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네팔 소설가 다이아몬드 라나가 쓴 <화이트 타이거>
14.01.28 09:42최종 업데이트 14.01.28 09:42
▲ 소설 화이트 타이거 표지 | |
ⓒ 인연M&B |
소설 <화이트 타이거(The Wake of White Tiger)>는 1800년대 후반을 시대적인 배경으로 104년간 독재집권을 한 라나 가문의 권력투쟁에 얽힌 내용을 그린 네팔의 역사소설이다.
독재자 정 바하두르 라나가 1845년 쿠데타에 성공한 후 라나 가문은 무려 104년간 네팔을 통치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작가 '다이아몬드 섬세르 정 바하두루 라나Diamond S.J.B Rana' 역시 라나 가문 출신이다. 그는 라나 가문이 독재통치를 하는 그 시대에 네팔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가 10여 년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 소설은 그가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쓴 네팔 민주화의 기념비적인 소설이다.
네팔 독립투사 다이아몬드 라나가 감옥에서 쓴 역사소설
1973년 'Seto Bagh(백호)'란 원제로 출판된 <화이트 타이거>는 1984년 그의 며느리인 그레타 라나에 의해서 'The Wake of White Tiger'란 타이틀로 영문으로 번역되었다. 그 후 힌두어, 프랑스어, 일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읽히게 되었고, TV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네팔TV에서 방영되었다.
이번 한국어판은 1982년 이후 지금까지 네팔에 의료봉사와 문화교류를 해온 정신과 전문의 이근후 박사와 비폭력 대화를 연구한 역사학자 정채현 선생이 공동으로 번역하여 오는 27일 출간된다.
▲ 창작에 몰두 하고 있는 다이아몬드 라나 | |
ⓒ 이근후 |
권력을 쥔 독재자의 특권 가문에서 태어난 다이아몬드 라나는 반정치적 조건들에 의해 영감을 받아 1940년대 후반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시대는 라나 가문이 독재 통치를 하던 시기로, 라나 가문에 반하는 작가들과 시인들의 작품이 출판을 하기가 매우 어려운 때였다.
다이아몬드 라나는 단지 작가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네팔의 민주 독립을 위해 싸운 민주투사다. 그는 1954년부터 1987년까지 네팔 의회당 당원으로서 적극적인 정치적 삶을 살았다. 이 시기에 그는 민주화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8번이나 감옥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러야 했다.
심지어 그는 동물원에 감금되기도 한다. 정부 당국이 그를 체포하여 감옥에 수감을 하려고 하자 그의 지지군중들이 그를 구금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데모를 벌였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그를 빼돌려 잠시 동물원에 가두어 놓고는 그를 잡아가지 않았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리고 군중들이 잠잠해지자 다시 형무소로 이감시켰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그가 마지막으로 투옥된 것은 52세인 1960년이다. 그는 네팔 의회당에서 자유선거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다가 투옥되어 1966년까지 무려 6년간이나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화이트 타이거>는 그가 마지막 6년간의 감옥 생활을 하면서 쓴 소설이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라나 시대에 일어났던 일들을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에게 들려주곤 했던 이야기들을 회상하며 이 소설을 썼다.
'네팔통' 정신과 의사와 역사학자가 손잡고 번역
▲ 화이트 타이거를 번역한 이근후 박사와 정채현 선생님 | |
ⓒ 최오균 |
그는 1990년 2월 원작자 다이아몬드 라나를 만난 자리에서 <화이트 타이거> 영문판 한 권을 선물로 받았다. 이 책을 읽은 후 그는 이를 번역하여 한국에 소개하고 싶은 마음을 가졌으나 미루다가 기회를 놓쳤다.
그 후 2004년 고 박완서 작가와 함께 네팔을 방문하여 박 작가를 다이아몬드 라나에게 소개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이근후 박사는 박완서 작가에게 이 책을 번역해 주면 좋겠다는 청을 드리게 된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11년 박완서 작가가 타계를 하게 된다.
그해 네팔을 다시 방문한 이근후 박사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다이아몬드 라나를 찾아가 한국어판 출판계약서를 건네받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해 4월 다이아몬드 라나도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고 만다.
같은 해에 박완서 작가와 다이아몬드 라나의 부음을 접한 이근후 박사는 두 분의 생전에 책을 번역하지 못한 아쉬움과 미안한 마음이 겹쳤다. 그는 더 후회를 하기 전에 그 자신도 어느덧 팔십 노구가 다 된 몸으로 번역작업에 착수를 하게 된다.
▲ 작가 다이아몬드 라나를 타계 하기 직전년도에 만난 이근후 박사(2010년) | |
ⓒ 이근후 |
번역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그는 마침 역사학자 정채현 선생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공동으로 번역 작업을 진행했다.
공동번역자인 정채현 선생은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중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다가 지금은 비폭력 대화를 연구하며, 관련된 자료들을 번역하고 있다. 정 선생은 크리슈나무르티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등 크리슈나무르티 'on'시리즈 12권을 번역했다.
<화이트 타이거>는 우리나라에서 네팔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정신과 의사인 이근후 박사와 역사학자인 정채현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번역해낸 역작이다.
독재자는 결국 홀로 죽어간다
▲ 화이트 타이거를 쏜 정 바하두르 | |
ⓒ 샤키아 |
<화이트 타이거>는 역사소설이지만 전혀 딱딱하지 않고 시종일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총 43장으로 되어있는 소설은 각 장마다 네팔의 유명한 중견화가 샤키야(Rana Kaji Shakya)가 그린 삽화가 한 점씩 삽입돼 시각적인 효과를 더해주고 있다. 소설은 미사여구로 포장한 문학적인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원전에 가깝도록 충실하게 번역을 하려고 애쓰는 흔적이 곳곳에 엿보인다.
소설의 내용은 비록 역사적인 주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시종 일관 음모와, 권력 투쟁에 얽힌 스릴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러면서도 공주와 독재자의 후손에 얽힌, 아슬아슬하고 달콤한 사랑 이야기가 소설 전면에 깔려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손에 들게 되면 단숨에 읽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끔 마음을 사로잡고 만다.
<화이트 타이거>에서 작가는 독재자들이 권력을 찬탈한 과정을 코미디처럼 풍자한다. 비르 섬세르는 쿠데타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그의 사촌 형 저거트 정의 가족을 무자비하게 살육을 하게 된다. 그 살육의 하수인들인 병사들의 대화와 행위는 코미디처럼 폭소를 자아내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실제로 독재자들은 그런 식으로 권력을 찬탈한다는 것을 작가는 부각시키고 있다.
"제가 그들(정 바하두르 형제)을 찾으면 어떻게 되요?"
"그래, 이 망할 놈아. 네가 만약 장군을 죽이면 장군이 될 거고, 소령을 죽이면 네가 소령이 되는 거고, 그런 식으로 되는 거야. 비르 섬세르가 런노딥(당시 총리)을 죽이니까 그가 당장 마하라자(총리)가 되지 않았느냐?"
그러자 아둔한 쩽바는 하사관이 한 말 한마디 한마디를 절대적으로 믿었다.
"아니 그럼, 제가 당신을 죽이면 제가 하사관이 되는 건가요?"(소설 41장 325페이지 인용)
쩽바는 하사관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는 하사관이 한 말, 그러니까 자기가 죽인 사람의 지위를 얻게 될 거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자기의 상사인 하사관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또 하사관의 상사인 께서르 소령이 '윧더 프로땀 장군(저거트 정의 아들)'을 죽이고 값나가는 보석들을 약탈하는 것을 보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쩽바는 소령을 죽이면 소령이 된다는 하사관의 말을 기억해 낸다. 그는 즉시 소령의 뒤에서 소령을 쏘아죽이고 보석들을 긁어 담은 다음 이번에는 장군을 죽이고 장군이 되기 위해 마노하라로 간다.
웃지 못할 우화 같은 이야기이지만 작가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쿠데타와 혁명, 그리고 전쟁이 상대방을 이런 식으로 무자비하게 죽여야만 그 지위와 재산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을 쩽바를 통해서 풍자하고 있다. 이처럼 작가는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풍자와 해학, 그리고 히말라야의 지혜를 곳곳에 번뜩이게 하고 있어 소설을 읽는 재미를 쏠쏠하게 더해주고 있다.
▲ 저거트 정과 비르 섬세르의 결투 장면 | |
ⓒ 샤키아 |
1846년 정 바하두르 라나 가문은 '코트 학살(Kot Massacre)'로 쿠데타를 일으킨 후 권력을 장악한다. 코트학살에는 정 바하두르 라나와 디르 섬세르 등 그의 여섯 형제가 가담을 하게 된다.
소설의 타이틀로 쓰인 '웨이크(Wake)'는 켈트어로 단순히 고인이 된 지도자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곳에 일가친척들이 모여 있는 것뿐만 아니라, 충성심의 재정렬, 무력한 당을 버리고 유력한 당으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한다. 소설에서 다툼의 핵심이 되는 것은 정 바하두르 라나가 작성한 상속자의 명단이다. 그는 자기의 친아들인 저거트 정마저 믿지 못하고 상속자의 명단에서 제거시키고 만다.
왕실과 라나 가문 사람들은 모두 기만이나 혼인, 동맹 혹은 아첨을 통해 권력의 원천에 대려고 하고 있다. 특권계급인 정 바하두르와 섬세르 가문은 모두 다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자신들의 연줄을 당기고 있다.
하지만 절대 권력자인 정 바하두르의 죽음으로 그때까지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숨어 있었던 권력투쟁이 수면으로 솟아오른다. 늙은 정 바하두르가 테라이의 숲에서 백호를 쏨으로써 'Wake'가 시작되고, 곳곳에 숨어있던 음모들이 공공연하게 드러난다. 같은 가문인 섬세르 가문과 정 바하두르 가문 사이의 살육이 시작되며 비통함으로 이끌어 가는 반목이 노골적으로 시작된다.
<화이트 타이거>에서 독재자 정 바하두르는 그 자신이 만들어 낸 제도에 의해 고독하게 죽어간다. 그는 집과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테라이(네팔 남부 정글지대)의 더위에 질식해 죽음을 강요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죽자 그의 동생의 자손들인 섬세르 가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한 가문으로 지켜왔던 신뢰와 애정과 사랑을 모두 잃고 만다. 작가는 죽음과 함께 승자들도 패자들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잃게되어 강제에 의한 권력투쟁은 허망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실존인물인 정 바하두르 라나는 대영백과사전에서 '아시아의 나폴레옹'이라고 기록될 만큼 네팔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던 총리이며 독재자이다. 작가가 이 인물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그가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세우고 존경을 받았더라도 독재정치를 통해 이룬 것들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것이다.
정 바하두르는 궁정학자이자 현자인 솜나트라는 인물을 그의 의사에 반해 민주주의를 내 세운다는 이유로 정치일선에서 제거시키고 멀리 귀향을 보내 버린다. 그러나 정 바하두르는 죽음 직전에 테라이 평원에서 솜나트를 운명적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정 바하두르는 솜나트가 충고한 대로 의회제도를 확립해 놓았더라면 가족들과 친지들의 품에서 평화롭게 죽을 수 있을 만큼 안전했을 것이라며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된다. 그는 이 세상에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모든 독재자들이 경험했듯이 그 역시 고독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을 묶는 데 사용했던 쇠사슬에 결국 자신도 묶이게 된다는 업보의 진실을 그는 뒤늦게 터득하게 된다.
한국과 네팔 문학교류에 새로운 장을 열어갈 소설
▲ 화이트 타이거 출판기념회에서 사인을 하고 있는 번역자 이근후 박사와 정채현 선생님 | |
ⓒ 최오균 |
지난 16일 번역자 이근후 박사의 사무실에서는 그의 지인 20여 명과 함께 <화이트 타이거> 출판기념회가 조촐하게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이근후 박사는 작가 다이아몬드 라나를 만나게 된 인연과 번역의 과정을 프레젠테이션으로 간단하게 설명을 했다. 이 자리에는 네팔관광청 서울사무소장인 케이프 시토울나씨도 함께 참석을 했다.
"네팔의 민주화 수호를 위해 평생을 싸워온 다이아몬드 라나의 소설 <화이트 타이거>가 네팔을 가장 잘 알고 계시는 이근후 박사님과 역사학자 정채현 선생님에 의해 번역되어 한국에 읽히게 되는 것은 네팔과 한국과 문화교류 차원에서 매우 중대한 사건입니다. 이 책은 네팔의 왕실과 통치자들 사이에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네팔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시토울나씨의 말처럼 <화이트 타이거>는 비슷한 정치적인 상황을 겪어온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 책은 네팔 소설 <팔파사 카페>가 한국어로 최초로 번역된 이후 두 번째로 한국에 소개되는 네팔 소설이다.
번역자 이근후 박사와 정채현 선생님은 네팔 문학계의 초청으로 카트만두에서 열리는 <화이트 타이거> 한국어 출판기념회에 참석차 1월 말 네팔에 간다. 소설 <화이트 타이거>의 한국어판 출판은 한국과 네팔 간의 문학교류에 새로운 장이 열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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