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억만 년 후의 미륵부처를 만나다
우선 첫 인상이 넉넉하다. 큰 귀, 오동포동하고 둥그스름한 볼에 두툼한 입술, 지그시 감은 눈, 머리에 아무렇게나 쓴 모자는 들에서 일을 하는 농부가 뒤집어 쓴 밀짚모자처럼 털털하게 보여 왠지 친근감이 더해진다.
짜리몽땅한 목덜미를 따라 가슴팍으로 내려오면 역시 오동포동한 손에 둥그런 구슬처럼 생긴 여의주를 들고 있다. 내 눈엔 여의주라기보다는 그저 옥구슬처럼 보인다. 일자로 뻗어 내린 몸통은 농부의 똥배처럼 둥글다. 나는 고향의 아저씨처럼 반겨주는 돌부처 미소 앞에 엎어져 삼배를 했다.
“오냐, 너 참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잘 있었느냐?”
“네, 아저씨도 잘 계셨나요?”
돌부처는 대답대신 미소로 답한다. 몸통은 햇볕에 탔는지 불에 그을렸는지 검게 보이지만 얼굴은 희고 귀티가 난다. 밀짚모자 덕분일까? 나는 잠시 가부좌를 틀고 다시 돌부처를 바라본다.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돌부처는 마치 하늘에서 막 내려온 미륵부처님처럼 자비롭게 보인다. 나는 지금 56억 7천만 년 후에 출현하신다는 미륵부처를 친견하고 있다.
민초의 희로애락을 모두 끌어 안아주겠다는 듯 돌부처의 모습은 자비롭기 그지없다. 그 포근한 미소와 털털한 품에 안기고만 싶다. 아무도 없는 공터, 나는 가부좌를 풀고 석실 한편에 기대 앉아 하염없이 미륵부처를 바라본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에 안겨 있는 듯 포근하고 편안하다.
무릇 부처의 모습이란 이렇게 편안해야 한다. 경주 토함산 석굴암에 갇혀 있는 부처님이 다소 귀족적인 모습이라면, 이곳 월악산 기슭 미륵리에 들판에 서 있는 돌부처는 민초와 가까이 있는 민중의 부처님이다. 그래서 나는 이곳 미륵사지의 돌부처를 더 좋아한다.
일주문도 없다.
종루도 없다.
큰 법당도 없다.
일주문 대신 연분홍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며 도량을 장식하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너머로 미륵부처님 한 분이 천년의 미소를 가득 머금고 서 있다. 그 꾸밈없는 미소에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 진다.
56억 7천만 년 후에 출현한다는 미륵부처의 모습이 과연 저런 모습일까?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포함산 기슭에 자리 잡은 충주 미륵대원지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당간 지주와 거대한 돌거북, 오층석탑과 석등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태고의 모습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의 유적을 방불케 한다.
높이 10.6m의 돌부처는 ‘ㄷ’ 자 형태의 석실로 둘러싸여 있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으로는 최초에는 석굴암 형태의 법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고려 초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거대한 가람 터는 가람은 몽고군에 의해 불에 타 부서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후 고려 말 또는 조선 초기에 중건하고,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18세기 무렵 중건했으나 1936년 홍수로 폐사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복원을 한 것이다.
석불은 특이하게도 북쪽을 향해 망부석처럼 서 있다. 미륵사지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왕자인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품고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 일행은 망국의 한을 안고 권토중래 신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병사를 양병코자 금강산으로 길을 가던 중 문경군 마성면에 이르게 되었다. 일행은 그곳 계곡 깊은 곳에 야영을 하고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날 밤 왕자는 관음보살을 만나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관음보살은 왕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에 이르는 큰 터가 있으니, 그 터에 절을 짓고 석불을 세워라. 그리고 그 곳에서 북두칠성이 마주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이루면 억조창생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을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마의 태자는 꿈이 신기하기에 누이동생인 덕주공주를 불러 꿈의 얘기를 자초지종을 전하자, 놀랍게도 같은 시각에 공주 역시 그와 같은 현몽을 받았다고 말했다. 두 남매는 맑은 계곡물에 목욕재계를 하고 서천을 향해 합장배례하며 관음보살의 현몽에 감사를 드렸다. 다음날 새벽 마의태자 일행이 서쪽을 향해 고개를 한터에 이르러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곳에 파란 별빛을 받고 있는 최고봉을 확인 한 후 그 자리에 석불입상을 세우고 마주보는 영봉 밑에 마애불상을 조각했다.
마의태자 일행은 이곳에 미륵사를 짓고 팔 년을 머물렀는데 그 동안 많은 신하가 법도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 덕주공주는 마의태자를 붙잡고 이곳에서 정착하기를 권했으나 마의태자는 애초의 뜻을 굽히지 않고 일부의 무리를 데리고 오대산을 향해 떠났다. 덕주공주는 이후로도 미륵사에 머물며 마의태자의 안녕을 빌며 평생을 지내다가 입적 하였다.
세월이 흘러 가람은 허물어지고 그 흔적만 뎅그렇게 남아 있다. 이곳 미륵리로 오기 위해서는 관음리와 이어지는 ‘하늘재’를 넘어야 한다. 망국의 한을 품고 하늘재는 넘어온 마의태자는 신라의 재기를 꿈꾸며 미륵부처로 환생하고자 했을까?
미륵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님 다음에 성불하여 중생을 주제할 부처님이다. 현재 보살의 몸으로 도솔천 내원궁에 머물면서 중생을 제조하고 계신다고 한다. 그리고 석가모니부처님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이 되는 시기에 이 세상에 화현하여 성불을 하고, 용화수 아래에서 3회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님이다.
그러나 100년도 못사는 이 중생에게는 56억년이란 세월은 가늠하기 어려운 세월이다. 56억년이란 세월ㅇ 비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의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순간의 시간 속에서도 우리 중생은 행복하지 못하다. 순간순간이 늘 불안하고, 고통스럽기만 하다. 지금 미륵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순간에도 오만가지 번뇌가 스치고 지나간다.
아, 미륵부처님이시여! 시공을 초월하여 시간을 앞 당겨 지금 오실 수는 없는지요? 그러나 돌부처는 그저 알듯 모를 듯 지그시 미소만 짓고 있다.
미륵부처님을 뒤로하고 냇물을 따라 내려오니 후박나무 밑 거대한 바위 위에 둥근 돌이 곧 미끄러질 듯 놓여 있다. 설명을 보니 고구려 온달장군이 힘을 키우고 힘자랑을 했다는 공기돌이라고 적혀있다. 전설은 전설을 낳고, 수천년 동안 전해 내려오며 신비감을 던져 주고 있다. 설혹 그 전설이 진실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그 전설을 재미 있어라 하며 믿고자 한다.
과연 미륵부처와 온달장군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평강공주는 바보 온달을 미륵부처 처럼 만들고 싶어까?
그래, 아무리 세상이 어렵고 살기가 팍팍하더라도 저 미륵부처처럼 웃고살자.
그런 야릇한 전설을 뒤로하고 나는 덕주공주가 터를 잡아 평생을 살았다는 월악산 덕주사로 발길을 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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