령지로 이사를 하시다니 찰라 선생님과는 전생부터 때려야 땔 수도 없는 묘한 인연을 맺어 온 것 같습니다.”라고 하시면서 반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번 귀국 길에 저희 집을 방문하는 인연으로 50년 전 첫 부임을 했던 추억의 왕산초등학교를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며 반가워하셨습니다.
오전 10시, 나는 왕산초등학교에서 오영희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추억이 쌓인 왕산초등학교 교정에서 오영희 선생님과 함께 동행을 한 이근후 선생님, 그리고 두 보살님을 만났습니다. 두 분은 오래 전부터 한국석불문화연구회에서 함께 돌부처를 찾아다니며 인연을 맺은 후 지금까지 그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교실을 돌아보다가 마침 교장 선생님이 계시어 인사를 드리고 차 한 잔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곳 왕산초등학교는 1963년 공병장교로 근무를 하던 저희 남편이 교정의 터를 닦기도 했습니다.”
“아하, 그런 깊은 사연이 있었군요. 그럼 그 땐 분교 시절이었겠네요.”
“아마 그랬을 겁니다. 군남초등학교 왕산분교로 있다가 곧 왕산초등학교로 승격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학생 수가 몇 명이나 되는가요?”
“네, 7월 말 현재 53명입니다.”‘많이 줄었군요. 제가 근무를 할 당시에는 300명이 넘은 적도 있었는데…“
“인구가 자꾸 줄다 보니 학생 수도 점점 더 줄어만 가고 있어요.”
2010년까지 2,858명이 졸업생을 배출해 냈던 왕산초등학교는 연천군의 인구가 줄면서 학생 수도 점점 줄어들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교장선생님과 함께 교정 앞에서 기념사진을 한 장을 찍고 학교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화이트 다방에서 이근후 선생님의 제의로 추억의 <모닝커피>를 한잔 마시기로 했습니다. 오전 시간이 다 지나기 전에 추억의 모닝커피를 마셔야 이곳에 온 기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추억의 화이트 다방 앞에서
이곳 왕징면에는 화이트 다방을 비롯하여 화이트 펜션, 화이트 부동산 등 유독 <화이트>라는 문구들이 많이 보입니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 공병대 소속 화이트(White)소령이 북진을 하며 만들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건설 당시에는 통나무로 만든 기둥에 나무판자를 깐 길이 205m, 너비 5.4m의 좁은 다리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름철에 비가 많이 내리면 임진강이 범람하면 다리가 물속에 잡기고, 좁은 다리에서 추락사고가 잦아 1994년 임진교가 새로 건설되면서 화이트교는 2003년에 철거되었다고 합니다.
전설 속의 화이트교는 이렇게 사라졌지만 그 인근에 <화이트>라는 문구를 가진 이름들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화이트 다방>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화이트교 만큼이나 오래된 이 다방은 옛날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옛날 모습 그대로 간직한 황이트 다방 내부
빛이 바래고 녹슨 다방의 간판이 긴 세월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녹슨 다방 문을 들어서면 ‘입춘대길 만사여의형통’이란 부적이 붙여 있고 그 부적 가운데는 조릿대가 걸려 있습니다.
녹슨 연탄난로와 노란 주전자, 헤진 바닥 타일, 큼지막한 달력, 빛바랜 벽에는 도심여옥(道心如玉-도를 닦는 마음은 옥과 같다)과 요산요수(樂山樂水)란 오래된 액자가 걸려고 용이 승천하는 그림도 걸려있습니다. 화장실도 오래된 재래식 화장실 그대로입니다. 요즈음은 이렇게 오래된 다방을 찾으려야 찾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래된 화이트 다방에서 추억의 모닝커피를 마시며 월명수 보살님이 싸온 김밥을 아침 식사로 먹었습니다. 그리고 투박한 커피 잔에 노란 계란이 둥둥 떠 있는 커피 잔을 들고 오영희 선생님의 50년 추억의 길 방문을 축하하는 축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추억이 딤긴 모닝커피로 축배를 들었다.
둥그런 빵에 촛불대신 나무젓가락으로 불을 밝히고 ‘오영희 50년 전 추억의 길’을 축하하는 노래도 불렀습니다. 이 노래는 이근후 선생님의 생일을 축하 노래이기도 합니다. 올해로 팔순을 맞이하신 이근후 선생님은 날마다 눈을 뜨고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고 하시면 1년 365일 동안을 날마다 생일로 맞이하기로 하셨다고 합니다.
이근후 선생님의 행동과 말씀 하나하나는 오랜 세월 축적된 소중한 삶의 지혜와 해학이 담겨있어 늘 감동을 받곤 합니다. 요즈음 뒤늦게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란 책을 펴내시고, 매일 쇄도하는 강연요청으로 바쁘신 데도 불구하고 귀한 시간을 내 주신 이근후 선생님이 고맙기만 합니다.
▲작은 빵에 촛불 대신 나무젓가락을 꼽고 축하노래를...
두 분 어르신은 저에게 있어서는 마치 어버이처럼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해주고 계시는 소중한 분들입니다. 아내가 난치병으로 사경을 헤맬 때에도, 내가 어둠 속에서 방황을 할 때에도 두 분은 내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며 격려를 하여 주었습니다. 지금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나는 두 분에게 주저하지 않고 상담을 하곤 합니다.
이번 여름 오영희 선생님께서 상병 치료차 귀국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두 분 어르신을 금가락지로 모시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내 손으로 키운 야채에 따뜻한 밥 한 그릇이라도 대접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그 귀한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화이트 다방에서 모닝커피를 마신 후 두 분 어르신을 모시고 금가락지로 왔습니다. 야생에서 키운 오리 두 마리를 사와 오갈피나무와 마늘, 녹두를 곁들여 가마솥에 넣고 오리백숙을 끓이고 있는 동안 아내는 텃밭에서 따온 야채로 반찬을 정성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오리백숙은 마침 나의 절친한 친구 꽁지머리 응규가 와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폭폭 끓여 제대로 요리를 했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때는 일이라든지 백숙을 끓이는 일 등 야생에서 요리를 하는 그의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잘해내는 친구입니다. 오리는 백학면 통구리에 있는 야산에서 기른 것인데 맛이 그만입니다.
▲손수 기른 야채에 마음의 보양식을 끓여 두 분 어르신께 공양을 드렸다.
팔십 노구를 이끌고 이 더운 한여름에 최전방 오지까지 찾아주신 두 분께 우리들의 정성이 담긴 마음의 보양식을 정자에 차리고 공양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담소를 하며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어 금가락지를 방문한 두 분 어르신께 감사를 드리며
“우리가 찾아가 친견하지 않으면 외로우시리/들녘 산속에 홀로 천년을 계신 석불님/전생의 내 모습 찾아/이렇게 뵙니다.” 오영희 선생님이 50년이 지난 후 왕산초등학교를 다시 찾은 사연은 마치 선생님의 시 ‘석불 앞에서’에 나타난 사연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제 오영희 선생님은 섬진강 자락에서 태어나 오랜 삶 연륜을 쌓아 오시며 과거‧현재‧미래 삼세를 넘나들며 정신세계를 펼쳐가고 있습니다. 섬진강 시인에서 태평양을 건너 멀리 미국 땅에서 아메리카 시인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오늘 8월 13일, 오영희 선생님은 50년 추억을 더듬으며 한 여름 더위가 작렬하는 임진강변을 거닐며 추억의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반세기 전 처녀 적 앳된 마음으로 첫 부임지인 임진강변을 걷고 있습니다. “덜커덩거리는 사념과 함께/ 후회하지 않는 시간 속으로/ 삶이란 바퀴를 굴려/달리고 싶은 여름날”을 후회 없이 걷고 있습니다.
점심을 먹고 있는 정자 앞으로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임진강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오랜 삶 연륜이 감겨 수척해진 그 물빛”처럼 임진강은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50년 만에 찾아오신 오영희 선생님의 임진강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