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방랑/Greece

[그리스 8] 갈색의 정원을 거니는 시몬

찰라777 2004. 8. 27. 08:25


□ 갈색의 정원을 거니는 시몬



다시 돌아온 백구. 그는 다시
지친 아내에게 큰 힘을 주었다.

아내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점점 힘들어했다.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숭얼숭얼 맺히며 금방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리곤 이내 쓰러지듯 주저 앉았다.

저혈당! 아내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허공을 돌더니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가고 있었다. 신이 잠시 아내를 부르고 있는 순간이었다. 저혈당이 오면 몸이 차가워지고 정신은 혼미해진다.

나는 아내를 바닥에 누이고 가방에서 재빨리 초콜릿을 꺼냈다. 아내는 입에 초콜릿을 물고 무의식적으로 움질움질 씹어 넘겼다. 20여분이 지나자 아내의 눈동자가 제대로 돌아왔다.

“괜찮아?”
“아, 이제 조금 나아요.”

나는 근심스런 표정으로 아내에게 말했다. 저혈당 후에는 물은 적게 먹고 칼로리가 있는 음식을 즉시 보충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몸은 가장 편안한 자세로 쉬어야 한다.

온통 단풍으로 물든 갈색 정원에서

“내가 당신을 정말 힘들게 하고 있는 거지요?”
“뭘, 아픈 당신이 더 힘들지… 나는 이런 일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는 거 알잖아.”
“아무리, 그래도요.”

사실 아내는 집에서도 이런 일이 가끔 일어난다. 처음엔 병원의 응급실로 달려가곤 했지만 점차 익숙해진 나는 침착하게 대처를 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결코 익숙해져서는 안 될 일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신들은 우리에게 예고 없이 찾아온다.

“여보, 이제 우리 그만 내려가는게 어떼?.”
“잠시만 기다려요. 조금 있으면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거예요.”

아내는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영혼의 허물을 한 가닥씩 벗어버리고 다시 태어나는 사람 같았다. 삶을 초월한 사람처럼... 그렇게 반시간 정도를 쉬고 있는데 백구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리고 그는 우리들 곁에 다소곳이 앉았다.

“와, 백구다! 백구야, 다시 돌아 와줘서 고마워!”

아내는 돌아온 백구를 보고 뛸 듯이 반가워하며 먹고 있는 과자를 그에게 내밀었다. 백구는 꼬리를 치며 과자를 받아먹었다. 백구가 돌아오자 아내는 다시 기운을 차린 듯 했다.

다시 산을 오르자는 것. 아내에게 백구는 정말 신통한 힘을 불어 넣어주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백구와 일행이 되어 계속해서 산을 오르기로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30여분 정도 올라 한 고개를 넘자, 갑자기 온통 단풍으로 물든 ‘갈색의 정원’같은 펀펀한 지대가 나왔다.
산 중턱까지는 주로 소나무와 전나무 등 침엽수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2000m 고지가 가까워지자 자작나무 등 활엽수들이 주종을 이루며 갈색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폭폭 빠지는 낙엽길에서 시몬이 되다.

낙엽이 푹푹 빠지는 가을의 갈색 정원! 낙엽은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에 우수수 소리를 냈다. 그리고 소리 뒤에는 수없이 많은 낙엽들이 포물선을 그으며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추호의 미련도 없이 떨어지는 낙엽! 낙엽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안다. 침묵 속에서도 서로를 알고 있다.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다시 만날 것임을… 낙엽처럼 살아야 한다. 그들은 무언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암시해주고 있었다.


시몬!
나무 잎 새 저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몇 번이나 더
이 갈색의 정원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언젠간 저 낙엽처럼
쪼글쪼글 해지고 말 것인데...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경이롭고 신비롭다
춤을 추고, 노래하라
한줄기 숨이 다할 때까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위하여...



하산을 하는 그리스인 등산객과 함께

낙엽들은 그렇게 노래하며 바람에 마지막 춤을 추고 있었다. 한 줄기 생명이 다할때까지....

사각사각 낙엽을 밟고 가다보니 우린 갑자기 시인이 되어버린 듯 했다. 우리는 학창시절에 즐겨 외웠던 구르몽의 ‘낙엽’이란 시를 읊조리며 걸어갔다.

오래된 나무들은 고목이 되어 옆으로 쓰러진 채 누워 있었다. 백구가 다시 컹컹 지으며 적막한 산에 다시 담백한 메아리를 울렸다.

“앞에 사람들이 있나 봐요.”

우린 이제 백구의 소리만 듣고도 대강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하산을 하는 등산객들의 소리가 웅성웅성 들려왔다. 그들은 어제 혹은 며칠 전에 산을 올랐다가 산장에서 밤을 지내고 내려오는 등산객들이었다.

백구의 인도로 2100m 고지인 스필리오스(대피소 A)에 드디어 도착했다. 백구가 아니었더라면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곳!

고지에 오른 우리는 남아있는 한줄기 힘까지 모두 소모해 버린 듯 대피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내려다 보는 에게해와 올림포스 산은 아름답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했다.

-계속
(다음은 ‘올림포스 산’ 마지막 회를 연재합니다)-



(2002.10.19 올림포스 산에서 글/사진 찰라)



♬~ 유키구라모트 : LakeLouise_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