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아내의 말처럼 지구의 반대편에서 일본인들은 지독하게도 축제에 열심히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브라질의 상파울루는 일본과 한국에서 어쩌면 가장 먼 지구의 반대편일 것입니다.
그런데 리베르다데 거리에는 일본인들의 축제물결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고, 여기가 일본인지 브라질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기모노를 입고 왜나막신 '게다'를 신은 일본인들! 남녀노소가 어우러져 하나같이, 다소 미련할 정도로 축제에 참여를 하는 일본인들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일본인들의 집단정신에 혀를 내두루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축제의 가무는 매우 단순하고 반복적입니다. 북을 퉁퉁 두드리거나 부채춤, 우산 춤, 깃발을 흔들며 벌이는 퍼레이드 등으로 일본의 전통문화를 보여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노인들도, 어린이들도 한결 같이 열광을 하며 축제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이 솔직히 부럽기도 하고, 정말 '한결같다'란 표현이 가장 적합할 것 같습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던지 그들의 태도는 초지일관 합니다.
일본의 집단주의는 철저한 소집단위주라고 들었습니다. 일본은 과거 1천년동안 소집단으로 편이 갈라져 땅뺏기 전쟁에 열중했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소집단 정신은 자기 집단의 권익을 위해서는 목숨을 버리는 것도 불사하는, 집단의 명령에 충성하는 무서운 정신이 깔려 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일본의 소집단은 천황을 내세워 절대적 군국주의로 발전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충성, 헌신, 용감, 영웅숭배란 군인적 관념과 엄중한 위계질서, 절대적 상명하복, 권위주의적인 군대적 행동양식으로 군비를 증강하여 주변국가를 침략하여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군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은 극우단체가 득세를 하고, 만주침략,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미얀마와 인도차이나, 그리고 호주에 이르기까지 태평양 일원을 장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지역을 여행을 하면서 콰이강의 다리, 다윈의 기름저장고 등 당시 일본군의 전쟁 잔해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급기야는 가미가제 특공대들이 전투기를 탄 채 진주만을 자살 폭격하는 극단적인 행동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가미가제'는 '신의 바람'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최근 뉴욕의 월드트레이드 센터를 '알라신의 이름으로!' 자살 폭격을 감행한 테러단체도 가미가제특공대를 연상케 하여 몸서리가 처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군국주의는 히로시마의 원자폭탄투하로 몰살 직전까지 간 상태에서 패전을 하여 항복을 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군무하는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한 것 같다고나 할까요? 집단주의가 도를 지나쳐 무리를 하면 패망을 하여 떼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한 단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에 일본은 집단주의 폐해를 반성하는 측도 만만치 않다고 합니다. 일본의 집단주의는 명령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여서 고래와 같은 거대한 힘과 싸우는 능동적인 대처능력이 이 없다는 것입니다. 복잡하고 변화가 무쌍한 현재의 사회시스템은 개개인 각자가 처한 장소에서 자기의 판단으로 모든 일을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하는데, 집단주의는 무리로 떼를 지어 수동적으로 행동을 하는 물고기 떼처럼 고래들의 쉬운 먹이 감이 되고 만다는 것이지요.
여행이야기에서 핀트가 잠시 빗나갔군요.
축제는 축제로 보아주어야 하는 건데…
그러나 지금 지구의 반대편에 서서 일본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군무를 펼치는 모습을 보는 마음은 착잡한 심정입니다. 명치시대 이후 100년간이나 지속된 군국주의가 다시 부활을 하는 것을 보는 것 같은, 무서운 집단정신과 단결심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축제의 한 단면으로 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받아왔던 우리나라 민족의 입장에서 한번쯤 생각해 본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지나칠 정도로 친절한 일본인
상파울루 거리에 일본인들의 축제는 더욱 무르익어 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제의 현장에 찾아와 구경을 하고, 일본 음식을 먹고, 일본제품을 사고 있습니다. 우리도 거리에 도열된 일본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일본인 식료품점에 들러보았습니다.
식료품점 주인은 우리를 보더니 당연히 일본사람으로 취급을 하고 일본말로 인사를 합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그녀는 더욱 친절하게 웃으며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하면서 다가옵니다. 금방이라도 그 모든 것을 줄듯이 말입니다. 이 일본 여성의 친절은 그 도를 넘어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였습니다.
아내가 고추장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듣더니 내가 어찌 어찌 통역을 하여 고추장이라는 말을 인식 시키자, 2층까지 올라가 함께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게에는 우리가 원하는 고추장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한국인 가게에 가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찾는 물건이 없어 너무 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파인애플 두 덩어리를 우리에게 돈도 받지 않고 선물로 주었습니다. 우리가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기어코 우리들 손에 파인애플을 쥐어 주었습니다. 가게 주인의 친절함에 아내는 만약 다음에라도 이곳에 들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그 가게에서 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브라질에는 일본인들이 이곳 상아울루를 중심으로 100만 명 정도 정착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이 브라질에 이주를 하기 시작한 것은 1908년 일본의 고베 항을 출항한 배가 브라질 산투스 항에 830명을 싣고 도착한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브라질에서는 토지는 남아도는데 노동자는 부족하여 농촌이 궁핍한 일본에서 농업이민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일본인 이주자들은 상파울루 주변 커피 농장에 배치되어 뛰어난 농업기술과 근면성으로 그 성과를 크게 인정받아 브라질 당국으로부터 아주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이들은 상파울루의 외곽인 이곳 리베르다데(Liberdade)거리에 정착하여 지금까지 자신들의 문화를 전승하며 정체성을 유지하고 관광명소로 발전시켜 왔습니다. 리베르다데는 원래 사형집행이 이루어 졌던 곳으로 죽음을 통하여 '자유'를 얻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민 100년을 맞이한 일본인들은 이민 1세대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그 자손들인 2세, 3세들이 계속 성장을 하여 농장주는 물론 교육에서부터, 국회의원, 의사 등 각계각층의 사회적 지위에 종사를 하며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이해 비해 한국인이 최초로 브라질에 이민을 오기 시작한 것은 1963년 2월, 103명이 브라질 산투스 항에 도착을 하여 농장에 정착을 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현재는 이곳 브라질의 상파울루를 중심으로 약 5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거리는 일정상 실제로 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세계 속에 해외 한국인들은 집단의 힘보다는 개개인 하나하나가 '똑똑한 개인'으로 모두가 너무 똑똑하여 단결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구촌을 여행하면서 만나는 교포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세계 오지에 우리 교포 단 몇 가구가 사는데도 서로 화합을 잘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해외에서조차 지연, 학연 등으로 편이 갈라져 서로를 헐뜯다는 말을 들을 때면 괜히 마음이 우울해 지곤 합니다. 물론 이러한 현실이 그 전부는 아니리라 생각이 됩니다. 화합하고 단결하여 살고 있는 교포들도 많으니까요.
외무부 통계에 의하면 한민족의 해외동포는 약 560여만 명(실제로는 700~1,000만 여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는 이민자들이 많은 중국계나, 일본, 이탈리아, 인도인들에 비해 결코 적은 수가 아니며, 지역 분포 면에서는 다른 민족이 아메리카 대륙에 집중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5대양 6대주, 약 140여 개국에 걸쳐 가장 광범위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민족처럼 저돌적이고 용감한 민족도 드문샘이지요.
자랑스런 한국인!
이제 세계의 최고 오지를 가더라도 어디서나 한국인 교포와 한국인 여행자을 만나게 됩니다. 세계 어디를 가든지 우리 동포들이 화합하여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