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산 일등바위 밑에는 부동명왕과상, 홍법대사상, 그리고 유달산신 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인본인들에 의해 조성된 불상이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종교적 기념행사를 위해 유달산 입구에서부터 일등봉, 이등봉 일대에 88기의 불상을 세웠다고 한다.
목포사람들은 이 상들이 목포의 정기를 끊는다며 철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고, 교육적인 자료로 그냔 두자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 자세한 내력을 살펴보기 위해 목포문화원의 <다시보는 유달산>(1999)을 인용하였다.
개항도시인 목포에는 일제시대에 전통적인 한국불교보다 일본불교가 더 빠른 시기에 다수 유입되었는데, 그중 밀파인 진언종도 이 시기에 목포에 보급되었다. 이 불상들은 일본 진언종에서 숭배되는 것으로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조성되었다. 해방이후 일제의 잔재라하여 없애려고 했으나 종교적인 문제가 걸려 있어 쉽게 없애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부동명왕상(不動明王像)
부동명왕은 대일여래(大日如來-밀교 진언종의 본존)가 모든 악마와 번뇌를 항복시키기 위하여 분노한 모습으로 나타난 형상으로 오대명왕(五大明王)의 하나이다. 1920년대 말 일인(日人)들이 일본불교의 부흥을 꾀하기 위하여 일등봉 아래쪽 암벽에 조각했다고 전해진다.
철퇴를 들고있는 모습 위에 '不動明王'이라 새겨져 있는데, 홍법대사가 중국에서 유학하고 일본으로 돌아올 때 배를 타고 모시고 왔는데 이 부동명왕이 대사의 항해 안전을 지켜줬다고 하며 홍법대사가 안치된 곳에는 어김없이 부동명왕상이 함께 있다.
홍법대사상(弘法大師像)
부동명왕상에서 우측으로 50M 정도 떨어져 있다. 일본 진언종의 개조로 이름은 공해(空海), 속성은 좌백진어(佐伯眞魚)이며 홍법은 시호이다. 774년에 태어나 835년에 열반하였는데, 20세에 출가하였으며 804년 30세 되던 해에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수행하였다. 806년에 귀국하여 불법(佛法)을 전해 일본불교의 선각자로 칭송받고 있다. 일본에서는 일반 서민들에게 특히 친숙하고 존경받는 승려이다.
한편 부동명왕상 바로 옆 암벽에 '유달산신(儒達山神)'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글자 주위에 부동명왕상, 홍법대사상 등이 있어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은 이것들을 유달산 산신(山神)으로 오인(誤認)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일본인들이 유달산신사(儒達山神社)라는 글자를 파놓은 것으로 '사(社)'자는 해방이후 지워버렸고 지금은 '儒達山神'이라는 글자만 남아서 생기는 오해로 유달산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어설픈 일제 잔재 청산이 낳은 해프닝일 뿐이다.이곳의 불상들은 최근까지도 미묘한 갈등을 내재한 채 그 존폐 문제가 언급되기도 한다.
일본의 시코쿠 일대 88군데의 수행로에 홍법대사의 부조가 새겨져 있고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순례하고 있는데, 고야산(高野山) 일대의 승려들은 수도를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더 충격적인 불교관련 유물들이 유달산에 만들어졌었다. 일본인들이 그들의 종교적 기념행사를 위해 유달산 입구에서부터 일등봉, 이등봉 일대에 불상 88기를 세웠었다. 1920년대 말, 1930년대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 불상들은 하나하나에 일일이 번호를 새겨 유달산 등산로 곳곳에 세워졌다. 해방이후 모두 파괴되어 현재는 그 터와 좌대 부분만이 곳곳에 남아있다.
등산 도중에 조금만 관심을 갖고 주위를 둘러보면 불상이 세워졌던 위치에 남아있는 흔적을 바탕으로 추측해보면 대부분의 불상들은 1m 내외의 크기로 불상 아래 부분에 번호를 새겼고, 그 아래 기단 부분에는 불상을 세우도록 시주한 사람의 출신과 이름, 그리고 현재의 거주지 순서로 새겨놓았다. 이러한 불상들이 세워졌던 흔적들은 주로 일등봉을 오르는 길목에 집중되어 있고, 이등봉 부근에도 몇 군데 남아 있다.
88 영장(靈場)과는 다른 형태지만 마당바위의 우측 바로 아래에는 위패라고 불리는 또 다른 일본인들의 불교관련 흔적이 남아있다. 위패 모양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 여덟 자의 글씨(黑一祭OO大明神)가 음각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 건립자와 건립시기(소화 6년 2월 초,1931)가 적혀 있으나 마모되어 확인할 수 없다. 이 역시도 아래 부분에 시주한 사람의 출신지역과 이름이 적혀있어 비슷한 목적으로 조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참조: (다시보는)유달산, 목포문화원, 1999
침략신사, 십자실(辻子實),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