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임진강일기

기쁜 만남, 슬픈 이별

찰라777 2013. 9. 27. 05:58

기쁜 만남

<짚 한 오라기의 혁명>으로 살아가는 최성현 선생님과의 만남 

 

오늘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날이다. 오전에는 해땅물자연농장에서 <바보 이반의 산 이야기>의 저자 최성현 선생님을 만나 기쁨으로 충만했으나, 오후에는 이 시대의 영원한 청년작가이자 한국 문학계의 큰 별 최인호 소설가의 별세 소식을 듣고는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강원도 홍천 산골에 살고 있는 최성현 선생님은 그의 가족과 함께 티코보다 더 작은 차를 몰고 이곳 중부전선 최전방 연천까지 왔다. 1988년 귀농을 하여 25년 째 자연농사를 짓고 있는 그가 연천에서 또 다른 자연농사를 짓고 있는 홍려석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 먼 길을 달려온 것이다.

 

▲해땅물자연농장에서 벼이삭을 만지며 신비해하는 최성현 선생님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다.

홍려석 선생님은 최성현 선생님이 번역한 <신비한 밭에 서서>란 책을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아 농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귀농을 하여 9년 째 자연농사를 짓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나는 작년에 연천군 농업기술센터에서 귀농교육을 받다가 우연히 홍려석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나서 <신비한 밭에 서서>란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나 역시 자연농사와 비슷한 텃밭 농사를 지으며 연천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우연한 기회에 한 자리에서 두 분을 함께 만나게 된 것이다. 책 한권의 인연이 이렇게 사람의 삶을 180도로 뒤바뀌어 놓다니 인생사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는 최성현 선생님의 작품 <바로 이반의 산 이야기> <산에서 살다>, 그리고 그의 번역 집 <신비한 밭에 서서> <짚 한 오라기의 혁명> <여기에 사는 즐거움>을 이미 읽었던 바가 있다. 그리고 지금도 내 서가에서 가끔 꺼내 읽고 있기에 그를 만난다는 것은 나에게 큰 기쁨이다.

 

동국대 대학원에서 노장철학을 전공하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철학종교 연구실에 근무하던 그는 우연히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짚 한 오라기의 혁명>이란 책을 읽고 크게 감등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두세 시간 깊은 고요 속에서 세상을 달리 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체험을 한 하루 만에 바로 직장을 그만 두고, 1988년 3월 전기도 전화도 없고 이웃집도 없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바보 이반의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5년 여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원시생활에 가까운 삶을 살아갔다.

 

산속에 살며 자연농법을 추구해온 그는 <바보 이반의 산 이야기>란 책을 펴내고, 한때 <이반>이란 필명을 사용하여 <여기에 사는 즐거움>을 번역하기도 했다. 자연환경의 중요성을 별로 인식하지 못했던 그 시절.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귀농을 한 그의 삶은 누가 보아도 바보들이나 선택하는 짓이었다. 오죽했으면 그의 어머니가 그를 만나러 왔다가 앉지도 않고 돌아섰을까? 그리고 배웅을 나오는 그에게 “계속 이런 데서 이렇게 살 작정이라면 앞으론 날 어머니라 부르지 마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충분한 사전 준비 없이 시작한 5년간의 산골생활을 접고 서른일곱의 나이에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신문배달을 하며 일본어 학교를 다녔다. 그때 그는 야마오 산세이의 ‘너도 알고 있듯이’로 시작하는 <식빵의 노래>란 시를 암송하며 크게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야마오 산에이의 <여기에 사는 즐거움>이란 책을 번역해 냈다.

 

그런 최성현 선생님을 이곳 연천의 <해땅물자연농장>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나에게 큰 기쁨이자 영광이다.

 

그는 해땅물자연농장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풀잎 하나, 작물 하나하나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 특히 고개를 수그리며 풀 속에서 노랗게 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며 무척 신기해했다. 그도 홍천에서 자연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다고 했다.

 

“느낌이 참 좋군요!”

 

심어만 놓고 한 번도 김매기를 하질 않았다는 홍 성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그는 매우 감동스러워했다. 이곳 홍 선생님으로부터 고시히까리 볍씨를 가져다 심은 그의 논은 김매기를 했다고 했다. 그는 논으로 들어가 한 동안 벼이삭을 만져보며 정말 신기해했다. <짚 한 오라기의 혁명>이란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책에 매료되어 모든 것을 접고 산속으로 귀농을 한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와 함께 온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자연농사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최성현 선생님과의 우연한 만남은 참으로 소중하고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오후 6시가 되어 해질녘에 그는 다시 홍천으로 떠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설가 최인호 선생님이 영면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슬픈 이별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고 했던 최인호 작가님과의 이별

 

“나의 기쁨은 누군가의 슬픔에 빚을 지고 있으며”라고 말했던 최인호 선생은 그의 말대로 슬픔의 빚을 진 사람들에게 시대의 아픔을 주옥 같은 글로 답하며 한 송이 꽃으로 사라져 갔다.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는다.”

 

영원한 청년작가 최인호는 그의 마지막 작품 <최인호의 인생>에서 노래했듯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꽃잎으로 또 다른 세상으로 떠나갔다. 암투병중에도 끝내 펜을 놓지 않고 창작열을 불살랐던 그가 아니던가!

 

“제 소원이 있다면 환자로 죽지 않겠어요. 작가로 죽겠습니다. 원고지 위에서….”

 

그의 말처럼 그는 한 장의 원고지위에서 유언처럼 마지막 글을 쓰다가 꽃처럼 사라져 갔다.

(사진:한국일보 자료 사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보살상 앞에서 나는 합장을 하고 송주하였다. 일주문을 벗어나려다 말고 나는 고개를 돌려 관세음보살상을 다시 보았다. 그곳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었는데 얼핏 보면 생떽쥐베리가 쓴 ‘어린왕자’의 모습 같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법정스님이 어린 왕자의 환영으로 부활했단 말인가”

-최인호의 인생,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는다’에서

 

그가 법정스님을 보내며 쓴 글이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늘 법정스님을 존경해왔다.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란 에세이집을 펴내기도 한 그는 종교를 초월하여 살아간 이 시대의 작가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가톨릭 신자이면서 어떻게 불교에 심취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엄마와 아빠 중에서 누구를 더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느냐”고.

 

그는 90년대 초 <길 없는 길>을 집필하면서 5년 여간 절을 쫓아다닌 적이 있었다. 장편소설 <길 없는 길>은 경허스님의 궤적을 찾아다니며 한국불교에 대해 작가의 눈으로 심오하게 써 내려간 글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가톨릭 신자인 그가 어떻게 불교에 대하여 이렇게 상세하고 생생하게 글을 써내려 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발로 뛰어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수없이 많은 사람을 면담을 한 그의 청년정신의 결정이었다.

 

소설<길 없는 길>이 세상에 한 참 읽혀지던 시기에 나는 우연히 어느 골프장에서 그를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우리 팀 바로 뒤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기에 홀이 밀릴 때마다 나는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인기 작가와 조우하는 호사(?)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홀이 많이 밀리는 어느 그늘 집에서 그와 차를 한잔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선생님, 공을 잘 맞나요?”

“이 작은 공을 어떻게 쉽게 잘 맞히겠습니까? 글쓰는 사람도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할 뿐이죠.”

“저는 최근 선생님의 작품 ‘길 없는 길’을 아주 감명 깊게 읽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가톨릭 신자이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불교에 대하여 심오하게 써 내려 갈 수 있지요?”

“하하, 그래요? 감사합니다. 허지만 요즈음 그 책 때문에 스님들한테 많이 혼나고 있답니다.”

 

그의 말인 즉, 불교에 대하여 쥐뿔도 알지 못하면서 초조 달마대사 이후 경허선사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의 선맥에 대한 내용을 함부로 소설로 쓸 수 있느냐는 경책을 자주 듣게 된다고 했다.

 

“허지만 선생님만큼 한국불교에 대하여 알기 쉽고 자세하게 서술한 스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전혀 괘념하지 마세요.”

“하하, 그래요? 감사합니다.”

 

나는 지금도 그 때의 청년작가 최인호가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다. 그는 말한다. ‘내 정신의 아버지가 가톨릭이라면 내 영혼의 어머니는 불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불교적 가톨릭 신자‘라고 자신을 부르고 싶다’고… 그 당시 그는 머리를 깎고 정말로 스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혹여나 이 책을 읽다가 공감을 느끼면 마음속으로 따뜻한 숨결을 보내주었으면 한다. 그 숨결들이 모여 내 가슴에 꽃을 피울 것이다.”

- ‘최인호의 인생’ 중에서

 

그는 이렇게 독자들의 숨결로 가슴에 한 송이 꽃을 피우며 그가 그렸던 작품 <별들의 고향>으로 길 없는 길을 떠나갔다. 그는 저 세상에서도 꽃처럼 아름다운 글을 쓰지 않을까?  그러나 그를 보내는 것은 이 시대의 아픔이자 나에게는 매우 슬픈 이별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