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에서 임진강으로... 그후 180일!
오늘은 아내와 내가 이곳 연천 동이리로 이사를 온지 6개월이 되는 날이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내가 이곳 연천하고도 DMZ부근 임진강변에서 살아갈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런데 하늘이 맺어준 인연인지 나는 꿈에도 보지못한 연천군 동이리 주상절리가 바라보이는 임진강 가에서 180일 째 살고 있다. 금년 1월 1일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가 계속되는 날 나는 이곳 동이리로 이사를 왔다.
살다보니 겨울이 지나고, 봄을 맞이했으며, 어느듯 여름이라는 계절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제 가을만 맞이하면 임진강에서 사계절을 살아가게 되는 샘이다.
아름다운 인연을 따라서 섬진강에서 임진강으로 온 후, 180일....
잡초 우거진 자투리 땅을 일구어 내생에 최고의 텃밭이 탄생하기까지, 그 180일 간의 여정을 사진으로 정리해 보았다.
■ 2011년 11월 28일 - 금가락지를 첫방문 하던 날
블로그에 인연이 되어 만난 청정남님을 따라 3.8선을 넘어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로 왔던 날은 짙은 안개가 끼어 있어 지척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나는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방향감각을 잃은 채 청정남님의 금가락지를 방문하게 되었다.
2012년 1월 1일 - 이사 하던날
새해 첫날 몹씨도 추웠던 날 우리는 거의 책만 싸들고 동이리로 이사를 왔다. 살림살이가 거의 완변하게 구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가구도 부엌살림도 가져올 필요가 거의 없었다. 구례에서 썼던 어지간한 가구는 그곳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꼭 필요한 것만 몇 가지 챙겨들고 이사를 했다. 날씨는 엄청 추웠도 임진강에는 얼음이 땡땡 얼어 있었다.
■ 1월- 철새와 눈, 그리고 결빙
1월에는 간혹 폭설이 내렸으며 차가운 바람과 함께 눈꽃과 어름꽃이 피어났다. 임진강은 꽁꽁 얼어 붙어 우리집을 방문한 아이들은 썰매를 탔다. 사람의 그림조차 없는 이곳 동이리는 어느 외딴 동토의 섬처럼 느껴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얀 눈위에 짐승들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도장 찍힌 듯 보였다.
철새들 특히 기러기들이 아침저녁으로 하늘에 "V"자를 그리며 끼욱끼욱 노래를 불었다. 한 겨울 나의 유일한 친구는 기러기 때였다. 나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다락방 들창문을 열고 기러기들의 군무를 렌즈에 담아냈다. 때로는 달밤에도 기러기들은 날아 다녔다.
■ 2월 - 해빙
2월은 얼었던 임진강이 쩍쩍 소리를 내며 해빙을 맞이했지만, 날씨는 여전히 추웠고, 폭설이 내렸다. 우리집을 방문한 친구들은 푹설이 내린 임진강에서 썰매를 탔다. 어디서 이런 체험을 해보겠는가! 그들은 마치 북극의 어느 얼음바다에서 눈썰매를 타듯 마냥 즐거워 했다.
가끔가다 고라니들이 조심스럽게 내려와 이장남의 보리밭에서 눈치를 살피며 보리싹을 뜯어 먹었다. 그러나 임진강에 봄은 서서히 오고 있었다. 결빙이 되었던 얼음이 녹으면서 얼음 속에서 낙엽이 수만년을 묵은 화석처럼 드러났다.
■ 3월 - 텃밭 만들기
3월이 되어 땅이 녹자 금가락지 뒤뜰 잡초밭을 일구어 텃밭을 만들기 시작했다. 최전방 지역이라 아직 땅은 다 녹지않았지만 쇠스랑으로 파내어 미리 퇴비를 묻어 두고 비닐을 씌워 두었다. 땅이 어느정도 녹고 가스가 나가면 상추씨등 파종을 할 준비를 미리미리 해두었다. 텃밭은 우리들의 꿈이었으며, 최대의 낙이 될 정원이다.
집에서 30km 떨어진 두포리 얼어붙은 자갈 밭을 일구어 오갈피나무를 식재했다. 그대로 묵혀두면 공한지세도 내야 되기 때문에 가장 키우기 쉽고 약재, 식용으로 쓰일 수 있는 오갈피나무 1000주를 식재했다. 내 친구 응규의 도움이 없더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임진강변에서 아랫집 연희 할머니랑 냉이와 물쑥 뿌리를 캐내서 나물을 묻혀 먹었다. 이른 봄에 먹는 냉이는 보약중의 보약이라고 했다. 금년들어 나비를 처음으로 해빙이 된 약수터에서는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버들강아지가 기지개를 펴고있었다.
그런가 하면 폭설이 내리다 나뭇가지에 얼어 붙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꽃을 연출했다. 눈속에서 새싹이 움트고 파란 쑥이 동아났다. 마냥 얼어 있을 것만 같았던 동토의 땅에도 봄은 오고 있었다.
■ 4월 - 파종
드디어 파종의 시기가 왔다. 금가락지 주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자투리땅을 일구어 호박을 심고, 상추씨를 뿌렸으며. 땅콩, 수박, 토마토, 가지, 들깨, 오이, 고추, 완두콩, 옥수수 등 먹을 수 있는 모든 야채를 심었다. 물론 워낙 박토와 모래 땅인지라 이장님께 부탁을 하여 퇴비를 실어와 흑밭 퇴비반으로 섞어 박토를 옥토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매일 아치멩 일어나 쇠스랑과 삽을 들고 잡초밭을 파내어 텃밭을 만들어 갔다. 손이 부르트고, 어깨, 허리 발다리가 뻐근했지만 멈추지 않고 꿈의 텃밭을 만들어 갔다. 물론 농사일에 는한 내 친구의 응규의 도움이 컸다. 그는 나의 절친한 친구이자 농사 스승이었다.
파종을 하자 곧 싹이 동아 났으며, 봄비가 내리자 싹은 파죽지세로 쑥쑥 커 나갔다. 아내와 영이는 들에 나가 쑥을 캐서 쑥차를 만들고 쑥국을 끓였으며, 임진강 변에는 제비꽃, 괭이눈, 진달래, 민들레 등 봄꽃이 피어나고, 버들잎이 파랗게 돋아났으며, 벌과 나비가 날아들었다. 아내와 나는 임진강변을 따라 정비된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임진강의 봄을 만끽했다.
■ 5월 - <먹을 수 있는 정원> 탄생
신록의 5월이 돌아오자 그동안 땀을 흘려 일구었던 텃밭이 점점 <먹을 수 있는 정원>으로 바뀌여 갔다. 처음으로 상추와 오이를 수확했다. 진액이 뚝뚝 떨어지는 여린 상추잎에 된장을 발라 상추쌈을 먹는 기쁨은 말과 글로는 표현 할 수 없는 감동, 그 자체였다. 블루베리도 열매를 맺기 시작했으며, 완두콩, 가지, 토마토, 호박넝쿨 에도 꽃이 피어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땅콩, 옥수수, 들깨 들도 튼실하게 자라났으며, 금가락지 앞 이장님의 보리밭에도 파란 보리가 패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신록이 우거진 임진강에도 낚시꾼들과 관광객이 찾아와 보트를 타고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텃밭에 고무마를 추가로 파종하였다. 이제 먹을 수 있는 정원으로 변해가자 텃밭에서 하는 일이 점점 신바람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정성들여 물을 주고 텃밭에 끊임없이 자라나는 잡초를 뽑느라 정산없이 바빠졌다.
■ 6월 - 시련..가뭄과 우박
그리고 <내 생애 최고의 텃밭> 탄생!
5월과 6월은 극심한 가뭄이 지속되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지않으면 텃밭은 금방 금이가고 야채들은 말라 죽었다. 그럴수록 나는 아침저녁으로 정성스럽게 물을 주었다. 소낙비가 내리면 처마밑에 큰 통을 받치고 빗물을 받아 저장했다가 양동이로 퍼 날려 텃밭에 물을 주었다. 목이 타는 녀석들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나를 어마 아빠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날은 소낙비가 내리다가 주먹처럼 큰 우박이 내려 텃밭을 난도질 하기도 했다. 오이, 호박, 토마토, 고추, 상추 할 것 없이 우박서리를 맞은 텃밭은 벌집으로 변하고 말았다. 가뭄에다 때 아닌 우박의 날벼락으로 텃밭의 시련은 너무나 충격적이고 컸다.
6월 30일, 때마침 내린 단비로 야채들은 시련을 딛고 일어나 <내 생애 최고의 텃밭>으로 탄생하였다! 매일 싱싱한 상추, 오이, 토마토, 가지, 고추들이 밥상에 올라오게 되었다. 비록 우박으로 상처를 입었지만 녀석들은 정말 금쪽같이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임진강 주변에는 오디가 풍성하게 열려 오디쨈을 만들고, 산딸기, 보리똥(뜰보리수)의 수확도 우리를 기쁘게 해주었다. 그러나 <내 생애 최고의 텃밭>은 그냥 탄생하는 게 아니었다. 땀과 정성, 부지런함, 그리고 하늘의 도움이 필요했다.
지금 나는 연천군에서 실시하는 <귀농교육>를 받기 시작했다. 좀 더 농업과 토양을 이해하고 농작물을 재배하는 방법을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귀농은 결코 달콤한 낭만이 아니다. 낭만은 그 댓가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 벌레와 잡초, 가뭄과 병충해 등 수많은 고비를 넘길 수 있는 인내와 끈기, 그리고 지혜를 있을 때만이 비오는 날 한가롭게 앉아 부침개를 만들어 막걸리 한 잔을 마시는 여유가 생길 것이다.
아름다운 인연을 따라서…
내가 이곳 임진강 변에서 텃밭을 가꾸는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모두가 청장남님과의 각별한 인연 덕분이다. 그와의 인연과 도움이 없었더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지리산 섬진강이 좋아 구례 수평리에 빈농가를 찾아 둥지를 틀었던 우리는 1년 반 만에 섬진강을 떠나야 했다. 수평리는 1년 반 동안 섬진강변에 살면서 정도 듬뿍 들었던 동네였다. 섬진강 꽃길, 지리산, 구례장터, 순박하고 인정 많은 수평리 마을 사람들, 특히 이웃집에 사는 혜경이 엄마와의 추억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그러나 1년 반 동안 집수리를 하고 겨우 살만하니까 갑자기 집 주인이 이사를 오겠다고 하는 바람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지리산과 섬진강변에 빈집과 집터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지만 우리가 살만한 집을 찾지 못했다.
살만한 집은 너무 비싸고, 빈집은 새로 집을 짓는 것보다 더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소요되었다. 집터를 계약을 하고 집을 지으려고 측량까지 했는데, 토지이용계획상 거의 반 토막이 잘려나가는 땅이어서 해약을 하는 곤욕까지 치러야 했다.
겨울은 다가오고… 그래서 우리는 아쉬움을 남긴 채 일단 서울로 후퇴를 하기로 했다. 아마 구례 섬진강과 지리산과의 인연이 거기까지 다 했는지도 모른다. 추운 겨울 날 우리는 짐을 싸들고 서울에 전셋집을 새로 얻어 이사를 했다.
그런데… 뜻 밖에도 블로그를 통해서 만난 청정남 님과의 인연으로 이곳 연천 동이리로 이사를 오게 될줄이야… 세상 인연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좋든 싫든 많은 인연을 만나게 된다. 그것이 좋은 인연이든, 나쁜 인연이든 사람들과 인연의 고리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인연을 맺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해서 금년 1월 1일 우리는 임진강 주상절리가 바라보이는 동이리 청정남 님이 혼과 정성을 들여 지어 놓은 <금가락지>(김씨 가문이 즐겁게 사는 곳이란 뜻)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우리는 이곳 금가락지에서 눈보라치는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했으며, 초하의 여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2년도의 중간지점인 6월 30일을 맞아하게 되었다.
6월 30일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날이다. 4년 전인 2008년 6월 30일은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던 아내가 천신만고 끝에 장기기증을 받아 심장이식에 성공하여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날이다. 또한 2010년 6월 30일 날은 우리가 서울에서 지리산 섬진강 변으로 빈농가를 찾아 이사를 갔던 날이기도 하다.
때마침 극심한 가뭄끝에 단비가 6월 30일, 우리는 이곳 DMZ가 가장 가까운 경기도 연천군 동이리 임진강 변에 둥지를 튼 지 반 돌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가 이곳 DMZ부근에서 살리라고 꿈에라도 생각을 해 보았겠는가? 인연 따라 오다 보니 여기가지 온 것으로 밖에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사람은 평생 몇 번의 운명적인 인연을 가진다고 했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만남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큰 영향과 감동을 주는 깊은 인연이다. 마음과 마음, 생명과 생명이 아름다운 연결고리로 이어져 서로에게 감동을 주는 깊은 만남이다.
청정남님과의 인연은 진솔했다. 진솔한 인연은 서로에게 힘을 주고 보람을 느끼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에게서 진한 감동과 함께 어떤 알 수 없는 힘을 얻고 있으며, 나 역시 그에게 힘닿는 데까지 에너지를 주며 행복한 인연으로 남고 싶다.
행복이 가득한 집, 아름다운정원 만들기
이곳 청정남 님의 집에서 그를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원과 텃밭을 열심히 가꾸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집으로 만드는 일이다. 언제 찾아와도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그런 집. 그것은 나 자신의 행복이기도 하지만 그의 행복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해서 내가 이곳 금가락지에 도착하여 제일먼저 착수한 일은 먹을 수 있고 아름다운 텃밭을 만드는 일이다. 집은 기본적으로 잘 지어져 있어 자질구레한 수리 외에는 크게 손을 댈 것이 없었다.
허지만 정원은 잔디 외에는 별로 가꾸어 진 것이 없었다. 나는 땅이 녹자 괭이와 삽을 들고 잡초로 우거진 자투리 땅을 일구고 하나하나 텃밭으로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버려진 땅을 <먹을 수 있는 정원>으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를 한 것이다.
우측 뜰에는 상추와 호박, 오이, 고추, 부추를 심어 <키친정원>(Kitchen Garden)을 만들었다. 그리고 족구장으로 잡초가 우거진 앞마당 모래땅에는 야생화를 심고, 블루베리, 토마토, 가지, 완두콩, 땅콩, 들깨, 수박, 옥수수 등 역시 먹을 수 있는 정원을 만들었다.
매일 땀을 흘려 일을 한 결과 집 주위에 약 150여 평의 텃밭과 정원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퇴비를 부어 옥토로 만들었다. 모래 땅과 자갈로 된 대지에 퇴비를 절반 정도 섞어 기름진 땅으로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땀을 흘려야했다. 감자를 당장에 익힐 수 없듯이 모든 일은 단번에 되는 일이 없다.
모든 일응 서서히 시간을 두고 정성을 들여야 한다. 감자를 갑자기 너무 뜨거운 불로 익히다가는 그만 타버리고 만다. 감자가 제대로 익기까지는 서서히 시간을 들여 달구어 나가야만 비로써 먹을 수 있는 감자가 될 수가 있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다. 단번에 되는 일은 단번에 식고 마는 법.
지난 6개월 동안 시간과 정성을 들이다 보니 정말로 <먹을 수 있는 정원>이 만들어졌다. 요즈음 매일 아침 일어나면 진액이 뚝뚝 떨어지는 상추, 싱싱한 오이, 토마토, 가지를 따다가 식탁에 올린다. 모두가 무공해 유기농 채소들이다. 손수 땅을 일구어 가꾼 채소를 식탁에 올려 먹는 행복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영원히 행복을 함께 나누고 싶은 아름다운 인연
나는 이 바구니에 가득 찬 행복을 청정남 님과 나누고 싶다. 못생겼지만 무공해 유기농으로 지은 농산물을 그와 나누어 먹으며, 바쁜 그에게 가끔은 쉼표를 찍어 정신적인 휴식을 취하게 하고 싶다.
내가 지난 4월 인도와 부탄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하자, 그도 선 듯 따라나섰다. 처음에는 그냥 하는 말로 흘려들었는데 정말로 배낭을 메고 함께 동행을 하게 되었다. 가난하지만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 인도와 부탄을 체험해보고 싶다는 것이 그가 여행을 나선 변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바쁜 남대문시장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 15일 동안이나 가게를 비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인도와 부탄 여행을 다녀오면 일이 더 잘 풀릴 걸세.” 내심 나는 그렇게 말은 했지만 하루하루 바쁜 가게를 비우고 떠나는 그가 다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와 함께 인도와 부탄 여행을 동행하면서 오히려 나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그는 항상 말과 실천이 똑 같았다. 해발 3000m가 넘는 부탄 탁상사원을 올라갈 때도 그는 걸어서 올라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조랑말을 타고 가는데 그는 자신의 체력을 테스트 해보고 싶다며 험한 길을 걷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남을 위해 무거운 것을 들어주는 것을 앞장섰으며, 인도의 거지들을 보면 적선을 하는 것을 잊지않았다.
그렇게 함께 동행을 한 인도와 부탄 여행은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그는 정신적으로 많은 것을 느꼈다고 했다. 가난하지만 상대적인 불만이 없고, 절대적으로 생각하며, 작은 것에 기뻐할 줄 아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자신은 그들에 비해 얼마나 가진 것이 많은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여행을 다녀오니 형님 말씀처럼 일이 더 잘 풀리는 것 같아요!”
그는 연배가 한참 더 많은 나를 형이라고 부른다. 그는 정말 전생에 내 친 동생이었을까? 오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내 밑에 동생이 없다. 요즈음 그가 나를 형이라고 부르면 정말 친 동생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단비가 내린 정원에는 여러 가지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다. 호박꽃, 오이꽃, 상추꽃, 고추꽃, 가지꽃, 수박꽃, 땅콩꽃, 토마토꽃, 쑥갓꽃… 이 꽃들은 모두가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맺어주는 꽃들이다.
그런가 하면 테라스 앞 토방에는 원추리, 비비추, 채송화, 나팔꽃, 문주란, 금송화, 제라늄…등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다. 이 꽃들은 향기와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꽃이 피어나니 매일 나비와 벌들이 찾아들어 꿀을 빨아먹고 대신 꽃가루를 묻혀 꽃들의 번식을 도와주고 있다. 이처럼 자연의 생태계는 다투지 않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인연이다.
나는 점심상에 올릴 상추와 고추, 오이를 몇 개 텃밭에서 따오며 아름다운 인연이 이어지는 자연 속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어본다. 아름다운 인연을 따라서 여기까지 온 발자국을 회상하면서…^^
(2012. 6.30 연천 동이리 금가락지에 반 돌을 맞이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