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방랑/베트남 여행

100명이 넘는 후궁을 두고도 고독했던 뜨득황제

찰라777 2017. 12. 10. 07:25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응우옌 왕조의 수도 후에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는 베트남 중부에 수도 후에(Hue)’를 건설했다. 흐엉강 하구에 자리 잡은 후에는 북부 하노이에서 540km, 남부 호찌민시에서 644km 떨어진 베트남 중부에 위치하고 있다. 후에는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가 1082년부터 1945년까지 140년간 정치,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후에의 가장 큰 볼거리는 응우옌 왕조 13대에 걸친 황제들이 잠든 황릉이다. 황궁과 사원, 황릉과 오래된 건축물들이 집중적으로 들어서 있는 후에는 1993후에 기념물 집중지대라는 이름으로 베트남 최초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그러나 후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1968년 미군의 구정 폭격으로 유서깊은 역사적인 유물과 유적이 송두리째 파괴되었다. 전쟁은 참으로 고약하다. 그아름다운 유물이 다 파괴되고 마니 말이다. 또한 후에시는 공산주의 세력에 의하여 악명높은 학살이 자행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후에는 '봉건 시대의 유산'이라는 이유로 복원을 미루채 한동안 방치되었다. 

파괴하고, 죽이고, 방치하고, 이데올로기와 전쟁은 세상을 전멸시킨다. 


*자금성을 본딴 후에황궁


 

142명의 자식을 둔 민망황제, 참으로 민망하네~

 

황제들은 앞 다투어 제위 중에 자신의 황릉을 건설하여 사치스런 생활과 많은 후궁을 거느리고 사치스런 생활을 일삼았다. 남아 있는 황릉 중에서도 민망황제황릉(2대황제), 뜨득황제황릉(4대황제)와 마지막 황제인 카이딘 황제의 황릉이 볼만하다.

 

응우옌 왕조의 2대왕인 민망황제는 1820년부터 1841년까지 재위하며 공식적으로 기록된 자식이 142(78명의 아들과 64명의 딸)이나 된다. 일설에 의하면 민망황제가 거느린 후궁이 무려 4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안내자의 설명이다). 황제의 이름이 민망인데 이름 그대로 듣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을 거느린 고려태조 왕건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104명의 후궁을 거느린 뜨득황제는 고독하다?

 

4대왕인 뜨득황제는 35년간(1829-1883)이나 즉위를 하여 응우옌왕조 중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황제다. 그런데 뜨득황제 역시 104명이나 되는 후궁을 거느리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그는 3년에 걸쳐 3000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자신의 능을 완성한 뒤 별장으로 이용했다. 그는 50명의 요리사를 두고 50종류의 요리를 50명의 하인 시중을 받으며 식사를 했다고 한다. 아휴~ 날마다 잔치를 친 셈이다. 그리고 연꽃 잎에 밤새 맺힌 이슬을 모아 차를 마시며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참 나, 민망황제나 뜨득황제나 이름값을 톡톡히 하나보다. 그 이름들이 베트남어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르지만 한국어 의미는 참, 민망하고, 황당하다.



▲뜨득황제릉

 

그러나 100명이 넘는 후궁들이 있었지만 자식이 단 한명도 없어 만년에 고독한 삶을 보냈다니 저주를 받은 것일까? 밤마다 후궁들과 그 짓을 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으니 저주를 받은 것임에 틀림없으렷다! 아이가 생기지 않으니 후계자가 할 일도 신경이 쓰여서 그는 고민 고민 하다가 스스로 무덤을 만들기로 했다.

 

응우옌왕조는 사후에 후계자가 능을 만드는데, 후계자가 없으니 뜨득은 생전에 스스로 무덤을 지었다. 그는 왕릉을 별장처럼 지어놓고 정치보다는 그림이나 시를 쓰는 일에 몰두했다. 나라가 망조가 들게 되었는데도 뜨득은 궁녀, 내시, 궁중악사들과 함께 연못 위에 배를 띄워놓고, 밤새도록 향락을 일삼으며 끊임없이 자조적인 시만 써댔다.

 

일곱 명의 응우옌황제들 중 뜨득황제의 왕릉이 가장 호화롭고 풍경이 좋다. 그는 능원 전체를 사후 궁전을 대비해 거대한 규모로 지었는데, 배산임수의 풍수지리를 고려해 건물을 배치했다. 연회장, 연못, 다원 등은 비교적 낮은 산 밑에 배치하고, 능침은 산중턱에 배치했다.

 

능 안으로 들어서니 루키엠이라는 연꽃이 가득한 연못이 나타난다. 연못 한 쪽에는 쑹키엠이라는 정자가 멋들어지게 서 있다. 바로 이 정자에서 뜨득이 시를 읊었던 곳이다. 연못을 지나면 키엠쿵이라는 궁전이 나온다. 궁 안에는 집무실로 썼던 호아 키엠 디엔이 나타나고, 뒤편에는 민 키엠 드엉이라는 일종의 극장이 있는데 이곳에서 가극을 관람했다나.












 

중심구역을 벗어나 송림이 울창한 산으로 올라가면 왕릉의 석조물이 나타난다. 4상의 코끼리와 말 한 쌍이 조각되어 있고, 나비아라는 비각이 나타난다. 그 비각을 지나면 뜨득이 묻힌 무덤이 나타난다. 그런데 뜨득은 사후에 도굴을 막기 위해 황릉조성에 참여했던 인부들을 모두 처형했다고 한다. 죽임 놈! 혼자 죽기나 하지 무덤을 판 사람을 왜죽이나.





 

오늘날 이곳 사람들은 뜨득의 황릉을 이렇게 묘사한다고 한다. “슬픔이 웃고, 기쁨이 눈물을 흘리는 곳이라고. 과연 호화로운 기쁨의 생활이 눈물을 흘린 만도 하다. 천연두 후유증으로 고자였던 뜨득은 향락으로 발버둥을 쳤지만 고독한 일생을 마감했다. 그가 지켜왔던 응우옌왕조도 프랑스 보호국으로 넘어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