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임진강일기

[감자이야기3]보릿고개와 감자쑥밥

찰라777 2017. 6. 25. 06:08

보릿고개와 감자쑥밥


보릿고개가 있었던 50~60년대에는 감자로 허기를 달랬다. 그 시절 농촌에서는 늘 보릿고개가 있었다. 초여름에 캐낸 감자를 삶아서 통째로 소금에 찍어먹거나, 감자밥을 해먹었다.


보릿고개는 지난해 가을에 수확한 양식은 거덜이 나고, 보리가 미처 여물지 않은 5~6(음력4~5) 춘궁기(春窮期)를 말한다. 농민들은 지난해 가을에 수확한 양곡으로 소작료, , 이자, 세금 등 각종 비용을 지급하고 공출하고 나면 먹을 잔여 양식이 많지가 않다. 당연히 잔여 식량으로 이듬해 초여름 보리가 수확할 때까지 버티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 우리 고향마을에서도 자기소유의 밭이나 논이 없는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와 소나무 껍질 등 나무껍질(草根木皮)로 끼니를 잇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하지감자를 캐서 쑥을 뜯어 넣어 감자쑥밥을 해먹는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보릿고개 시기에는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여 부황증(浮黃症:굶어서 살가죽이 붓고 누렇게 되는 병)에 걸린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보릿고개를 구조적으로 겪게 된 원인은 일제강점기에 농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탈취하여 소작농제도를 실시했기 때문이다.

 

80퍼센트에 달했던 일제강점기의 소작농은 평균 5할이 넘는 소작료를 내야했고, 그 외에도 각종 공과금, 용수료, 수리조합비, 지주와 마름의 접대비 및 증여물 등을 제하고 나면 전체생산물중에서 겨우 24~26퍼센트 밖에 얻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농가의 빚은 더욱 늘어나 초근목피로 연명을 해야 하는 악순환이 거듭되었다.



 

우리나라가 보릿고개에서 벗어 날 수 있었던 것은 1960년대 후반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실시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중장기적으로 통일벼 등 벼품종을 개량하고 비료와 농약의 공급확대를 통해서 식량증산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로 인해 농민의 소득증대와 생활환경 개선이 진전되면서 보릿고개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60년대에 월남전과 중동특수로 벌어들인 외화도 보릿고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몫을 톡톡히 해냈다고 볼 수 있다.

 

현재는 감자를 넣은 쑥밥이나 쑥떡이 웰빙 식품이 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끼니를 때우며 연명을 하는 수단이었다. 어쨌든 보릿고개 시절에 하지감자는 춘궁기를 연명해낼 수 있는 없어서는 안 될 식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