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방랑/Greece

[그리스 7] 산 중턱에서 만난 '미녀와 야수'

찰라777 2004. 8. 26. 01:12


올림포스 산 중턱에서 만난

'미녀와 야수'




금빛 찬란한 쇼를 벌리고 있는 올림포스 산을 탄성을 지르며 바라보고 있던 우리는 백구, 헤르메스가 요란하게 울부짖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산등성이를 돌아 백구가 흰 이빨을 드러내며 금방이라도 공격을 할 듯한 자세로 맹렬하게 짖어대고 있는 곳으로 가니 그곳에는 8척 장신의 한 거대한 거인이 방어자세를 취하고 떡 버티고 서 있지를 않는가!

어둠속에 서 있는 거인! 그를 본 순간 우리는 움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육중한 거구에 얼굴이 온통 수염투성이인 그는 악을 쓰며 짖어대는 헤르메스와 우리를 동시에 번갈아 바라보면서 매우 계면쩍은 듯한 미소를 어설프게 짓고 있었다.



* 산 중턱에서 만난 독일에서 온 거인. 백구가 그를 보고 숨이넘어 갈 듯
짖어댔다. 그곳에서 텐트를 치고 하루밤 야영을 했다는 그 모습에서 나는
묘하게도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를 연상하고 있었다(독일 거인과 함께).



그 거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어쩐지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환생을 해서 불쑥 타나난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정말 버려진 렘노스 섬에서 헤라의 부름을 받고 막 올라온 헤파이스토스처럼 보였다. 헤파이스토스는 독자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제우스의 본 부인이자 질투의 여신인 헤라가 혼자서 낳은 자식이다. 헤라가 낳은 귀한 자식이 어찌하여 렘노스 섬에 다리가 부러진 채 절름발이가 된 채 버려지게 되었는가?

그 사연은 이렇다. 어느 날 제우스의 그칠줄 모르는 바람끼에 질투가 난 헤라가 한 참 입씨름을 하고 있을 찰나에 하필이면 그 자리에 지지리도 못 생긴 헤파이스토스가 있었다. 그 못 생긴 헤파이스토스가 가만히 있기라도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어머니 헤라 편에 서서 역성을 들지를 않겠는가.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제우스는 헤파이스토스를 발길로 힘껏 걷어 차버렸다. 제우스의 무시무시한 힘이 실린 발길에 채인 그는 허공에 떠서 하루 동안을 공중에서 낙하를 하다가 에게해의 북쪽에 있는 렘노스 Lemnos 섬에 떨어져 그만 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던 것.

그런데 지금 앞에 서 있는 거인을 보고 나는 왜 하필이면 추남중의 추남인 헤파이스토스를 생각하고 있을까? 여기에도 사연이 있다. 그는 혼자 몸이 아니었던 것. 나는 맹렬하게 짖어대는 헤르메스를 겨우 제지하고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 때 숲 속의 요정처럼 생긴 아름다운 여인이 우거진 소나무 아래 있는 텐트에서 나왔다.

그녀는 마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처럼 희고 아름다웠다. 동이 트는 이른 아침, 숲 속의 텐트에서 잠을 자고 나오는 이 한 쌍의 커플은 생각해보라! 그들은 마치 현대판 ‘미녀와 야수’처럼 보였다. 아프로디테와 헤파이스토스가 숲 속에서 첫날밤을 갓 보낸 것 같은 느낌...

‘내가 지금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인가?’

여러분은 번개를 만들어 제우스에게 헌납한 헤파이스토스를 제우스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짝을 지어준 사실을 기억 하리라. 그러나 대장장이 일에만 매달리고 있는 헤파이스토스는 아프로디테로 하여금 몰래 바람을 피우는 원인을 제공한다. 아프로디테는 단 하루도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지 않고는 밤을 보내지 못하는 '사랑의 여신'이 아닌가?



*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 들른 아폴론(월계관을 쓴)
여기서 과연 헤파이도스는 누구일까?(벨라스케스 그림)



오직했으면 헤르메스조차 전쟁의 신 아레스가 아프로디테와 정사를 하다가 헤파이스토스 청동 그물에 걸려 갇혀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 그물이 세 곱절쯤 질겨서 영원히 갇혀 있더라도 아프로디테와 하루 밤 정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실토를 했을까?

만약에 이 백구의 전생이 정말로 헤르메스였다면 어찌하겠는가! 그가 만일 오늘 이 광경을 다시 본다면 질투가 나서 견디지를 못할것이다. 그러고 보니 과연 사생결단을 하며 짖어대는 백구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텐트 앞에는 마침 맑은 약수가 좔좔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약수를 퍼 마시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좋은 날씨군요! 저는 한국에서 온 찰라 라고 합니다.”
“예! 너무 사랑하고 싶은 날씨지요? 우리들은 베를린에서 왔답니다.”
“하루 밤을 여기서 지낸 모양이지요?”
“네, 어제 저녁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하루를 묵었지요.”
“어제 밤엔 비가 좀 내렸을 텐데요…”
“조금... 그러나 새벽이 되자 구름이 걷히고 달이 떠오르는데, 제 일생에 그렇게 아름다운 달을 본적이 없었답니다!”
“아, 네!"

저런! 거기에다가 기가막힌 달구경까지... 아, 교교한 달밤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웠을까?

그는 말수가 적었다. 이제 올림포스 산은 황금갑옷을 벗어버리고 백옥같이 하얀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우린 올림포스 산 정상을 배경으로 하여 그 거인과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의 애인과 함께 사진을 찍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사절하며 우리들만 카메라에 담아주었다. 신은 문명이란 기계에 아름다운 그녀를 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 전쟁의 신 아레스와 밀회를 하고 있는 아프로디테(니콜라스 푸생 그림)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와 독자 여러분에게 보여드렸어야 했을텐데 유감이다. 사진 대신 전쟁의 신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와의 밀회 장면을 실어드리니 그 독일여인에 대한 모습은 독자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허여간.... 우리의 백구, 헤르메스조차 영 떠날 생각을 아니하고 그녀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나에게 그녀를 단 한번만이라도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기회를 주오!' 백구의 눈빛은 적어도 그렇게 비추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저 개는 당신 개인가요?"

그가 아까와는 달리 얌전하게 앉아있는 백구를 눈으로 가르키며 말했다.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산에서 우연히 만나 일행이 되었을 뿐입니다."
"아, 그랬군요. 그런데 당신을 꼭 주인처럼 섬기는 것 같아서요..."
"아, 그런가요! 우리는 단지 함께 산을 올라오면서 서로 친구가 되었지요."
"아, 네..."

갈 길이 바쁜 우리는 그 독일 거인과 이벽의 악수를 하고 다음고지를 향해 출발했다. 악수를 하면서도 거인은 여전히 예의 계면쩍은 미소를 흘려보냈다. 그런데 우리가 길을 떠날 때까지도 백구는 떠날 생각을 아니하고 꿈쩍을 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었다.

산정상이 빤히 바라보이는 올림포스 산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숨이 헐떡거릴 정도로 가파른 깔딱 고개가 시작되고 있었다.

"여보, 이제... 백구가 따라오지 않으려나 봐요!"
"글쎄... 좀 두고 봅시다."

아내는 무척이나 서운한 표정 지으며 백구를 바라보았다. 우리의 백구, 헤르메스는 과연 그곳에 주저 앉아 버리고 말 것인가? -계속-




* 정상으로 갈수록 점점 가파르게 힘들어지기 시작하는 올림포스 산





(2002.10.19 올림포스 산에서 글/사진 찰라)




♬~ Abba : Take A Chance on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