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금요일, 맑음
6월 첫날부터 태양이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며 임진강 적벽위로 솟아올랐다. 이른 아침부터 무더운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올리듯 태양빛이 작렬하다. 임진강 적벽과 금굴산의 녹음도 하루가 다르게 짙어만 간다.
텃밭으로 발길을 옮기니 아침이슬을 머금은 채소들이 태양빛을 반사하며 보석처럼 빛났다. 아침이슬은 목마른 채소들에게 보약이나 다름없다. 5월 말일경부터 비가 내리지 않아 뜨거운 태양이 금방 대지를 마르게 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 집 텃밭은 모래밭인지라 물을 주지 않으면 금세 푸석푸석하게 말라버린다. 나는 수도꼭지를 틀고 고무호스를 길게 끌고 가 텃밭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허공에 흩뿌려지는 물줄기를 보고 새들이 텃밭으로 슬슬 날아들었다. 새들은 채소 잎사귀 위에 맺혀있는 물을 한 모금 마시러 오는 것이다. 녀석들은 금굴산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를 부르다가 내가 고무호스를 들고 텃밭으로 나서면 귀신 같이 알고 물을 마시러 온다.
6월의 문턱에 들어서면 들어서면 모든 작물들의 생장이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토마토는 벌써 5층까지 올라와 꽃이 맺혀 있다. 양배추는 똬리를 틀고 포기가 차면서 단단하게 결구를 시작하고 있다. 나는 벌레 방지용 양배추 망사를 열고 풀을 정리하며 마지막 웃거름을 주었다. 명아주, 바랭이, 개망초, 쑥, 피 등 잡초들이 양배추를 에워싸고 함께 성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녀석들을 성큼 자란 양배추의 위세에 눌려 맥을 못추고 있다. 양배추가 우거지면 풀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키 큰 명아주, 개망초, 까마중의 허리를 가위로 잘라 양배추 키보다 크지 않게 해주었다.
브로콜리는 송이가 단단해지며 하루가 다르게 커지더니 가운데가 볼록하게 솟아오르며 마치 육체미선수의 잘 발달된 근육처럼 봉오리 전체가 울룩불룩 솟아 나오고 있다. 정식을 한지 딱 두 달이 되었는데 이렇게 성장을 하다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브로콜리는 꽃이 피면 영양이 떨어진다. 나는 꽃이 피기 전에 송이가 단단해진 것만 골라 수확을 했다. 브로콜리는 송이보다 줄기의 영양가가 높다. 그러므로 송이 밑 두세 매듭 아래를 잘라 줄기와 잎을 함께 잘라내야 한다.
날씨가 뜨거워지자 고구마 줄기도 하루가 다르게 왕성하게 자라나고 있다. 고구마는 더운 기후를 좋아한다. 부처님오신 날 집을 비운사이 고라니들이 침입을 하여 한차례 고구마 잎을 모두 서리를 해먹어버렸지만 날이 점점 더워지자 다시 자리를 잡고 잎들이 쑥쑥 자라나고 있다. 고구마를 볼 때마다 나는 포근한 고향의 정서를 느낀다. 그래서 나는 매년 고라니에게 상납을 하면서도 고구마를 키운다.
달갑지 않은 고라니 손님을 거절하기 위해 나는 텃밭의 망사를 빈틈없이 보수를 하고, 밤중에 소변이 마려우면 일부러 밖으로 나가 헛기침을 하며 텃밭 한쪽에 서서 일을 보곤 한다. 그렇게 한 뒤로는 아직 고라니들이 발을 들여놓아 않고 있다. 그러나 안심을 할 수는 없다. 밤마다 금굴산에서 고라니들이 우훼웩~ 우훼웩~ 하며 가래 끓는 소리로 울어댄다. 발정기도 지났는데 녀석들은 아마 자기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우는지도 모른다.
고라니는 참으로 영특하다. 언제 또 다시 침입을 할지 모른다. 내가 이곳 금가락지에 둥지를 튼 지 1년차 까지는 고라니가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이사를 오기 전까지는 텃밭농사를 전혀 짓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먹을거리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텃밭을 일구기시작하면서부터 고라니들은 먹을거리가 있다는 낌새를 알아채고 줄기차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고라니와 전쟁에 돌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발을 거꾸로 걸어놓고, 거름포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워놓기도 하고, 망사를 이중 삼중으로 둘러쳤지만 녀석들은 망사 밑을 파고들어오거나 심지어는 망사를 찢어버리고 침입을 했다.
그래도 우리 집은 덜하다. 윗집 장 선생 집은 텃밭이 바로 금굴산에 접에 있는데 망사를 2층 3층으로 치고 신호등처럼 불이 번쩍거리는 전깃불도 켜고, 수용소처럼 전류가 통하는 전선으로 둘러치고 가시 망까지 쳐 놓았는데도 고라니들은 방어망을 교묘하게 뚫고 들어왔다. 어떤 면에서 녀석들은 본능적으로 사람보다 영특하다. 이런 오지에 살아가려면 야생동물들과 동고동락을 할 수밖에 없다.
텃밭 앞쪽 울타리 가에 심은 옥수수들이 훌쩍 자라나 독일병정처럼 도열해 있다. 몇 그루 아니지만 나는 수염이 달린 옥수수가 어떤 야생화보다도 그렇게도 좋다. 그 수염이 말라가기 시작하면 조금 덜 익은 옥수수를 우지직 부러뜨려 압력솥이나 전자레인지에 쪄서 하모니카를 불며 먹는 맛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소하다.
오후 4시 경에는 텃밭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상추를 땄다. 이렇게 싱싱하게 커준 상추들이 너무나 고맙기만 하다. 오늘 따는 상추는 유방암으로 투병을 하고 계시는 작은 형수님께 보내드릴 상추다. 청상추, 아삭이상추, 비트잎, 로메인상추, 겨자상추, 케일, 샐러리 등을 골고루 따고, 브로콜리도 가장 큰 송이를 골라 땄다. 그리고 스프레이로 물을 살짝 뿌려 박스에 조심스럽게 넣어 포장을 했다.
오후 5시, 상추박스를 싣고 전곡 우체국으로 갔다. 마감시간 임박해서 보내야 조금이라도 더 싱싱한 상추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뭐, 돈으로 치면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도 정성을 들여 유기농으로 키운 상추를 보낼수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모든 병은 주변의 정성으로 나을 수 있다. 지난주에는 뇌출혈로 쓰러진 큰 처남에게 상추를 보냈는데…. 형수님에게 상추를 부치고 우체국을 나서는 마음이 착잡하기만 하다. 작은 정성을 보내는 것이지만 맛있게 드시고 어서 빨리 쾌유를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유기농으로 텃밭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아내는 점점 너이도 들어가고 힘이 들어가니 해마다 텃밭을 줄여서 지으라고 주문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2백여 평의 텃밭에 한 치의 여백도 없이 매년 빽빽하게 작물들을 심는다. 사실 우리만 먹는 것이라면 30여 평도 족하다. 그러나 있는 땅에 조금 넉넉하게 지어 가까운 주변 이웃들과 상추 한줌을 나누어 먹는 행복이야말로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텃밭에 나가 물을 주며 작물들을 자식을 돌보듯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 살펴본다. 늦은 오후, 석양빛이 따갑다. 해, 땅, 물, 그리고 사람의 정성이 작물을 완성시킨다. 나는 밀레의 만종에 나오는 그림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해와 땅, 물에 감사기도를 올렸다.
“해땅물의 신이시여, 무쪼록 작물이 잘 자라도록 보살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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