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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선교장이야기 ④]연꽃 위에 둥둥 떠 있는 활래정

찰라777 2017. 8. 12. 06:39

연꽃 위에 둥둥 떠 있는 활래정

 

정문을 지나니 길 양편에 배롱나무 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고, 미끈한 배롱나무 수피 밑에는 연분홍 상사화가 물결을 이루고 있다. 오른쪽으로 돌아서니 마치 연꽃 위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정자가 눈에 확 들어온다. 시인묵객들의 교류 장소였던 활래정(活來亭)이다. 활래정 앞에는 인공호수를 파서 연꽃을 심고, 연못 주변으로는 배롱나무를 심어서 한껏 운치를 더하고 있다. 그래서 선교장은 활래정을 중심으로 붉은 배롱나무 꽃이 피어나고 연꽃이 곱게 솟아오르는 여름이 가장 아름답다!

 

 

 

네모진 연 못 안에는 작은 섬을 만들고 그 섬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자형의 활래정은 긴 돌기둥으로 받혔는데, 네 개의 돌기둥이 마치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선비가 발을 씻는 모습이랄까? 그러나 연잎이 무성한 여름은 소나무도 돌기둥도 연잎에 푹 파묻혀 연꽃위에 정자와 소나무가 둥둥 떠 있는 느낌이 든다.

 

활래정은 1816(순조 16)에 오은(鰲隱) 이후(李厚)가 건립한 정자다. 오은거사는 과거에 응시를 했다가 낙방을 한 뒤 중앙정계 출입을 끊고 초야에 묻혀 은일지사로 지냈다. 그는 중국의 주자(朱子, 1130~1200)를 흠모한 그는 활래정의 현판도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서 가져와 붙였다.

 

반묘의 연못이 거울처럼 맑아(半畝方塘一鑑開),

하늘의 구름이 떠돈다( 天光雲影共徘徊).

묻나니 어찌하여 그렇게 맑단 말인가?(問渠那得淸如許)

위에서 활수가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네(爲有源頭活水來).

 

 

 

오은거사는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내려오는 물이 있음일세(爲有源頭活水來)’에서 ()’자와 ()’자를 뽑아서 활래정(活來亭)이라 이름 하였다. 실제로 활래정 앞 연못에는 인근 태장봉으로부터 끊임없이 맑은 물이 흘러들어 온다.

 

완산세고(完山世稿) 오은공유고에 보면 운석 조인영(趙寅永, 1782~1850)이 쓴 활래정기란 기문을 보면 왜 활래정이란 이름을 지었는지 그 연유를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가 있다.

 

올해 가을에 백겸(이후)이 와서 말했다.

선교장의 왼쪽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고 전당련(錢塘蓮: 중국 명나라 난징의 전당지(錢塘池)에 있던 연()으로, 강희맹이 조선에 들여와 재배에 성공한 후 점차 전국에 퍼졌다고 함)을 심었습니다. 그 위에다 정자를 세우고 주자의 시에서 산 물이 온다라는 뜻을 취하여 편액을 활래정이라 하고 아침저녁으로 거닐면서 즐기고 있습니다. 저의 거처는 그대가 이미 감상하신 바라, 저를 위하여 기문을 써 주십시오.”

 

내가(조인영) 말했다.

대개 주자는 마음을 물에 비유하신 것이다. 물은 진실로 비어 있는 영역이다. 지금 그대는 진실로 이렇게 투명하고 잔잔한 것으로써 살아있는 물을 삼으라. 또한 물로 이름을 삼은 것은 모두 살아 있는 사물이다. …… 사람의 마음은 본래 살아 있지 않은 것이 없는데 살아 있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은 바깥 사물을 소유함으로 인해 누를 받음이 있기 때문이다. 벼슬살이 하는 사람은 총애 받지 못할까, 욕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일반 백성은 이익을 따라 다닌다. 선비는 입고 먹을 것과 배와 수레 마련이 없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백겸은 그렇지 않다. 여러 번 춘관(春官:종백의 벼슬)에 올랐고 비록 급제하지는 못했지만 문득 너르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낙토에 살면 이미 스스로 초탈해서 깨끗해졌고 구속된 것이 없었다. 관동의 여러 명승에 마음껏 노닐고 높은 고개와 파도를 실컷 즐겼다.

 

이에 정자는 발자취를 거두고 세상사를 쉬면서 그 마음에 살아 있는 것을 깃들이고자 한 것이다. 그러한즉 마음에 맞는 곳은 진정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연못 한 자 깊이 물도 또한 호수와 바다인 것이다.

-운석 조인영(趙寅永, 1782~1850).

 

 

 

 

운석 정인영은 정조시대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형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의 관직을 두루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할아버지는 조엄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조진관이다. 그는 문장, 끌씨, 그림에 모두 능했고, 시문과 소차를 모은 <운석유고>(雲石遺稿) 20권이 전해지고 있다. 운석도 선교장을 자주 찾았으며, 오온거사와 두터운 교류를 가졌다.

 

활래정 사면의 처마 밑과 기둥에는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각각 다른 글씨체로 쓴 편액과 주련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끈다. 처마에는 무려 6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마치 활래정 편액 콘테스트를 보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편액 하나하나가 조선시대 명필 서예가들의 글씨다.

 

 

 

 

월하문을 통과 했을 때 흰 바탕에 금색 행서는 규원 정병조(1863~1945, 동궁 시종관을 지낸 학자)의 글씨다. 그 옆면에 흰 바탕에 초록색으로 쓴 예서체는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의 글씨다. 해강은 소남 이희수로부터 글씨를 배웠으며, 전국 유명사찰 현판을 많이 쓴 당대의 서예가다.

 

연못 쪽 처마에도 세 개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근대의 서예가인 성당 김돈희(1871~1937)와 중국 원세개의 옥새를 새겼고 그의 서예고문을 지낸 성재(惺齋) 김태석(金台錫, 18751953) 글씨이고, 규원 정병조의 글씨가 하나 더 붙어 있다.

 

 

 

 

활래정은 두 칸 온돌방이 마루와 합쳐져 자형을 이루고, 방과 마루를 연결하는 복도 옆에는 차를 끓이는 다실이 있다. 다실에 앉아 문을 활짝 열고 바람에 흔들리는 연꽃과 백일홍을 바라보며 차 한 잔을 마시면 한여름의 백미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