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 세계를 담은 정윤영 개인전, <안에- 있음>
'신체가 식물 같다'는 체험을 한 작가의 세계
젊은 화가 정윤영(27)의 <안에-있음>(In-Sein) 개인전이 11월 21일-12월 4일까지 서울 강남구 삼성동 <갤러리 마하>에서 열리고 있다. 그녀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식물 중에서도 '꽃'을 소재로 하여 그림을 그리고 있다.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죽음에 이르는 문턱을 경험한 그녀는 당시 '신체가 식물 같다는 느낌'을 체험했다고 한다. 그런 느낌 속에서도 '꽃'은 보고, 냄새 맡고, 만지고, 기억을 하게 해주며, 삶의 기쁨을 주는 천진무구한 그 '무엇'이었다고 한다. 꽃이 주는 그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꽃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게 한 이유다.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안개 속에 늦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11월 27일 늦은 오후, 삼성동 코엑스 인터콘티넨탈호텔 지하 2층에 있는 작은 <갤러리 마하>를 찾았다. 숲 해설가이기도 한 기자는 꽃에 대한 관심이 각별히 많기도 하지만, 젊은 정윤영 작가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 연꽃 속에 무수히 피어나는 꽃들의 세계
금년 2월, 남인도 여행을 하는 중에 기자는 이 젊은 작가를 만난 적이 있다. 그녀처럼 젊은 나이에 칠십을 넘은 노인을 모시고 여행을 하는 모습을 보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그런데 그녀는 칠십을 훌쩍 넘긴 할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여행을 하기가 쉽지 않는 남인도와 스리랑카 오지 여행이었다. 그럼에도 무척 즐거운 모습으로 나이든 할머니와 함께 여행을 하는 앳된 그녀의 모습이 퍽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아내와 함께 갤러리 마하에 들어서는 기자를 젊은 작가 정윤영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가장 먼저 기자의 눈에 띄는 것은 오래된 네잎 클로버를 붙인 작은 족자였다. 이 행운의 네잎 클로버는 할머니가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작가에게 선물 해주었다고 한다. 제법 오래 됐을 법한 빛바랜 종이에는 작가가 꽃을 그리는 이유와 작업 과정, 그리고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촘촘히 기록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선물해준 행운의 네잎 클로버를 소중히 간직하는 태도에서 꽃과 식물을, 그리고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작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 할머니가 선물한 네잎 클로버
아주 오래되고, 빛이 바랜 종이에 깨알처럼 기록한 내용 중 그녀가 꽃을 그리는 이유와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한 떨기 꽃은 비단 식물로서의 꽃이라는 개별적 존재에만 그치지 않고 우주적 질서가 있는 실존의 공간으로 다가오며 그것이 내가 꽃을 그리는 이유다. 화면 속 꽃은 실제적인 현상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생장과정을 담고 있으며, 그 시간으로부터 지각된 기억의 흔적을 은유한 형상에 더 가깝다. 이런 꽃의 형상과 함께 안료의 물성을 이용해 촘촘하게 중첩된 필선, 작업의 행적이 예상되는 얼룩, 흘러내린 안료의 흔적을 통해 시간의 비결정성도 담고자 했으며, 동시에 의도한 여백을 통해 시간의 인과성 또한 넌지시 드러내고 했다."
▲ 삼성동 갤러리 마하-정윤영 개인전 "안에-있음"
또 작업의 발단과 과정과 재료의 선택, 그리고 작업의 진행과정을 작가는 다음과 설명하고 있다.
"작업의 발단은 식물의 세계에서 영감을 얻어 시작되었고, 작업이 진행될수록 자연의 형태에서 가져온 선으로 분할된 화면 속 공간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움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또한 스미고, 번지는 붓놀림의 흔적은 화면에 배어들고, 습기를 머금은 패브릭(비단)에 필선으로 세밀하게 그린 꽃 이미지와 중첩되었다. 캔버스 면에 채색 안료를 이용해 수예적인 패브릭 패턴을 연상시키는 꽃을 그려 불투명과 층으로 쓰고, 그 위에 전통적 소재인 비단을 덮어 투과성의 화면으로 이용했다. 화면은 막혀 있기도 하고 뚫려 있기도 한 이중적인 반투명 효과를 드러낸다."
▲ 정윤영 개인전 "안에- 있음"
마지막으로 작가는 그림이 완성 된 화면 속의 세계를 의도적으로 중첩된 화면 속에서 수없이 피어나는 꽃을 담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화면 속의 세계는 의미의 그물망으로 얽혀있는 전체이며, 한 폭의 화면 위에 층위를 이루며 켜켜이 쌓여진 색채와 향상은 드로잉 적으로 환원된 이미지에 용해되어 하나의 무한한 '세계'를 이룬다. 의도적으로 중첩되어 화면 속에 지천으로 핀 꽃은 모든 의식을 소거한 오롯이 꽃이라는 존재 그 자체다."
빛바랜 종이에 새겨진 작가의 설명을 읽고 그림을 감상하니 그림에 대한 이해가 훨씬 수월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게 작품은 작가 자신의 삶 그 자체이며 자신의 모습이다. 작가는 20대의 젊은이답지 않게 죽음의 문턱을 체험했던 자신의 자전적 삶의 흔적을 화폭에 고스란히 녹여 내고 있다. 좀 더 자세히 작품을 들여다보면, 스미고 번지며 흘러내린 색채 위에 세밀하게 드로잉을 한 중첩된 꽃의 세계가 촘촘히 다가온다.
▲ 정윤영 개인전 "안에- 있음"
작가의 모든 그림에는 의도적으로 중첩된 그물망처럼 얽히고설킨 꽃의 세계가 묘사되어 있다. 보는 이에 따라 수많은 판화를 겹쳐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마치 우주만물이 한 몸, 한 생명이라는 인드라 망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고대 인도신화에 따르면 인드라망은 인드라 신이 살고 있는 선경성(善見城) 위의 하늘을 덮고 있는 일종의 무기로 그물코마다 보배구슬이 박혀 있고, 거기에서 나오는 빛들이 무수히 겹치며 신비한 세계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모든 사물이 서로 끊임없이 연결되어 온 세상으로 퍼지는 법이 세계와 같다고 말한다.
동국대학교에서 불교미술을 전공하고, 현재는 국민대 대학원에서 서양회화를 공부하고 있는 작가의 그림에는 전통과 현대가 서로 겹치며 혼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로부터 불교적인 소양을 이어 받은 작가의 마음에는 꽃들의 오묘한 세계를 통해 마치 인드라 망처럼 얽히고설켜 온 세상으로 퍼지는 인드라망의 세계를 그리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 스미고, 번지는 붓놀림의 흔적은 화면에 배어들고, 습기를 머금은 패브릭(비단)에 필선으로 세밀하게 그린 꽃 이미지와 중첩되었다. 캔버스 면에 채색 안료를 이용해 수예적인 패브릭 패턴을 연상시키는 꽃을 그려 불투명과 층으로 쓰고, 그 위에 전통적 소재인 비단을 덮어 투과성의 화면으로 이용했다. 화면은 막혀 있기도 하고 뚫려 있기도 한 이중적인 반투명 효과를 드러낸다.
연꽃 드로잉에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은 작가가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병고의 고통 속에서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처절하게 태어나는 모습을 재현시키는 것처럼 비추이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중첩되어 화면 속에 지천으로 핀 꽃은 모든 의식을 소거한 오롯이 꽃이라는 존재 그 자체다."라고 말하는 젊은 작가는 사람들이 자신이 그린 꽃들의 세계를 바라보며 어지러운 세상에서 병들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받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갤러리 마하 (02)548 0547(11월 21일~12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