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네팔로 떠나며...
나는 911사태가 났던 2001년 9월 29일 네팔에 첫발을 내딛었다. 이근후 박사님이 이끄는 내팔 의료봉사 팀에 합류되어 네팔을 처음 가게 되었다. 여행 떠날 날짜를 받아놓고 떠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데, 뉴욕의 무역센터를 폭파시키는 911사태가 갑자기 일어났다.
국내는 물론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여행계획을 취소하고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이근후 박사님은 태연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이 박사님께 전화를 걸었더니 “이미 일어날 일인데 멀리 떨어진 네팔에서 별 일 있겠소. 우리는 예정대로 떠납니다.”
이근후 박사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예정대로 26명의 의료봉사 팀은 네팔로 떠났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설산을 볼 수 있다는 설렘 속에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이라고 하기보다는 어느 시골의 운동장 같은 분위기였다.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 출입국 관리사무소로 걸어가는데 소똥 냄새가 진동했다. 얼마 전에는 들판에서 소들이 풀을 먹는 사이로 비행기가 내려앉았다고 하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근후 단장님을 따라 12일간 네팔에 머무는 동안 나는 고도 카트만두와 박타푸르, 그리고 히말라야 설산에 푹 빠지고 말았다. 그 이후 코가 꿰어 자꾸만 네팔이 가고 싶어졌다. “네팔이라는 나라는 처음 발을 내 딛기 어려워요. 그러나 한 번 발을 내딛어 코가 꿰이면 자꾸만 가고 싶어지는 이상한 나라이지요.”
당시 30년 째 네팔에 의료봉사를 펼쳐오며 한국인중 네팔 통으로 알려진 이근후 박사는 매년 한해에 두 번 이상 네팔을 다녀오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팔이 8000m 위에 있는 나라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네팔은 해박 70m에서 세계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8,848m까지 다양한 지형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와 아름다운 히말라야의 풍경을 가지고 있는 매력 있는 나라이다.
나는 이근후 박사의 말씀대로 자꾸만 네팔에 가고 싶었다. 탐험가와 몽상가들의 영원한 안식처인 히말라야 설산을 품고 있는 네팔은 한번 발을 내 딛기 시작하면 코가 꿰어 자꾸만 가고 싶어지고 만다. 그런 네팔에 6년 전부터 장학금 후원사업을 하면서 정말로 매년 가야만 한 일을 생겼다.
2009년 나는 수유리 북한 기슭에 위치한 작은 토굴에 살고 있는 향운사 명조, 지상 두 비구니 스님과 ‘남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이라는 한국자비공덕회(www.kjb.or.kr)를 창립했다. 두 스님과 뜻있는 몇 사람으로 시작한 자비공덕회는 2010년부터 네팔 칸첸중가 오지에 살고 있는 네팔어린이들을 대상으로 12명의 어린이를 선정, 전문대학까지 12년 간 장학금을 후원하기로 결정했다.
두 스님은 아내가 심장병을 잃은 인연으로 알게 된 인연을 갖고 있다. 당시 주지 명조스님은 10년 째 심장병을 앓고 있었고, 도반인 지상스님이 명조스님을 돌보며 생명을 이어오고 있었다. 두 분 스님은 여태껏 신도들의 시주만 받아오고 살아오고 있는데 남을 위하여 무언가 작은 봉사를 하고 싶다며 봉사단체를 만들자고 했다. 나는 해맑은 두 분 스님의 제의에 선 듯 응했다.
그렇게 해서 10명의 회원이 매월 남을 위해 기도를 하며 한 달에 2만 원 정도의 성금을 모아 그해부터 어려운 이웃을 돕기로 했다. 많은 기금을 모아 싸 놓기보다는 작지만 모아진 정성대로 바로 남을 위해서 쓰자는 것이 나의 제안이었다.
그러나 20만원의 작은 돈으로 남을 위해 무엇을 도울 수 있을 것인가 고민이 되었다. 처음에는 심장병 어린이 돕기도 생각해 보았고, 북한 어린이 돕기도 고려해 보았다. 그러나 그 돈으로 심장병 어린이를 돕는 것은 너무나 벅찬 일이었고, 북한 어린이 돕기를 알아보니 돈이 어디로 전달되는 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생각 끝에 우연히 네팔관광청한국사무소장인 케이피 시토울나 님을 만나 그 얘기를 꺼내게 되었다. “네팔에 장학사업을 하시면 어떻겠어요. 제가 자라나고 학교에 다녔던 네팔 동부 칸첸중가 인근 오지에 살고 있는 네팔의 아이들은 너무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농사를 짓고 있는 부모님을 돌보고, 스스로 생활비를 버느라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너무나 많아요.”
“돈이 너무나 작은데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소?”
“그들에게 한 달에 1000루피(약 10,000원)를 지원해주면 그 돈으로 책과 학용품, 생활비로 쓰며 학교에 다닐 수가 있어요. 그 대신 단기성 후원보다는 한 어린이를 선정하여 초등학교에 보내면 전문대학을 졸업하여 취직을 할 때까지 지원해주면 단 몇 명이라고 큰 보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첫해에 12 명의 네팔 어린이를 선정하여 칸첸중가 오지에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시토울나 님과는 네팔여행을 하며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어 온 터였다. 인연이란 연결고리는 참으로 묘하다. 911 사태에 떠났던 네팔 여행은 나의 마음에 더욱 네팔이라는 나라의 이미지를 강하게 각인시켰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이제 작지만 네팔에 장학사업까지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인연으로 2010년에는 20명의 자비공덕회 회원과 함께 컴퓨터 10대를 들고 장학금을 후원하고 있는 칸첸중가 오지에 위치한 버드러칼리 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는 매년 학교를 방문하기로 약속을 했지만 어려워지는 경제사정은 나의 네팔 행 발목을 잡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4만에 버드러 칼리 학교를 다시 방문 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번 코가 꿴 네팔행이 이제 매년 가보아야 하는 일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이들에게 70대의 컴퓨터를 선물하게 되어 더욱 기쁘다. 컴퓨터 자판을 지난 4년간 컴퓨터 모금운동을 벌렸다. 어려운 불황기에도 뜻있는 사람들의 크고 작은 성금이 답지했다. 가난한 나는 매월 기도하는 마음으로 쓴 원고료를 모아 작지만 성금에 보탰다. 그 기도하는 마음들이 모여 70대라는 큰 선물을 마련한 것이다. 70대의 컴퓨터 중 40대는 데스크 탑으로 네팔 현지에서 구입하여 자가 발전설비까지 설치하여 주기로 했고, 30대의 노트북은 우리금융에서 기증을 받을 수 있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이번에 네팔의 어린이들에게 70대의 컴퓨터를 선물로 들고 떠나며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다. 네팔 어린이들의 순수한 마음, 간절한 구하고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린 결과가 가져온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의 마음은 분명히 악한 마음보다는 선한 마음이 더 많다. 지난 5년 동안 네팔의 장학금 후원 학생 수도 100명으로 크게 늘어 났다. 그리고 우리가 네팔어린들을 만나러 간다고 하니, 어떤 사람은 가방 100개를, 또 어떤 사람은 옷 100벌을, 그리고 구두를 기증한 사람들도 있었다. 거기에다 책가방 100개와 볼펜 2000자루도 모아졌다. 책가방과 볼펜은 학생들에게, 가방과 옷, 구두는 학부모님들께 선물을 할 예정이다.
나는 27일 아침에 네팔로 떠난다. 카트만두에 도착하여 다시 경비행기를 타고 네팔 동부 칸첸중가 기슭으로 날아가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아이들이 있는 버드러컬리 인근 더먹으로 간다. 바구니에 가득 채워진 행복을 들고,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순진한 아이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이 뛴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나는 네팔이라는 나라에 코가 꿰어도 된통으로 낀 모양이다. 이근후 박사님이 80노구이신데도 불구하고 네팔이라는 나라만 고집스럽게 다니는 이유를 어렴푸시 알 것도 같다. 박사님의 네팔 의료봉사란 행복 바이러스가 내 온 몸에 퍼진 것일까? 하여튼 나는 다시 히말라야 설산이 손짓을 하는 네팔로 다시 떠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